*오역 있습니다. 의역은 입맛에 맞춰서 더해봤습니다.
*영상은 링크 주소 참고(https://youtu.be/UIIkXFihj4g)
(2023년 글이라 오역있음)
1장
백기는 곧장 아연실색한 얼굴로 나의 병실로 들어왔다.
그가 지난날 자신이 다쳤던 때보다 더 긴장을 하고 있어 나는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내 다리 부상과 대 다음 업무 상황을 고려해 백기는 바로 우리 집에 들어와 살게 되는데……?!
회상
병실 문이 세차게 열리면서 백기가 화가 나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들어왔다. 나는 화장품을 바르던 손을 무의식적으로 떨었다. 한예준 그 양심 없는 놈이 나를 팔아먹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선배가 기운차린 척할 시간도 없이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서, 선배, 오셨네요!"

선배는 내 얼굴에 만개한 미소를 완전히 무시하고는 내 왼발에 있는 깁스를 힐끗 보더니 성큼성큼 병원 침대 앞으로 걸어왔다. 팽팽하게 조여진 끈처럼 선배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선배, 저는 괜찮아……"
"정강이뼈에 금이 가고, 연조직 여러 곳에는 타방상을 입은 데다, 몸 여러 군데에는 벌어진 상처, 거기다 가벼운 뇌진탕도 있어."
모든 글자가 살얼음처럼 백기의 입을 뚫고 나왔지만 굳은살이 박힌 그의 손가락은 상처를 피해 각별히 더 상냥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진찰을 다 끝내셨는데 그렇게 큰 문제는 없다고 하셨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눈꺼풀을 들어 나를 깊이 응시했다.
"좋아요. 닥터 백기 선생님. 천천히 확인해 보세요. 저는 절대로 한마디도 안 할 거니까."
오로지 그가 나를 걱정해서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억지로 지어 보이던 장난스러운 미소를 거두어 들어고 얌전히 입을 다물고 그곳에 드러누웠다.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 그를 보고 나는 고개를 들어 손가락으로 그의 눈매를 살살 어루만졌다. 손끝 아래로 유난히 긴장하고 있는 얼굴과 가파른 호흡이 느껴졌다.
백기는 뻣뻣한 움직임으로 흐트러진 손동작을 멈추고는 마치 이 순간 몸이 굳어버린 것처럼 침대 양쪽에 손을 얹고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선배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분명 선배 자신의 몸이 온통 상처투성이인 상황에서는 그가 이렇게까지 긴장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일어나서 몸이 경직되어 있는 이 사람을 꼬옥 껴안았다.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가 내 목덜미로 달려들면서 그의 손이 내 등에 살며시 내려와 천천히 조이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 정말."
"이 일이 선배와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그냥 제가 *운이 나빠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던 것뿐이에요. 저야말로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복선
사실 최근 나는 누군가에게 계속 괴롭힘을 받고 있었다.
몇 년 전의 그 *광적인 팬과는 달랐다. 이 사람은 처음엔 익명의 편지로 자신이 내 프로그램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스튜디오 데이트 때 일
아마도 그건 어떤 논평이나 어떤 프로그램의 에피소드, 아니면 모 프로그램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뒤죽박죽 알아보기 힘들게 적혀 있는 그의 메모 때문에 나는 그 이유를 판단할 수조차 없었다.
어쩌면 그 자신조차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는 기울어진 자신의 인생과 취약해진 정신 상태를 내 탓으로 돌리고는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제가 대회 출품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어디선가 알아냈나 봐요. 저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느꼈나 봐요."
"그래서 오늘 너를 직접 계단에서 밀어버린 거고?"
나는 그의 몸이 그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여전히 땀이 살짝 배어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매만졌다.
"다음번에는 훨씬 더 조심할게요."
그제서야 그는 숨을 거칠게 토해내며 온갖 피로와 죄책감으로 가득 찬 눈을 한 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래도 경찰에 신고했으니 곧 그 사람도 잡힐 거예요."
"이미 잡았어."
백기는 간단명료하게 말을 끝낸 뒤 충격받은 내 시선을 받으며 내 허리를 감싸 안고는 천천히 침대 위로 반듯이 눕혔다.
"잡았다고요?!"
"오늘 임무를 끝내고 철수하던 중에 한예준의 전화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처리했어."
백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했지만 이 말엔 냉기가 배어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병원 침대를 더 높이 조절하고 엎드리는 것처럼 양팔을 침대 가장자리에 겹쳐 올렸다.
"선배도 피곤하죠? 올라와서 좀 쉴래요? 비집고 들어오면 그럭저럭 괜찮을 거예요!"
"이건 특파팀 병원 침대가 아니야. 게다가 난……이렇게라도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어."
*귓속말 너곁 설명; 특파팀 병원 침대에는 두 사람이 누워있을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애정 어린 손으로 내 왼손을 잡아당겨 그의 볼 옆에 가져다 댔다.
"잠시만 더 너를 보게 해 줘."
*
병원에서 며칠 동안 관찰한 후,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집에서 요양할 것을 권했다.
선배가 나를 데리러 병원에 왔을 때 그는 스포츠 가방을 메고 있었다.
선배에게 이 이후로 다른 스케줄이 있는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하게 그는 익숙한 스포츠 가방에서 푹신한 행군용 담요, 갈아입을 옷과 노트북을 꺼냈다.
"……?"
"너는 아직 다리를 못 움직여서 활동하기 불편하잖아. 나는 거실에서 잘게."
그는 자신은 결백하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이렇게 말했다.
"너 혼자라 마음이 놓이질 않아."
독점 방송국
한예준? 또 무슨 일이야?
백기 형, 대표님에게 사고가 났어.
누군가가 대표님을 계단에서 밀어서 대표님 다리가 부러졌어.
뭐라고?
어떻게 된 거야? 너 지금 병원인 거야?
응, 고은 씨와 함께 대표님 옆에 있어.
이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나에게 알려줘. 누구도 그녀의 병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말해봐(!)
백기 형, 거기 어디길래 바람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리는 거야?
사무실로 가고 있어.
우선 무슨 상황이었는지 말해봐. 잔말 말고(!)
네가 지금 하고 있는 말들은 모두 증거 및 조사를 위한 증언의 일부분으로 기록될 거야.
흠흠, 우리 프로그램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시청자가 우리 대표님을 쭉 괴롭히는 상황이었어.
최근 우리가 대회 출품작을 준비하고 있었잖아? 그게 그 사람을 자극했는지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른 것 같아.
상대방을 특정 지을 수 있겠어?
응, 그건 가능해. 저번에도 우리 회사를 괴롭혔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 그 사람을 본 적이 있어.
……그래.
그렇구나, 알겠어.
대표님이 겁에 좀 질리셨는데 의사 선생님은 가벼운 뇌진탕이래.
경찰엔 신고해 뒀어.
나중에 서에 가서 상황을 확인해 볼게.
그런데 그쪽은 Evolver가 아니야, 백기 형……
그건 네 소관의 일이 아니야.
백……백기 형, 왜 그렇게 무섭게 말하고 그래……
먼저 끊을게……대표님이 말하지 말라고 한 거니까 나중에 나 팔아먹지나 마.
그녀가 나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
……아니, 그게……음……
일 다 처리되면 바로 도착할 거야.
2장
긴장감 넘치는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내 시선은 항상 그에게 쏠렸고, 백기는 내가 무엇을 하든 가장 먼저 내 앞에 나타났다.
회상
긴장감 넘치는 '동거 생활'이 시작됐다.
"C93 파일 받았습니다. Q2랑 Z89호 파일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다음 달 합동 작전에 참여하는 대원들은 사흘 내로 명단을 잘 확인해 두도록."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서 스크린 상의 편집된 클립 영상을 마주보고 있었지만 내 신경은 자꾸만 소파 쪽으로 향해 쏠릴 뿐이었다. 남자는 소파 위에 축 늘어져서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노트북을 한 손으로 타이핑하고 있었다.
선배는 현재 우리 집에 머물고 있었다.
——실은 지금까지도 나는 이 일이 와닿지가 않는다.
막 잠에서 깨어나 위로 치켜 올라간 머리카락, 나란히 놓인 칫솔컵, 식탁 아래로 앞으로 살짝만 내밀어도 닿을 만한 발가락.
뽀글뽀글 알록달록한 색깔의 거품들이 끊임없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나는 온몸이 공중에 하늘하늘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시각각 긴장한 상태였지만 한편으론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선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별일 아니니까 이번 주엔 찾지 말라고 했을 텐데.
"고진 친구, 걱정은 고맙지만 필요 없어.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 거야말로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야."
선배가 이를 갈면서 마지막 말을 내뱉자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장난꾸러기처럼 바람을 따라 살랑살랑 그의 귓가를 왔다갔다 하며 간지럼을 태우자 그는 끝내 귀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선배는 거의 볼 수가 없었는데.
그는 자신이 편안함을 느끼는 환경 속에서 모든 방어막을 내려놓은 것처럼 조금은 해이하지만 부드럽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다음 순간, 평온해 보이는 선배의 얼굴이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나면서 그는 나를 바로 단번에 들어 올렸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아,아니에요."
나는 훔쳐보다가 들켜버린 부끄러움을 억누르고 핑계를 대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해맑게 미소 짓는 그의 모습에 말을 얼버무릴 뿐이었다.
"물론 그냥 나를 바라만 봐도 되지만 그러면 내가 오해하기 쉬울 것 같아서.”
"저……저는 그냥 선배가 바빠 보여서요! 제가 너무 귀찮게 구는 게 아닌가 해서……"
"귀찮지 않아."
"너의 일이야말로 내가 바쁘게 처리해야 할 일인 걸."
그는 나를 의자 위에 다시 앉혀두고 소매를 살짝 걷어올려 실한 팔뚝을 드러낸 채 두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이렇게 보여드리면 될까요?"
"……저 일해야 해요! 선배도 빨리 가서 일하세요!"
나는 부끄러워서 시선을 돌리고 열심히 일을 하려는 시늉을 했지만 곁눈질로 그의 올라간 입꼬리와 무척이나 경쾌한 발걸음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30분 후, 나는 집중하는 그의 옆모습을 보고 고민하다가 슬쩍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이 남자는 또다시 냉큼 일어나서 내 앞으로 걸어왔다.
"왜 그래?"
"……선배는 제가 뭘 하려는지 어떻게 아는 거예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으면서."
"주특기지. 뭣보다 널 신경쓰고 있으니까."
선배가 아무렇지 않게 당연한 일을 하는 것처럼 말하니 또다시 내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은 열심히 일한다고 볼 수 없는 건가요?"
"휴가를 냈지. 걔네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냥 내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릴 만한 일들이 필요했어."
다소 구체적이지 않은 선배의 말에 나는 조금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그는 분명하게 해명할 생각이 없는 듯 방금 전의 화제를 이어나갔다.
"뭘 하고 싶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요."
그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들어 안고서 거실을 걷기 시작했다.
"선배, 이러면 앉아있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렇지만 의사 선생님께서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잖아."
"……"
이 잠깐의 '활동을 마친' 뒤, 나는 노트북 앞으로 다시 돌아와 내가 다친 이유를 생각하고 열불을 내기 시작했다.
두 시간 후, 나는 만만치 않은 강적을 만난 것처럼 자세를 바로 잡았다. 선배는 현재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영화 속 첩보 요원 같은 깔끔한 액션을 꿈꾸며, 혹여나 작은 소리라도 날까 걱정하며 숨을 죽인 채 천천히 몸을 옆으로 돌렸지만. 누군가의 그림자가 내게 드리워지고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저 혼자서 할 수 있어요."
"내가 필요 없다는 거야?"
이 사람은 아예 눈살을 살짝 구기며 나는 도무지 못 이기는 측은함이 잔뜩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당연히 선배가 필요하죠!"
"엉엉, 하지만요. 말로 하기엔 좀 창피해서 그런데 저 혼자 화장실로 '이동'할 수 있게 해 주시겠어요?"
"불허합니다."
내가 저항하는 것을 포기한 눈빛을 하자 그는 싱긋 웃으며 나를 안아들고 화장실 안까지 데려다준 뒤, 신사답게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나는 깁스를 한 다리를 쳐다보며 이 재앙을 일으킨 원흉을 진심으로 원망하기 시작했다.
선배는 지나치게 예민한 상태였다.
내가 이번에 너무 갑작스럽게 다친 탓이라고 해도 그는 내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어 불안해하고 있었다.
종종 그가 말없이 보내는 시선을 느끼곤 했지만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선배라면, 그가 이렇게까지 예민한 이유는 단순히 지금의 일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
"……선배."
"전 그냥 샤워하고 있을 뿐이라고요! 입구를 지킬 필요는 없어요!!"
부끄러운 나머지 화를 내면서 욕조에 머리를 파묻는데 유리창 너머로 선배가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고, 이에 나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을 향해 몇 번이고 욕을 퍼부었다.
"흠, 천천히 해. 미끄러지면 안 되니까."
그는 조금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한 손은 무릎 위에 얹고는 들릴 듯 말 듯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 물방울이 수면 위로 떨어지는 소리만 남았다.
순식간에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사라지면서 그동안 계속 억누르던 감정들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었다.
부상으로 촬영 현장에 집접 갈 수 없게 되면서 예정되어 있던 계획이 차질이 좀 생겼다.
'당신 같은 사람은 PD가 될 자격이 없어요.'
핏빛의 새빨간 글씨처럼 그 말들은 불쑥 내 눈앞에 튀어나왔다.
나는 살며시 한숨을 쉬었다.
선배가 이곳에 머물면서 내 대부분의 신경이 선배에게로 쏠려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선배."
"응?"
뭔가에 이끌리듯 그의 이름을 불렀는데 바로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굉장히 묘한 느낌이었다.
이전과는 달랐다. 그땐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면 전파를 통해 들었었는데 지금은 그의 진짜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전해졌다.
고개만 들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손만 내밀면 그에게 바로 닿을 수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더욱 긴밀하고 더욱 가까이에서 공기를 함께 마시며 온몸으로 생명의 에너지를 잔뜩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흐릿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서로 이 고요한 순간에 피어난 감정들을 은밀하게 나누었다.
그 누구도 이 순간을 깨뜨리지 않았다.
*
선배는 정말로 행군용 담요를 가져왔지만 나는 그가 잠을 못 이룰까 걱정하며 끝내 이불을 한 채 더 가져와서 그와 함께 침대 위에 누웠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경직되어 각자의 이불에 스스로를 꽁꽁 싸매고는 똑바로 누운 채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밤은 너무나 길었다.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숨쉬기조차 자제하고 있었다.
"풉……"
왠지 모르게 우리 둘 다 숨죽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선배도 내 웃음소리를 듣고는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우리들은 서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부드러운 달빛 속에서 나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두 눈동자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선배, 사실 오늘 계속 긴장하고 있었어요."
"나도 그래."
그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얼굴에 닿을 정도의 따뜻한 숨결을 내뱉자 내 심장이 위치한 곳마저 간지럼을 탔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요. 낮에 바람을 이용해서도 저를 도와줄 수 있지 않았나요?"
"어떻게?"
"예를 들어 바람을 이용해 저를 들어올려 이리저리 옮길 수 있지 않았나요?"
"가능할 거야."
"……그럼 왜 그렇게 하지 않은 거예요? 선배 혼자 왔다갔다 하기엔 너무 귀찮잖아요."
선배는 눈을 접어 웃고는 졸려서 나른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고개를 돌려 내 이마에 살며시 뽀뽀하면서.
"내가 그러기 싫으니까."
*기억의 실루엣
칠흑같은 어둠이 모든 소리를 삼켜버린 듯 벌레들이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꽤 간만에 푸르른 빛이 희미하게 몇 번 깜빡였다.
백기가 인이어를 두드리자 전류의 소리가 전파를 통해 들려왔다. 상대방의 신호는 꽤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백 대장님, 누군가 대장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백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A4 지점에 배치한 저격 부대의 옵저버였다. 그가 보고한다는 건 상대방이 자신으로부터 수백 미터 이내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 알겠다. 계속 관찰하도록."
백기는 자신을 숨길 생각이 없는 것 마냥 밤길을 걸었다.
햇빛 아래에서는 늘 환하게 보였던 그의 두 눈은 지금 이 순간, 달빛의 음침함에 젖어 얼마 간의 밤(夜)을 가져온 것처럼 밀도 있고 깊이 있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표적을 무력화시킬까요?"
그의 눈에는 칼날처럼 차가운 예리함이 서려 있었지만 목소리는 짓눌린 것처럼 지극히 낮았다. 조심스럽게, 부드럽고 깨지기 쉬운 무언가를 놀래키고 싶지 않은 것처럼.
"아니."
"현재로선 표적이 경계심만 가지게 될 거야. 계속 관찰하고 수시로 상대방의 동향을 업데이트하도록."
"알겠습니다."
"B1 부대에도 알려서 시야를 확보하고."
"현 시점에선 루일의 능력은 필요하지 않지만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저격로와 진입로를 모두 확보해 놓았습니다."
"좋아."
해당 저격 부대는 늘 주도면밀하게 여러 가지 세부사항을 고려해서 행동하며 옵저버와 저격수끼리 호흡도 매우 잘 맞아서 그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수시로 전담 인력을 파견해서 유연 씨의 안전을 신경 쓸까요?"
이 뜬금없는 질문은 백기를 당황시켰다.
대개는 백기의 짧은 침묵이 어떤 심정을 대변하는지 모를 테지만 질문을 던진 옵저버는 이에 재빨리 덧붙였다.
"고 대장님께서 시간 나면 여쭤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빙빙 돌려서 말하지 않아도 백기의 머릿속에는 곤히 잠들고 있을 여자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그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보호해야 할 사람은 바로 그녀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럴 것 없어."
"내가 여기 있을 거니까 내가 그녀를 잘 챙길 거야."
"대기하다가 내가 가면 다시 인원을 배치해. 너무 가까이 가진 말고."
그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움이 한결 더해졌다.
달빛이 먹구름을 스며들면서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밤도 순간 한결 부드러워졌다.
"임무에 집중하도록. 지금의 난 휴가 중이니 수시로 부대를 이끌 수는 없으니까."
"잘 알겠습니다."
"음…… 백 대장님, 휴가는 잘 보내셨나요?"
"너희들 점점 갈수록 뻔뻔해지네."
"다들 운동장 돌고 싶은 거지?"
인이어로 옵저버의 어색한 억지웃음과 함께 저격수가 끝내 참지 못하고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더니 백기의 이어폰은 다시 침묵이 되어 돌아왔고 전류 소리마저 사라졌다.
아주 조용한 밤이었다.
백기는 집으로 들어가 *오로지 그에게만 속하는 달빛에 녹아들었다.
*복선
3장
내 대회 출품작을 정상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나는 결국 직접 암실에 들어가서 사진을 현상하기로 결심했다.
다만 내가 그 사진들을 똑바로 마주하자 그 지독한 악담들이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고 그 순간 백기가 내 곁에
다가와 내가 그간 간과했던 것들을 찾아주었다.
회상
한밤중에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내 옆에서 누워있어야 할 사람이 없었다.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현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나는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 마냥 서둘러 눈을 감았다.
곧 침대 뒤쪽이 살짝 움푹 꺼지면서 한숨소리가 조심스레 새어나왔다. 익숙한 온기가 이불을 사이에 두고 내 등 뒤로 아주 가깝게 달라붙었다. 부드러운 터치가 소중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내 뒤통수에 닿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쳐서 선배 몰래 살며시 눈을 떴는데 그 순간의 선배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이런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선배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나섰지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진 않았다.
그가 나를 도와 계속해서 바쁘게 일해준 덕분에 필름의 전반적인 진행이 뜻밖에도 다시 정상 궤도로 올라왔다.
"대표님, 두 달 전에 구형 카메라로 찍은 그 사진들 현상하셨나요? 자료 파일에는 없는 것 같아서요."
"……! 요 며칠 너무 바빴어서 유영 씨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계속 잊어버리고 있었을 거예요."
"지금 대표님 다리도 불편하실 텐데, 혹시 필름은 대표님에게 있나요? 아니면 제가 대표님 집에 한 번 들렀다가 회사 암실에서 현상할게요."
유영 씨의 말을 듣고 나는 말없이 서랍을 열어 상자 안에 있는 필름 한 통을 찾았다.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유영 씨는 다른 일 보세요."
전화를 끊은 뒤, 나는 사진을 찍은 필름을 통째로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선배는 나를 한번 보더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노트북을 내려놓고는 침실로 들어가 옷을 멀끔히 차려입고 나왔다.

"갈까?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배는 왜 이럴 때만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그 필름에 찍힌 것들을 네가 직접 보지 않으면 네가 확신을 못 가질 것 같아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마음속에 있던 고민들을 툭 털어놓았다. 내 눈앞에 있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넘기고 믿음직하게 나를 들어 올리면서.
"선배는 좀 위험한 사람 같아요."
"무슨 말이야?"
"선배가 저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선배 앞에선 비밀이 없는 것 같아요."
선배는 내 말을 듣고 얇은 입매를 살짝 치켜올렸다.
"괜찮아. 나도 너에게라면 뭐든지 말해줄 수 있어."
*

필름은 암실에 있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오히려 내 손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내 대부분의 신경은 선배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나를 비방하는 말들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암적색의 빛이 조용히 소용돌이를 치면서 내 눈앞에는 전에 보았던 그 핏빛의 새빨간 글자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당신이 찍은 것들은 모두 쓰레기야.'
'당신이 프로그램 촬영과 제작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 그 어떤 프로그램 제작에도 참여하지 말고 방송계에서 썩 꺼져버려.'
'당신은 PD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고통으로 가득하던 그 순간 나를 스쳐가던 그 눈빛은 끔찍이도 시려웠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자 다리가 또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이 있을까?
눈앞에 있는 필름들이 괴상하게 웃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나는 이 모든 것들에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정말 프로그램을 잘 만들고 있는 걸까?
내가 촬영한 것들이 정말 대중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대단한 프로듀서들이 그렇게나 많이 있는데 그들과 비교하면 나는 너무 뒤처져 있는 게 아닐까?
보이지 않는 밀물에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숨이 막혔다.
*
갑자기 나타난 희미한 불빛과 함께 따뜻한 두 손이 내 볼을 만지면서 내 얼굴을 돌렸다.
나를 건져내는 것처럼.
그 한 쌍의 고요한 호박색 눈동자에서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선배……"
"잠시만 기다려줘."
그는 나의 망설임과 두려움을 꿰뚫어 본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주머니에서 붉은색 립스틱을 하나 꺼냈다.
"이건……"
"옷을 갈아입으면서 침실에 있는 화장대 위에 있는 걸 가져왔어."
"우선 말하지는 말고."
그는 립스틱 뚜껑을 돌려서 열고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내 눈앞에 다가와 서툴면서도 신중하게 립스틱을 내 입술에 발랐다.
분명 방금 전까지도 어두컴컴했던 붉은색이 모두 그의 뒤에 가려졌다.
호흡을 늦추고 진지하게 집중하던 그의 얼굴이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틀림없이 총조차 흔들림 없이 들고 있던 손은 공중에서 떨고 있었다.
립스틱 크림이 입술 가장자리에 발려진 듯 선배는 또 눈썹을 찌푸리고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그는 굳은살이 배긴 손가락 부위를 이용해 매우 부드럽게 내 입술의 립스틱을 공을 들여서 천천히 펴 발랐다.
예전에 그가 나에게 매니큐어를 발라주었던 모습이 떠올라 그만 입가에 미소를 지어졌다.
*도전 데이트
"웃으면 안 돼."
그는 이렇게 말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
립스틱이 잔뜩 묻은 손가락으로 정밀하게 '마무리 작업'을 하던 선배는 앞뒤로 살핀 뒤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예쁘다."
"화장 안 해도 예쁘지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여자들에게 화장은 종종 자신감을 얻는 데 도움을 준다고 들었어서."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립스틱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면 나는 네가 그런 의심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자신감과 용기를 찾을 수 있도록 도울 거야. 이것들은 내가 너에게 주는 게 아니라 너에게 있던 것들이야. 나는 네가 촬영한 것들을 좋아해. 너는 늘 잘하고 있었어."
그는 지금까지 당연히 그래왔었던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하고 진지하며 직설적인 태도로 말했다.
내 눈앞에 서서히 자욱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나는 선배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눈을 깜빡거렸다.
"선배, 위로해줘서 고마워요. 그렇지만 제가 찍었다고 해서 그걸 좋아할 필요는 없어요."
"나에게도 내 나름대로의 판단이 있으니 무조건 너를 칭찬하진 않을 거야."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손에 들고 있는 립스틱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내 입술에 살며시 손을 묻혔다.
*
그와 동시에 그는 립스틱을 돌려서 립스틱 크림을 꺼내고는 책상에 기댔다.
이 순간의 백기는 부드러움을 일체 거두어들이고 날카롭고 위험한 아우라가 짙게 느껴졌다.
그는 입술 자국이 희미하게 번진 손등을 입가로 가져가 묻어난 립스틱을 나른하게 문질렀다.
내가 그의 손바닥에 남긴 입술 자국과 대비를 이루면서 조금은 무심해 보이는 나른함을 지니면서 은밀하고 매혹적으로 보였다.
"내가 지금 너의 촬영 대상이라면 어떻게 찍을 생각이야?"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직감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선 촬영 스타일부터 확인할 거예요."
"잡지와 같은 지면 촬영일 경우엔 한 장의 사진으로 주제를 집약해서 표현할 줄 알아야 해요."
나는 두 손으로 액자 제스처를 만들며 그에게 설명했다.
"유혹."
"표정은 싸늘한데도 먹잇감으로 위장한 흔적이 보이네요."
"만약 그 촬영이 지면 촬영이 아니라면?"
"그러면 스토리텔링을 해야죠."
"첫 번째 장면에서는 선배의 눈을 못 담을 수도 있으니 차라리 왼손에 있는 립스틱에 초점을 맞출 거예요. 그런 다음 렌즈를 재빨리 위로 올려서 손바닥과 입가에 묻은 립스틱 자국에 초점을 맞출 거예요."
나는 내 눈앞에 정말 카메라가 나타난 것처럼 묘사를 하면서 씬을 움직였다.
"유혹을 표현하기 위해서 먼저 얼굴은 절반만 노출시키고 그 옆에 걸린 사진을 비추면서 맥락을 형성할 거예요. 마지막으로는 초점을 흐리면서 주제의 상반신으로 이동할 거고요."
이렇게 말을 하면 할수록 내 목소리는 작아지면서 나는 선배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뜻을 이해했다.
내가 배운 모든 전문 기술과 내가 직접 얻은 프로 경력, 내가 이루어낸 모든 성공들과 실패들, 이런 것들이 나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줬다.
내가 진심으로 자신을 표현할 때 분명히 누군가는 좋아할 것이고, 누군가는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잊고 있었다.
이러한 능력들은 나의 자신감을 형성하는 토대이자 내가 지금껏 한 발씩 나아가서 다다른 그 어느 누구도 내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
선배는 내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손에 들고 있는 립스틱을 휙휙 흔들었다.
그는 항상 이랬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답을 내 손에 쥐어주기만 할 뿐이었다.
내 눈에는 눈앞에 있는 선배만 보였다. 숨을 들이쉬고 마시는 그 모든 순간들이 바로 그였다.
이 장면은 나만의 것이었다.
"백 선생님은 왜 이렇게 유혹적이세요? 모델이 되면 정말 큰일 나겠어요."
"아니지, 선배는 그때도 절 도와서 지면 촬영한 적이 있잖아요."
*뜨거운 데이트
나는 그 당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불량하게 의자에 앉아있던 선배를 떠올리며 그만 혀를 내둘렀다.
"나는 지금껏 너의 요청에만 응해왔는데."
*
그는 일어서서 한 손으로 책상을 짚고는 몸을 숙였다.
"그럼 내가 널 유혹했던 거야?"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긴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짜여진 숨결이 유혹하듯이 부드럽게 내 입술에 내려앉았다.
마치 또다른 형태의 소리 없는 위로인 것처럼 천천히 구석구석을 매만졌다.
더 자극적이고 더 찐하게.
"답은 뭐야?"
"선배가 이러면……제가 말할 수가 없잖아요……"
"그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4장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습격을 당했다?!
하지만 백기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동료들과 협력하여 범인을 제압했다.
이 일을 해결한 후 백기는 더욱 긴장한 상태였다.
그로 인해 백기는 내가 두려워할까 걱정해 내게는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결국 선배의 유혹을 이겨내고 사진을 현상해서 가장 적합한 사진들을 열심히 엄선했다.
사진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비슷해서 훌륭한 소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거동이 불편한 나를 위해 선배는 직접 나를 바래다줄 차를 한 대 구해왔다.
돌아가는 도중에 차가 갑자기 덜컹거렸다. 그는 뭔가를 알아차렸는지 갑자기 핸들을 오른쪽으로 요란하게 꺾었고 귀청이 찢어지는 소리가 차문을 스쳤다.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뭔가 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전화가 걸려온 듯 그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그 사람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조급했나 보네. 하긴 내가 미움을 제대로 사긴 했지."
백기는 이를 예상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싸늘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한 손으로는 핸들을, 다른 한 손으론 내 손을 잡았다.
"저격 지점으로 아율과 항졔를 보내."
"대기하고 있는 1부대와 2부대는 원래 계획대로 습격한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고 나머지 차량 4대를 차례로 뒤따라간다."
백기는 신속하고 간단명료한 지시를 내리고 핸들을 돌려 천천히 페달을 밟아 보다 외진 길로 향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선배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별 임무인 걸까? 아니면 갑자기 어떤 극악무도한 악당이라도 마주친 걸까?
나는 선배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고 싶지 않아 마음속의 불안과 걱정들을 억눌렀다.
"걱정 마, 내가 있잖아."
"하지만 집에는 좀 늦게 도착할 거야."
*
눈앞에 있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은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가 없었고 앞길을 밝게 비추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제외하고는 주변엔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백기는 백미러를 힐끗 쳐다보더니 차의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지도를 머릿속에 넣어둔 것 마냥 빠르고 안정적으로 운전했다. 그는 상대방을 어디론가 유인하려는 것처럼 굳이 따돌리지 않았다.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높은 담장에 의해 끊어지면서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계속해서 높은 담을 향해 접근하는데 백기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침착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타이어가 땅 위를 마찰하는 파열음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고 자동차는 관성으로 인해 반바퀴를 돈 뒤에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상대방은 우리에게 이미 퇴로가 없어졌다고 생각한 건지 속력을 내서 돌진해 왔다.
두 발의 총성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상대방의 타이어에 총알을 정확히 명중시켰다.
뜨거운 열기가 폭발음과 함께 만나면서 상대방의 차가 전복되었다.
거의 동시에 특행대 대원들이 초연으로 자욱해진 차량을 포위했다.
"나머지는 당신들에게 맡기겠습니다. 끊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선배는 다시 페달을 가볍게 밟았다. 우리 차량은 그곳에 잠시도 머물지 않고 대원들 사이를 빠져나가 집으로 빠르게 향했다.
*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선배는 조금 전 여유 있어 보이던 때와는 다르게 좀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는 초조한 듯 손가락으로 핸들을 매만지며 눈살을 찌푸린 채 말없이 입술을 다물었다.
"무서워?"
그는 머뭇거리며 질문을 했다. 그는 심지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그저 눈앞에 있는 칠흑같이 어두운 앞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섭지 않아요."
백기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선배가 있는데 뭐가 무섭겠어요?"
"혹시 이 일이 선배가 그간 바빴던 것과 관련이 있나요? 그동안 선배 한밤중에도 외출했었잖아요……"
선배는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눈을 아래로 떨구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유연아, 너는 Evol 특수 경찰이라는 지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Evol 관련 범죄를 전담하는 분들 아닌가요?"
희미한 노란색 가로등 불빛이 그의 눈에 빛그림자를 비추었다. 백기는 말로는 분명하게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오로지 하향 헤드라이트로만 환하게 밝혀지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Evol 범죄는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 많아. 자신의 능력을 통제하기 어렵고 큰 위험이 따르는 데다 범죄의 영역 또한 넓어 일반 범죄자들보다 통제하고 체포하기가 훨씬 쉽지 않아. 그들을 잡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인력과 물적 자원, 그리고 더 많은 시간들을 할애해야 해. 더구나 내막을 파악하기 위해 수년간 잠복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수많은 Evol 특경들은 많은 경우, 어둠 속에만 몸을 숨겨야 해. 그들 중엔 자신의 이름을 버린 사람들도 있어."
선배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어떠한 수식어도 더하지 않고 진솔하게 말했지만 얼굴은 피부의 신경을 뜯어낸 것 마냥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핸들을 잡은 그의 손끝은 유난히 창백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숨겨진 특경들 외에도 '눈에 보여지는' Evol 특경도 일부 필요해."
"이들은 대중 앞에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 그들 자신을 드러내지."
나는 전에 선배를 우연히 마주쳤던 *약혼식이 생각나 잠시 멈칫했다.
*집착 데이트; 유연이가 파티를 가게 된 건 우연이었을지 몰라도 마주친 건 우연은 아닌 ^^
그때 선배는 자신이 임시방편의 미끼일 뿐이라고 에둘러 설명했지만 방금 전 그가 말한 두 상황을 연결 지어 보면……
"선배가 바로 '눈에 보여지는' Evol 특경 중 한 명인가요?"
"나는 내 동료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어."
*
어느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창문에 가느다란 물줄기를 남겼다.
"오늘 같은 상황은 자주 발생하나요?"
그가 침묵으로 그렇다며 답을 하자 순식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속상하고 또 가슴이 아팠다.
어쩌면 백기는 늘 한없이 불안정(无常)한 일상을 보내왔을 것이다.
순간, 최근 예민해진 선배와 당시에 이런 선배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져 나 자신도 모르게 눈꺼풀이 떨려왔다.
"제가 다쳤던 게…… 선배를 주시하던 범인이 한 짓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너의 옆에 늘 있었어도 이런 비슷한 일들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니까."
백기의 이 한마디는 일상을 바라보는 나의 판단을 모두 뒤엎어 놓았다.
이제서야 나는 지금 내 삶이 그가 말없이 나를 보호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그의 곁에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이름이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이름을 연결 지었다는 건 보통 '결혼'으로 간주한다네요?
아니어도 제가 그렇게 보겠읍니다 ^^
차는 어느새 우리 집 아래층에 멈춰서 있었다. 선배는 아무렇지 않게 시동을 끄고 나를 안아 집으로 향했다.
*
"그 사람들은 나더러 너와 거리를 두거나, 너를 숨기라고 권고했어."
"하지만 싫다고 했지."
*싫다고 한 이유 외전; 접힌 시간 보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왜 그랬어요?"
그의 머리 위로 뿌연 물안개가 떨어졌다. 앞머리가 눈앞까지 드리워 부드럽고 생기 있었다.
"너에게는 너의 삶이 있고 네가 하고자 하는 일들도 있는데. 네가 내 문제로 숨어야 하는 건 싫었어."
"그 사람들이 이 일을 문제 삼는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어. 내게 소중한 것들은, 절대로 내 손으로 붙들어 놓을 테니까."
*문장에 공통적으로 在乎가 쓰였는데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마지막은 의역을 한 스푼 더 첨가했지만 원래 뜻 중에도 좋아한다, 신경쓰다 란 의미도 있습니다.
*복선 있습니다.
나를 안고 있는 선배의 손은 믿음직스럽고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마치 모든 것이 이 따스한 품 속에서 지켜질 수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사람들은 내가 너를 보호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해낼 수 있어."
"나는 너를 제대로 지켜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너와 내가 당당하게 함께 하기를 바라."
"우리가 하고 싶은 모든 일들을 하며,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보내면서."
*

그가 나의 손을 감싸고 천천히 조이자 다소 눅눅한 공기가 우리 주변을 감쌌다. 어둠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우리를 안아주면서 불안하게 뛰고 있는 내 심장의 두근거림도 가라앉혔다.
지금 이 순간, 어떠한 말도 무의미했다. 나는 그저 그를 꼬옥 안아주고 싶을 뿐이었다.
"……제가 선배를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요?"
"날 떠나지 마."
백기는 마치 어떠한 말도 되돌아오지 않는 깊은 밤마다 남몰래 몇 번이고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염원하며, 간절하게 동경해왔던 집념인 것 마냥 무척이나 부드럽게 말했다.
"……사실 나도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야."
"백기도 평범한 사람이야. 나도 집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좋아하는 사람을 안고 싶은 사람일 뿐이야."
그는 손에 살짝 힘을 쥐고 신중히 숨을 들이마셨다.
"무서워?"
"이 질문은 조금 전 차 안에서 했지 않나요?"
"지금 다시 묻는 건 네가 나와 함께 있어서 상황이 더욱 위험해졌으니까."
창밖으로 도시의 흐릿하고 반짝이는 수많은 불빛들이 안개비를 뚫고 유리창을 지나 그의 눈에 떨어졌다.
분명 그토록 부드러운 불빛인데도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1. 선택지 무서워요.
"무서워요."
그 순간, 백기가 숨 쉬는 것을 멈췄다.
"하지만 상관없어요."
*앞에서 백기가 언급했던 말 1
나는 유난히 긴장하고 있는 그의 볼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살며시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깟 두려움보다 저는 선배가 더 소중해요."
*앞에서 백기가 언급했던 말 2
보이지 않는 어둠을 무서워하기보단 저는 선배와 함께 어둠 속에서 빛이 향하는 곳을 향해 함께 나아갈 거예요.
2. 선택지 무섭지 않아요.
"무섭지 않아요."
내 귀에 들리는 심장박동 소리는 치명적인 선고를 기다리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고 무질서하게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빛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선배가 몇 번을 물어봐도 제 대답은 하나뿐이에요."
"선배가 제 곁에 있으면 저는 결코 무섭지 않아요."
저는 선배 곁의 어떠한 어둠도, 수렁도 무섭지 않아요. 또한, 미래에 닥칠지도 모르는 어떠한 두려움도, 불안도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선배가 저의 모든 용기예요.
"이번에 일어난 일은 나와는 관련이 없었지만 나는 널 지키지 못했어."
그가 깁스를 하고 있는 내 다리를 흘끗 쳐다보자 그의 근사한 눈썹이 또다시 구겨졌다.
"내가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그럼…… 그때가 되면 제가 선배를 지켜드릴게요."
"반드시 저 스스로를 더 잘 챙기고 더 조심해서 선배가 집에 들어오면 저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도록 할게요."
선배는 순간 멍한 얼굴을 하고는 웃지도 않고 그저 나를 더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나를 본떠서 그려내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입술이 맞물리면서 그는 나에게 부드럽고 천천히 답을 했다.
일종의 안도감인 것 같기도 하고, 확인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기억 회상
피곤한지 잠이 몰려오는 밤, 눈을 감겨오는데 누군가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가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준비한 이불 두 채는 어느샌가 한 채만 남아 직무를 계속해서 수행하고 있었다.
침대의 다른 쪽이 천천히 내려앉으면서 나는 직감적으로 몸을 돌려 그 낯익은 따뜻한 체온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왔어요?"
"응, 나 돌아왔어."
"왜 안 자고 있었어?"
그는 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자연스럽게 나를 품에 끌어안고는 자신의 턱을 내 머리 위로 얹으며 흐뭇하게 심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그건 선배에게 물어봐야죠."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잘못을 시인하는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조용한 밤, 내 귀에는 단단하고 힘찬 심장박동 소리만이 남았다.
손끝 아래로 늘 긴장 상태였던 근육들이 차츰 이완되면서 보다 느긋하게 안정적으로 숨을 내쉬고 있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두 다리는 자연스럽게 얽히면서 서로에게 가장 편안한 자세를 찾았다.
그에게 있어, 경계심을 매 순간 유지하는 것이 일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가능한 한 그가 편안하고 안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선배."
"응?"
"지난 며칠 동안 선배 때문에 안 좋은 습관이 생긴 것 같아요."
"나도 마찬가지야."
이렇게 선배가 조용히 속삭이자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부드러운 달빛 아래 그의 눈은 다정함과 미소에 휩싸여 있었다. 마치 은은한 달빛 아래, 황금빛 바다로 나를 빠뜨릴 것처럼.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야 추측하기 쉬웠으니까."
"게다가 나는 우리가 같다는 걸 굳게 믿고 있으니까."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면서 내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건 안 돼요."
"선배가 제 곁에 없으면 저는 불면증에 시달릴 거예요. 그거야 괜찮지만."
"그렇지만 만일 선배가 불면증에 시달린다면 선배는 임무 중에 집중하기 힘들 거예요."
"떨어져서 혼자 있을 때는 푹 자고 푹 쉬어야 제 곁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들어 고집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약속할게."
"밖에 나가서 네가 아무리 많이 보고 싶어도 반드시 푹 자고 무사히 너의 곁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리고 너에게로 돌아가서 다시 이 '나쁜 습관'을 계속 고수하겠다고."
그의 숨결은 경건하고 굳은 언약을 하듯이 부드럽게 내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잘까?"
"잘 자."
몽롱한 달그림자 아래, 나는 *오로지 나에게만 속하는 달빛에 흠뻑 빠져들었다.
어느 날 밤의 달콤했던 꿈.
5장
나는 더욱더 대회의 출품작 작업에 전념했다.
이런 것들이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면서.
촬영 작업이 모두 끝난 후, 나는 백기를 우리의 촬영 장소로 데려가서 특별한 '수상 소감'을 '발표' 했다……
그 일을 겪은 후로 나는 대회 출품작 준비에 한층 더 몰두하게 되었다.
다리도 서서히 회복되어 이제는 여러 촬영장으로 달려가 현장에서도 제작 작업이 가능해졌다.
물론 여전히 선배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여전히 이따금씩 잠시 사라지곤 했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대강 알기에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심기일전해서 촬영에 전념했다. 스튜디오 안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내 마음속을 맴돌던 나 스스로를 향한 의심이 점차 다른 감정으로 대체되었다.
나는 기필코 최선을 다해 살아야 했다. 기필코 나 자신이 되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선배가 나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덕분이니까.
이 사람은 제멋대로이고, 만족할 줄도 모르고, 강인하기까지 했다.
그는 내 곁에 있고 싶어 하고 그는 또한 나 역시 그와 함께 빛나기를 원했다.
이 작품이 상을 받을지 말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을지 말지, 이것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니, 그걸로 충분했다.
*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으니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녹화가 끝났다.
텅 빈 세트장을 보면서 심호흡을 내뱉자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촬영을 위해 어릴 적 로맨스 드라마처럼 호텔 스위트룸 한 층을 통째로 빌렸는데.
임대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나는 예쁜 드레스로 갈아입고 선배를 초대해 이곳을 함께 찾았다.
"평소에는 이곳에 올 때마다 항상 작업복을 입고 있어서 온통 먼지투성이었어요. 저희에게도 럭셔리한 호텔 스위트룸 한 층을 통째로 빌리는 건 드문 일이지만 다들 이곳에서 일만 했네요. 그러니 마지막으로 이 '기회'를 맘껏 누려봐요!"
나는 드레스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선배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됐나 봐."
"흠흠, 저는 이번 작품에 대해선 정말 자신이 있어요."
"미리 축하받아도 되겠어?"
"그건 안 되겠네요. 모름지기 사람은 겸손해야 하는 법이라고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벌써부터 내가 상을 타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그만 바보같이 웃고 말았다.
"저는 아직 시상대 같은 자리에 서 본 적이 없는데 수상 소감까지 발표해야 하는 자리잖아요!"
"그럼 우리 연습해보는 건 어때?"
백기는 원형 소파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부끄러워하며 볼을 매만지다가 선배의 진지하고도 용기를 북돋는 시선 속에서 능청스럽게 미니 BAR 앞에 서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흠흠,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PD인 유연 입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정말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내 이름이 뒤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걸려 있고 지쳐있지만 최선을 다하는 수많은 얼굴들이 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이러한 눈부신 순간을 위해 수많은 날들을 늦은 밤에도 열정을 바쳐가며 일해주었다.
관중석은 어두컴컴했지만 한 사람의 눈만은 볼 수 있었다.
"저는……"
따뜻한 숨결이 가슴을 타고 계속해서 솟구쳐 올라오면서 눈앞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저는 정말 운 좋게도 저와 함께 최선을 다해 주시는 지금의 제 동료들을 만났습니다. 누구보다도 성실하며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기에 그 어떠한 찬사와 박수갈채도 받을만한 분들입니다. 너무나 좋은 분들이기에 저는 그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이미 저는 크나큰 행운을 받았다고 느낍니다."
"저는 또한 정말 운 좋게도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나는 백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수많은 말들이 가슴속에 차올랐지만 나는 그 어떠한 단어로도 그를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제가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사람입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고 해도, 저는 제 작품을 계속 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지금의 제가 되어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가 바로 저를 빛내준 사람입니다."
나는 천천히 선배 앞으로 다가가서 부드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 것 같아요?"
"하나가 빠졌어."
"네?"
" '저는 영원토록 그 사람 곁에 있을 거예요.' "
선배의 눈은 미소로 휘어졌고 그는 조금도 숨기는 것 없이 환하게, 또 보일락 말락 하게 수줍어하며 웃었다.
"저는 영원토록 그 사람 곁에 있을 거예요."
그는 부드럽게 나를 잡아당겨 나를 그의 무릎 위에 앉혔다.
"제가 나중에 정말로 상을 타게 된다면 꼭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하나 있어요."
"같이 행사장에 가줄까?"
"당연히 그것만은 아니죠."
나는 가방에서 지난번에 선배가 나에게 발라주었던 립스틱을 꺼내 그의 앞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선배가 지난번에 암실에서 해줬던 것처럼 립스틱을 발라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제가 더욱 자신감을 얻어서 무적이 된 기분을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선배는 아래를 쳐다보더니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흐드러지게 웃더니 내 손에서 있는 립스틱을 가져갔다.
그는 도망칠 준비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 한 손으로 내 뒤통수를 뒤덮었다. 이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립스틱을 내 입술 위에 얹고는 천천히 문질렀다.
선배의 얼굴은 더 가까이 다가와 우리가 숨 쉬는 공기마저 서로 얽히기 직전이었다.
립스틱은 또다시 번진 듯 보였다. 그의 입술은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것처럼 곧장 다가와 천천히 내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는 비정상적으로 느리게 움직이면서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어 나는 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조차 없었다.
"번져버렸네, 미안."
백기는 조금도 반성하는 기색 없이 말을 하더니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내 입술을 덮쳐 전율을 일으켰다. 그는 또다시 뒤로 물러나 립스틱을 바르는 데에 계속 전념했지만 그의 눈빛은 한결같이 나에게서 떠나지를 않았다.
한 번씩 '실수로' 잘못 칠해진 립스틱 자국에는 짓궂고 자극적인 애무가 뒤따랐다.
"선배……! 이건 립스틱 칠하는 방식이 아니잖아요."
"네가 이런 걸 말하는 줄 알았어."
그의 목소리는 정말 가까이에서 들려와 입을 지나 내 심장으로 더 빨리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입가에는 온통 너저분한 흔적들로 가득했다. 그가 생긋 웃자 내 모든 에너지가 다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런 선배 앞에서는 영 속수무책이었지만 이성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며 그의 입가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문지른 끝에 나는 그의 손에서 립스틱을 낚아챌 수 있었다.
"이, 이곳 스위트룸 층에는 수영장과 오락실 같은 공간들이 아주 많이 있어요."
"선배가 원하는 만큼 놀아도 되니까요. 일단 우리 여기서 즐기다가……"
*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내 세상이 빙글 돌더니 어느새 내가 선배의 아래에 깔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짓이에요! 왜 갑자기 기습 공격을!"
"음흠."
"그치만 내 거라며?"
그의 얼굴이 내 위로 올라가 있어서 강렬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제멋대로 밝은 탓에 지금 이 순간의 부끄러움을 전혀 숨길 수가 없었다.
아직 제대로 덜 닦인 그의 입가로 내 손이 스치면서 유난히 데일 듯한 따가운 그의 숨결을 스치고 지나가다 그의 귀 끝에 닿았다.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준다면서?"
"난 다른 일엔 전혀 관심 없는데."
그는 한 손을 옆에 있는 난간에 기대면서 나를 가뒀다. 그는 나를—— 내 눈에 선배밖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몰아넣었다.
눈부신 빛이 선배의 얼굴에 내리쬐자 그의 눈에 담긴 욕망과 갈망*이 거침없이 내 앞에 드러났다.
*4장 회상에서 간절하게 동경~에서 쓰인 단어와 같습니다. 편의상 갈망이라 번역.
이렇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무의식 중에 숨을 죽였고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선배 그렇게 저를 바라보지 마세요."
"어째서?"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내 귀에 맴돌면서 애무하는 듯한 부드러운 키스가 목덜미를 타고 어깨까지 천천히 떨어졌다.
"너무 긴장되니까요."
"난 네가 나 때문에 긴장할 때가 좋아."
"나 때문에 미쳐버릴 때도."
"나에게 반해버렸을 때도."
촘촘히 짜여진 키스가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내 피부 구석구석에 떨어졌다.
나의 세계는 그의 목소리와 함께 계속되는 신음소리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공허했다.
"지금 내가 너 때문에 이러는 것처럼."
*
그때 불쑥 객실에서 전화기 벨소리가 들려왔다.
백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람만이 슥 스쳐 지나가더니 내선 전화기를 날렵하게 잡아당겨 우리 가까이에 띄웠다.
우아하고 정중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존경하는 귀빈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혹시 애프터눈 티 서비스가 필요하실까요?"
"다른 요청사항이 있으시다면 저희가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백기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다시 몸을 숙였다. 내 입술 위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우리가 먼저 연락드리기 전에는 어떠한 방해도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원문은 감사합니다 이지만 백기 성격에 맞춰서 의역함.

*참고로 이 데이트 발렌 스피였던 집착 데이트가 검열되고 나서 들어온 데이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