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 흔적을 따라(寻踪有迹)
고진
유연 씨가 말한 사람이 이렇게 생겼어요?
조사실 안, 컴퓨터 화면에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남자가 떠 있었다. 냉엄한 얼굴에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은 마치 사냥개나 매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기억 속 모습과 특파팀 대원이 내 설명을 바탕으로 그린 몽타주를 몇 번이고 비교했다. 거듭 확인한 끝에 고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
거의 비슷해요.
유연
이 사람이 전에 어떤 Evol을 사용해서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유연
지금 당장은 확실한 증거로 삼을 만한 자료를 드릴 수 없지만……
고진
괜찮아요.
내가 망설이며 말을 잇자 고진은 망설임 없이 내 말을 끊었다.
고진
전에 백 대장이 당부했거든요. 유연 씨가 신고하는 일은 특별히 신경 써서 처리하라고요.
고진
이 사람에 관한 정보를 확인하도록 사람을 보내고, 최대한 빨리 찾아낼게요.
그의 눈빛에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니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언제나 나를 안심시켜 주던 한 쌍의 눈동자가 떠오르는 듯했다.
시공의 균열에서 연모시로 돌아온 뒤, 나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먼저 위겸에게 상황을 전달한 다음 곧장 특파팀을 찾아와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그 정체불명의 사람들은 여전히 밤바다를 뒤덮은 안개처럼 베일에 싸여 있었다. 내 힘만으로는 그들의 행방을 당장 밝혀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헌터 게임과 실험에 관한 사건에도 연루되어 있었다. 앞으로도 내 주변이 그리 평온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특파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들을 찾아낼 가능성도 분명 높아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줄곧 불안하게 떠 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진은 특파팀 대원에게 방금 확인한 몽타주를 넘기고 추가 조사를 지시했다.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유연
고마워요, 고 대장님. 그런데…… 선배는 잘 지내고 있어요?
유연
선배는…… 요즘 특파팀도 많이 바쁜가요?
지난번 백기와 헤어진 뒤로 그와 나눴던 아주 짧은 전화 통화마저 다른 세계의 백기와 나눈 것이었다.
그는 마치 거세게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따금 도시 곳곳을 스쳐 지나가지만, 정작 그 모습은 볼 수도 찾을 수도 없었다.
고진
백 대장은 지금 특파팀에 없어요. 요즘 좀 바쁘긴 해요.
그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면서도 잠시 망설이는 듯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고진
그게…… 요즘 일이 꽤 많거든요.
고진 역시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지, 결국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 역시 백기의 상황을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다만 예전처럼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고진
괜찮아요. 백 대장도 다 생각이 있을 거예요.
유연
……
유연
정말 다 생각이 있을까요?
고진
……
평소답지 않게 멍해진 고진의 얼굴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유연
두 분은 오랫동안 함께 싸워 온 전우잖아요. 대장님도 선배와 오랫동안 함께 행동하셨고요. 그런 점에서는 저보다 선배를 더 잘 아실 거예요.
유연
어떤 일은 대장님들만이 선배를 말릴 수 있고, 어떤 싸움은 대장님들만이 선배와 할 수 있어요.
유연
그 사실만은 꼭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진지하게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고진도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았다. 백기에게 예전에 그가 가졌던 버팀목과 믿음을 조금이나마 돌려주고 싶었다. 그가 단 한순간이라도 더 위로받고 숨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랐다.
유연
그리고 한 가지 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유연
전에 특파팀에 신고한 적이 있거든요. 연모시에서 또 헌터 게임이 열리고 있는 것 같다고……
고진
N8 구역 말이죠?
그는 이미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듯 정확한 구역 번호를 말했다.
고진
자세한 내용까지 알려드릴 수는 없지만, 헌터 게임과 관련된 사건들은 현재 특파팀에서 중점적으로 조사하고 있어요.
고진
N8에 있던 사람들의 신병도 확보했어요. 유연 씨 뒤를 따라다녔던 세 사람도 포함해서요.
유연
……!
그들과는 우연히 잠깐 마주친 사이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 세 사람이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듣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고진
자, 규정에 어긋나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더는 묻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그를 따라 조사실을 나섰다.
복도에는 차가운 빛이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다. 그 빛은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특파팀 대원들의 등 뒤로 내려앉았다.
다른 세계의 혼란스러운 모습과 비교하면 지금의 연모시는 유난히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그 평온함 아래에는 언제나 불안한 격류가 숨어 있는 듯했다. 소리 없는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기회를 엿보는 무언가처럼.
그때 복도를 걷던 중 한 소년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두 눈에는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허함만 가득했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무심코 뒤돌아보니 그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다. 예전에 조사했던 고등학생 자살 사건의 자료에서 본 얼굴과 닮아 있었다.
유연
……만유?
??
……
소년도 순간 움찔한 듯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치 어떤 소리 없는 응답 같았다.
특파팀이 그를 찾아낸 것이다. 고등학생 자살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에 학교에서 갑자기 실종되었던 바로 그 아이를.
유연
……정말 만유구나!
만유
……?
만유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얼굴에는 의아한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기쁜 마음에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심장도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유연
안녕. 사실 전에 너희 학교에서 일어났던 자살 사건을 계속 취재했었어. 나는 유연이라고 해.
유연
그때 너랑 자오양, 톈징은……
고진
관계없는 사람은 취재하거나 질문하지 마세요.
단호한 목소리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고진은 곧장 나와 만유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의 눈빛에는 차갑고도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고진
방금 더는 묻지 말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유연
……
유연
죄송해요, 고 대장님.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쓰여 고진의 어깨너머로 만유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소년은 아까보다 더 깊이 고개를 숙인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방금 내 행동이 너무 갑작스럽고 무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최대한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연
……미안해, 만유. 무서워하지 마.
유연
정말 미안해.
만유
……
내 말을 들은 소년은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만유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만유
분명 나도 걔네랑 같이 있었어야 했는데…… 다 같이 그러기로 약속했는데…… 나만……!!
만유
왜……! 그런데 뛰어내린 뒤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소년의 괴로운 흐느낌에는 짙은 자책과 죄책감이 배어 있었다. 그는 고통스럽게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마치 무엇이든 붙잡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손에 힘을 주었다.
유연
사과하지 마, 만유. 넌 사과할 필요 없어.
나는 극심한 고통에 잠긴 소년의 눈을 바라보며 조금 떨어진 곳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건넸다.
유연
무서워하지 마.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널 도와줄 거야.
유연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고,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내가 널 보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오히려 내가 미안해. 괜찮아.
소년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유
……괜찮은 거예요?
나는 고개를 들어 눈빛으로 고진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다시 죄책감에 잠긴 소년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유연
응, 괜찮아.
그때 곁에 있던 특파팀 대원이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표정은 무뚝뚝하고 위로하는 손길도 서툴렀지만 나름대로 소년을 달래며 함께 자리를 떠나자고 이끌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멀어져 가는 만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그렇다면 만유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행동했던 걸까? 그런데 만유만 살아남았고, 그 과정에서 일부 기억을 잃었다는 뜻인가?
극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기억상실이 생긴 걸까? 아니면…… 누군가 인위적으로 기억을 지워버린 걸까?
그렇게 멀어지는 소년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던 순간, 머릿속에 아주 비슷한 모습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이택언과 내가 시공의 틈에 있었을 때였다.
당시 시공관리국에 구조된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의 희미한 모습이 어쩐지 만유와 닮아 있었다.
설마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만유가 우연히 ‘시공 폭포’를 따라 질서가 무너진 시공간으로 떨어졌던 걸까?
그래서 실종되었던 거라면? 그렇다면 시공관리국 사람들이 그를 연모시로 돌려보내면서 기억을 지웠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만유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에 나 역시 그들에게 이곳으로 돌려보내졌던 일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고진을 바라보았다.
유연
만유는 연모시 거리에서 발견한 거죠?
고진
……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무언가 눈치챈 듯했지만, 아무 말 없이 나를 살펴볼 뿐이었다.
그가 끝내 입을 열지 않자 나는 답답한 마음에 주먹을 꽉 쥐었다.
백기는 분명 만유를 조사한 뒤에도 계속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사건은 선배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과도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더욱 다급하게 고진을 바라보았다.
유연
선배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고진
……
고진
어쩌면 백 대장도 유연 씨가 만유에 관해 더 많은 단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유연
……!
나는 잠시 멍해졌다. 고진 역시 방금 내 반응과 질문만으로 무언가 눈치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마 이 상황을 백기에게도 전해줄 것이다.
유연
고마워요, 고진 씨.
고진
소식 기다려 봐요. 백 대장이 먼저 연락하든지, 급해지면 유연 씨 앞에 직접 들이닥치든지 하겠죠.
유연
……풋.
오랜만에 듣는 고진의 농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백기가 나를 찾을 때 내가 ‘이쪽’에 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고진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유연
그런데 혹시 백기가 저를 찾지 못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나중에 제가 직접 설명할게요.
고진
알겠습니다, 대장님.
유연
그러지 마세요, 고 대장님.
출입문 앞에서 고진은 손을 흔들었다. 마침내 나를 배웅하게 되어 홀가분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특파팀을 떠난 뒤 집으로 돌아와 간단히 짐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했다.
이쪽 세계에서는 특파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세계의 도시는 분명 훨씬 혼란스러웠다. 특파팀도 그곳까지 사람을 보낼 여력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처음 내 앞에 나타나 능력을 사용했던 광경을 떠올리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들은 B.S.에서 단 한 번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이택언을 강제로 초대한 일을 제외하면, 그 뒤로는 내 앞에 다시 나타난 적이 없었다.
유연
……그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게 할 방법은 없을까?
나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능력을 발동했다.
익숙한 이끌림을 따라 몸을 옮기자 순식간에 다른 세계에 도착했다.
나는 경계하며 주위를 살폈다. 집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하지만 휴대폰 화면은 이전보다 더욱 빽빽하고 혼란스러운 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도시는 어수선하고 불안정했다. 곳곳에 불안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유연
대체 어떻게 해야……
바로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드리운 그림자가 가을 햇살을 넓게 가렸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몰아친 차가운 바람이 순식간에 온몸을 휘감았다. 거세게 불어온 바람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바람은 그의 이마 위로 내려앉은 머리카락도 쓸어 올렸다. 그 아래로 날카롭고 예리한 호박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는 한쪽 발로 난간을 딛고 다른 쪽 무릎을 반쯤 굽힌 자세로 서 있었다. 온몸에 먼 길을 달려온 흔적을 묻힌 채, 마치 바람처럼 내 앞에 날아들었다.
백기
지금 시간 있어?
그의 목소리는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 그 안에는 다급함에서 비롯된 듯한 묵직한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그를 바라보니 머릿속이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나는 이미 훨씬 혼란스러운 다른 세계에 와 있었다.
그런데 선배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백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
시간 있어요, 선배.
12-02 단호한 행동(决绝行动)
유연
하지만 나도 선배에게 할 말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강한 힘이 나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변 풍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나는 빛과 그림자로 변했다.
유연
말 좀……!!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내 목소리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러자 허리를 감싼 그의 손에도 한층 안정적이고 단단한 힘이 실렸다.
백기
이따가 말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방금 떠나왔던 특파팀으로 돌아왔다.
백기는 무거운 금속문을 몇 개나 지나 나를 건물 깊숙한 곳으로 데려갔다.
밀폐된 복도에는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숨 막힐 듯한 압박감이 공간 전체를 짓누르고 있어 나는 그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가가자 문 하나가 자동으로 열렸다. 마침내 조금 더 넓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당조와 고진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있었고, 처음 보는 대원들도 각자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모두 무슨 일이든 당장 벌어질 것처럼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백기
상황은 어때?
당조
전과 똑같습니다. 별다른 정보도 얻지 못했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백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백기
길게 말하지 않을게. 사람 한 명의 기억을 확인해 줬으면 해.
백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머릿속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야겠어.
유연
……어떤 기억을 확인하면 되는 거예요?
백기
전부.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한층 무겁게 가라앉았다.
백기
네가 볼 수 있는 건 전부 기억해 둬.
백기
너도 모르는 사람은 아니야. 상당히 위험한 인물이지만, Evol을 완전히 차단하는 특수 수갑을 채워 뒀으니까 통제할 수 있어.
백기
걱정된다면 기억을 확인한 다음, 네가 나타난 이후의 관련 기억을 직접 지워도 돼.
백기
또 궁금한 거 있어?
눈앞의 냉엄한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사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생각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
유연
없어요.
백기
데리고 들어가.
무거운 기계 장치가 잠기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특파팀 대원 한 명을 따라 옆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넉넉한 베이지색 면마 셔츠를 입고 있었고, 양쪽 손목은 의자의 팔걸이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발소리를 들은 그가 고개를 들자 검푸른 눈동자가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기억을 조종하는 Evol을 가진 그 정체불명의 남자였다!
놀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전에 보았던 부드러움도 의미심장한 기색도 없었다. 그 대신 당혹스러움과 혼란만이 가득했다.
순간 묘한 위화감이 밀려왔다. 곁에 있던 특파팀 대원이 다가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자,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유연
당신이 어떻게 여기 있어요?
???
……당신도 저를 아세요?
유연
그건 오히려 제가 물어야 할 말 아닌가요? 처음 저를 찾아온 건 당신이었잖아요.
???
……
그는 더욱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전에 내 앞에 나타났던 모습과는 거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유연
저를 기억하지 못해요?
???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유연
그래요?
나는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Evol을 발동해 조심스럽게 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전에 그의 동료를 상대하면서 기억을 통제하고 봉쇄하는 그의 능력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나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기억의 물가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차갑게 분노하는 백기의 얼굴이었다.
그것이 남자가 가진 모든 기억의 시작점이었다. 백기에게 체포되어 특파팀으로 압송되는 모습이 보였다.
여러 특파팀 대원들이 번갈아 그를 심문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돌아서는 모습도 이어졌다.
그런데 기억 속에 펼쳐진 모든 장면을 살펴보아도, 특파팀에 구금된 뒤의 기억을 제외하면 그의 세계는 정말로 완전한 공백뿐이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기억은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체포되면 누군가 기억을 들여다볼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거대하고 섬뜩한 공백에 둘러싸인 채로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기억의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아주 희미한 빛 한 점이 조용히 떠올랐다. 나는 그 고요한 힘을 따라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바로 다음 순간, 새하얀 세계에 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검푸른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제야 익숙하고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는 텅 빈 공간 한가운데 서서 마치 승리자라도 된 듯 나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
???
안녕. 한발 늦으셨네요.
그가 남긴 것은 그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
나는 멍한 상태로 그의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조심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역시 내게서 무언가 답을 얻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버림받은 상태였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어쩌면 동료들에게까지.
아마 이쪽 세계에서 그들은 자기 자신조차 ‘진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모든 기억과 과거를 그토록 단호하게 지워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단서 하나 남기지 않고.
유연
……대체 당신은 누구예요?
하지만 이제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 질문에 어떤 답도 해줄 수 없었다.
내가 방을 나왔을 때 백기는 이미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감시 카메라를 통해 무언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그는 눈을 가볍게 감았다 떴다.
유연
이 사람은 누군가 기억을 확인하기도 전에 자기 기억을 전부 지워버렸어요.
백기의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스쳤다. 눈빛에도 서늘하고 섬뜩한 냉기가 어렸다.
유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예요?
백기
별거 아니야. 한 방 먹었어.
하지만 그는 곧바로 모든 감정을 거둬들였다. 더는 내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위를 둘러본 뒤 그의 소매를 잡아당겨 복도 구석으로 가자는 뜻을 전했다.
유연
선배, 이리 와요.
잘생긴 눈매가 반사적으로 찌푸려졌다. 그의 시선이 내가 잡아당긴 소맷자락을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백기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인내심을 갖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백기
5분이야.
유연
걱정하지 마요. 선배 시간을 낭비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나는 입술을 살짝 삐죽이다가 발끝을 들어 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유연
확실한 증거를 보여줄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꼭 믿어줬으면 좋겠어요.
나는 정체불명의 사람들 머릿속에서 보았던 단편적인 장면들과 지난 며칠 동안 두 세계를 오갔던 일을 백기에게 모두 설명했다.
유연
이쪽 세계는 그 남자의 Evol로 완전히 복제해 만들어낸 일종의 ‘평행세계’일 가능성이 커요.
유연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쪽에서 여러 가지 일을 꾸며 두 세계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려는 것 같아요.
백기
……?!
백기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미세하게 수축했다.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그의 눈에 가득했다.
그는 한참 동안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굳은 눈빛으로 남자가 구금된 방 쪽을 바라보았다. 눈동자 깊은 곳에 거칠고 날 선 빛이 떠올랐다.
백기
오히려 잘됐네. 안 그래도 그 사람들을 찾고 있었으니까.
백기
지금 연모시에서 벌어지는 혼란은 그 사람들과 무관하지 않아.
유연
그럼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좀 더 자세히……
백기
그럴 필요 없어. 이미 본 적 있어.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장갑을 무심하게 잡아당겼다.
백기
네가 말한 그 ‘세계를 복제한 남자’도 포함해서.
유연
……!
백기
그 사람들도 함께 처리할 거야.
백기
네가 알려준 정보는 아주 중요해. 굳이 나한테 말해주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래도 알려줘서 고마워.
고집스럽고 진지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마음속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왔다.
유연
사실은 나도 선배에게 내 짐을 함께 나눠 달라고 부탁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유연
정말 고맙다고 생각한다면, 다음에는 선배도 나한테 짐을 나눠 줘요.
백기
……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결국 다시 굳게 다물렸다.
유연
그런데 난 선배가 다른 세계에 대해서도 좀 더 물어볼 줄 알았어.
백기
다른 쪽에도 ‘나’가 있다면, 나는 지금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돼.
백기
이 세계가 원래 존재해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해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전부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백기
범죄도 고통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니까.
백기
게다가 그 사람들을 붙잡으면 지금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들도 함께 해결할 수 있을지 몰라.
그에게는 그 정체불명의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결연함이 있었다. 그의 눈에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죄악과 고통이 언제나 선명하게 비쳤다.
그렇기에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희생이라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는 일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다. 그 어떤 고통도 부정하거나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이 서 있는 이 세계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게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잡았다.
유연
나는 선배를 믿어요. 하지만 절대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백기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익숙한 대답이 돌아오자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지금 Evol 에너지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거 알아요. 선배의 능력도 영향을 받고 있을 텐데……
유연
정말 괜찮은 거야?
백기
……
호박색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역시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게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의지를 꺾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 듯, 몸에 쌓인 피로를 모조리 지워버렸다. 그 자리에는 고집스러울 만큼 완강한 의지만이 남았다.
백기
내가 뭘 하고 있는지는 알아.
그가 조용히 내 손을 놓았다.
백기
사람을 보내서 널 데려다주라고 할게.
백기
오늘 고마웠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다시 바람이 되었다. 그는 내 앞을 떠나면서 끝내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특파팀 대원
백 대장님, 이 근처가 만유가 설명했던 장소인 것 같습니다.
특파팀 대원
이 절벽이 만유를 포함한 연모고 학생 다섯 명이 뛰어내렸다는 장소인 것 같습니다.
절벽 가장자리에서 특파팀 대원 한 명이 허공에 손으로 원을 그리며 곁에 선 백기에게 위치를 가리켰다.
특파팀 대원
다만 현장 상황과 진술 사이에 차이가 좀 큽니다. 만유의 기억과 진술 내용을 다시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백기
……
바람이 암벽을 따라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 바람을 따라 시선도 어렴풋이 보이는 절벽 아래로 향했다.
백기는 눈을 내리깔고 깊고 위험한 낭떠러지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한쪽 발을 허공으로 내디뎠다.
백기
아민을 불러.
백기
나머지는 반경 500미터 안의 구역을 샅샅이 수색해.
지시를 마친 백기는 멀리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 울창한 녹음 사이에 거대한 흰색 건물이 서 있었다.
우아하게 휘어진 곡선이 건물의 중심부를 감싸고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두 개의 거대한 원형 고리는 희미한 빛을 반짝이며 서로 맞물려 있는 듯했다.
백기
저 건물은……
특파팀 대원
네? 저 건물은 아주 오래전부터 저기 있지 않았습니까? 어느 공장에서 버린 폐건물 아닐까요?
그의 기억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정보는 모두 흐릿하기만 했다.
백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바람을 밟으며 흰색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리자 그는 무심히 전화를 받았다.
백기
무슨 일이야?
고진
방금 유연 씨가 특파팀에 신고하러 왔어. 누군가 Evol을 이용해서 세계를 복제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고진
일단 몇 명을 보내서 조사하도록 했어. 자세한 내용도 정리해서 보내 놨으니까 언제든 확인해 봐.
고진
내 생각에는 이 일이 최근 연모시에 더 자주 나타나는 ‘시공 구멍’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아.
고진
만유의 상태도 실종됐다가 돌아온 다른 사람들과 상당히 비슷해. 게다가 유연 씨도 그 일에 관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더라고.
백기
……
백기
알겠어. 내가 확인해 볼게.
전화를 끊는 동시에 백기의 발걸음도 흰색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비스듬히 머리 위에 떠 있는 고리들이 희미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마치 시간을 가리키는 시곗바늘처럼, 정해진 궤도를 따라 뜨고 지는 해와 달처럼.
고등학생 자살 사건, 만유의 실종과 그가 들려준 이야기, 시민들의 실종을 일으켰을지도 모르는 ‘시공 구멍’……
백기는 시선을 거두었다. 건물에 출입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손을 뻗어 건물의 가장자리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벌어진 틈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스며들어 깊고 어두운 내부를 비추었다.
그의 눈앞에 위쪽으로 길게 이어진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12-04 기습(突袭)
유연
여기까지만 데려다주셔도 돼요. 여러분도 고생 많으셨잖아요. 단지 안으로는 혼자 걸어갈게요.
유연
고마워요!
다시 집 앞에 도착한 나는 멀어져 가는 특파팀 대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골치가 아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지쳐 있던 백기의 뒷모습이 여전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세계 자체뿐만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도 모두 그 정체불명의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을 찾아내 붙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유연
……그런데 어떻게 찾지……
나는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저으며 단지 안의 작은 길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수풀 속에서 아주 희미한 바스락거림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반대편에서 먼저 누군가의 모습이 불쑥 나타났다. 익숙한 NW 제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대원은 엄숙한 표정으로 내 앞을 막아섰다. 그가 두 주먹을 들어 올리자, 양쪽 주먹에서 뼈로 된 날카로운 칼날이 하나씩 순식간에 뻗어 나왔다.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날렵한 그림자 하나가 수풀에서 뛰쳐나와 곧장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대원은 달려드는 상대를 향해 주먹을 휘둘러 곧장 얼굴을 노렸다. 날카로운 칼날 끝이 상대에게 닿기 직전, 나는 습격자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긴 머리를 단정하게 땋아 늘어뜨리고 있었다. 대원 너머로 나를 향한 시선에는 희미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바로 내가 찾고 있던 그 정체불명의 소녀였다!
소녀가 갑자기 뒤로 뛰어오르면서 긴 땋은 머리와 옷자락이 함께 허공으로 흩날렸다.
착지하는 순간, 소녀는 몸을 낮췄다. 뼈로 된 칼날이 몸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빗나가는 사이, 소녀는 한쪽 다리를 휘둘러 대원이 막 내디딘 발의 발목을 노렸다. 그 바람에 대원의 발걸음이 순간 멈칫했다.
대원의 상체가 앞으로 쏠린 틈을 타, 소녀는 곧바로 한 손으로 땅을 짚고 두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리를 교차시켜 그의 목을 단단히 옭아맸다.
거대한 충돌음과 함께 먼지가 얼굴을 향해 밀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먼지를 피했다.
다시 앞을 바라보았을 때, 대원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잘게 부서진 빛이 소녀의 왼쪽 귀에 달린 작은 은색 귀걸이에 반사되었다. 귀걸이는 그녀가 몸을 일으키는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
안녕?
소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주먹을 꼭 쥐고 몰래 능력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뇌는 이미 검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 남자에게 어떤 처리를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함부로 움직여 상대를 경계하게 만들어서는 안 됐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신중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대화를 이어가며 기억을 읽어낼 시간과 기회를 확보할 생각이었다.
유연
세계를 만들어 낸 네 동료는 어디 있어?
소녀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
보아하니 이미 다른 쪽의 ‘우리’를 만난 모양이네.
유연
맞아. 그러니까 우리도 이야기를 나눌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
유연
서둘러 공격하지는 말고.
나는 그렇게 말로 그녀의 주의를 돌리면서 몰래 Evol을 발동해 기억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소녀는 시간을 끌려는 내 의도를 아랑곳하지 않고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
하지만 모든 일이 아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거든.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내 가슴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 순간, 내 몸속에서 또다시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격류가 사납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힘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거침없이 밀려들었다. 피마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몸의 모든 부분이 불타는 듯 뜨거워졌다.
무수한 장면들이 눈앞에서 번쩍였다. 순간 나는 마치 세계가 인류에 관해 간직한 모든 장면을 비추는 영사기가 된 듯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 광경들은 과다 노출된 영상의 잡음처럼 변해버렸다.
모든 것이 어지럽게 뒤섞이며 흐릿한 빛과 그림자로 번져갔다.
익숙하면서도 거대한 이끌림이 나를 어디론가 다급하게 끌고 가려 했다. 소녀의 눈에는 어딘가 흡족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것은 내게도 기회였다.
나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를 악물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
……!
소녀는 내가 이토록 끈질기게 버틸 줄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영향으로 한층 증폭된 힘을 따라 그대로 그녀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역시 그녀의 뇌도 이미 누군가에게 처리된 상태였다. 온갖 복잡한 장면들이 끊임없이 번쩍였다. 마치 누군가 치밀하게 짜 맞춰 놓은 광경 같아서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도무지 구별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거세게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유연
대체 네 정체가 뭐야!
그녀가 본능적으로 반응한 순간, 기억 속에서 아주 작지만 진실한 빛 하나가 떠올랐다——
새하얀 거대한 건물이 그 안에서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곧 다시 혼란스러운 장면 속으로 사라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서 내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숲속에 있던 그 수상한 건물이다!
역시 그 사람들은 그곳과도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이내 시야 가장자리에서 밀려든 어둠이 기억 속 장면들을 하나씩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몸과 머리도 갈수록 무거워졌다. 뜨겁게 끓어오르던 열기 역시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통제 불능으로 날뛰던 힘이 뒤늦게 몸에서 빠져나가는 듯했다. 나는 어떻게든 소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손가락의 힘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
아무래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부족했나 보네.
???
또 찾아올게.
유연
……!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두려움에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거대한 유리벽이 세워져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NW 제복을 입은 병사 몇 명이 서 있었고,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도 무언가를 분석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샤오위에가 유리벽 너머에서 차가운 눈길로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샤오위에
역시 여기가 더 안전하지?
유연
……
관자놀이에서는 여전히 은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온몸도 쑤시고 아팠다. 몸 구석구석에서 피로가 밀려왔다.
나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사방이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전에 기억 속에서 보았던, 백기가 머물렀던 유리방이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 내가 갇혀 있는 이 방에도 그와 비슷한 기능이 있을지 몰랐다.
나는 잠자코 시선을 돌려 다시 샤오위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연
샤오 지휘관님한테 이렇게 갇혀 있는 것도 별로 안전해 보이진 않는데요.
유연
애초에 지휘관님이 보낸 사람의 실력이 부족해서 제가 습격당한 거 아니에요?
샤오위에
그걸 습격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좀 더 따져봐야지.
샤오위에
적이 일부러 찾아와서 네 능력을 강화해 주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유연
……?
능력을 증폭시켰다고? 역시 그동안 몇 차례나 내 힘이 폭주했던 것은 모두 그 소녀의 Evol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걸까?
내가 의아해하며 입을 다물자 샤오위에는 아예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샤오위에
그러니까 넌 여기 있는 게 좋겠어.
샤오위에
마침 네가 전에 일으킨 골칫거리들도 한번 따져볼 수 있겠군.
유연
저를 미끼로 쓰실 생각이라면, 아무리 바보라도 제 발로 NW 안에 들어오지는 않을 텐데요.
샤오위에
난 적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지능을 과대평가하지도 않아.
샤오위에
누가 알겠어?
유연
당신……!
샤오위에와는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세계를 이동하더라도 높은 확률로 다시 이 유리 실험실 안에 나타날 터였다.
그랬다가는 스스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꼴이 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일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지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쥐어짜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군화가 바닥을 또렷하게 밟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미간을 사납게 찌푸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눈빛 속에서 거센 폭풍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백기
문 열어.
백기는 반론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투로 명령하며 샤오위에를 바라보았다.
샤오위에의 표정이 순식간에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기세등등하게 다가온 백기를 흘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샤오위에
그것도 그렇군. 역시 저 여자는 밖에 있는 편이 낫겠어.
샤오위에가 이렇게 순순히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열린 출입문을 지나 백기의 뒤로 이동하면서도 나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샤오위에를 바라보았다.
유연
샤오 지휘관님, 설마 일부러 쓸모없는 사람들을 제 뒤에 붙여서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겠죠?
샤오위에
걱정 마. NW는 QUEEN 하나를 상대로 일일이 따질 만큼 속 좁은 조직이 아니니까. 어쨌든 이번에도 널 구해준 건 우리잖아.
그는 몸을 돌리더니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시선을 내게 던졌다.
샤오위에
그리고 쓸모 있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NW를 나온 뒤, 백기는 먼저 내 상태를 빠르게 확인했다. 그제야 다시 질문을 던졌다.
백기
그 애가 네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설명해 봐.
유연
……아, 그때 특파팀 대원분들한테 단지 입구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거든요.
유연
집까지 몇 걸음밖에 안 남았으니까 더는 번거롭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유연
그런데 단지 안에서 갑자기 그 애가 나타난 거예요……
내가 그 소녀가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설명하자 백기의 미간이 또다시 깊게 찌푸려졌다.
백기
다른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서. 그럼 그쪽으로 돌아가면 안 되는 거야?
유연
그렇지만 샤오위에가 한 말대로라면, 그 애는 일부러 내 능력을 증폭시키러 찾아온 거잖아.
유연
그렇다는 건 내가 그 사람들이 이루려는 목적과 분명 어떤 관련이 있다는 뜻이야.
유연
게다가 이미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으니까, 그 애를 따라가다 보면 세계를 복제한 그 남자도 찾아낼 수 있을지 몰라.
백기
그럼 이번처럼 또 널 의식 잃게 만들면 어떡할 건데?
유연
……
유연
정 안 되면 일단 ‘물고기’를 낚아 올린 다음, 그때 다른 세계로 넘어가 버리면 되지 않을까?
백기
……
이번에는 백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내 말이 옳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연
그런데 그 애가 내 앞에 나타났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설마 샤오위에가 그런 것도 선배한테 알려줘?
백기
그 애의 Evol 파장과 지금 연모시 전체를 뒤덮고 있는 비정상적인 Evol 파장이 완전히 일치해.
백기
그 애가 Evol을 사용하기만 하면 장비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어.
백기
다만 위치가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어. 아마 공간계 Evol을 가진 누군가가 그 사람들의 이동을 돕고 있는 것 같아.
백기
……
무언가 골치 아픈 일이 떠오른 듯 그의 온몸에서 짜증스러운 기운이 묻어났다.
백기
……됐어.
유연
……응?
백기
일단 집에 데려다줄게.
내가 망설일 틈도 주지 않고 백기는 나를 품에 안았다. 곧바로 바람을 밟으며 집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나를 베란다에 내려놓자마자 다시 바람처럼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게 된 그를 바라보며 나는 바람 속에 홀로 남아 어리둥절해했다.
유연
……아니, 설명은 좀 해주고 가야지!
백기
임무는 맡겠습니다.
백기는 굳은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는 컴퓨터에서 몇 개의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빽빽하게 암호화된 보고서가 떠올랐다.
백기
하지만 이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건 부장님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류 부장
그냥 명령이라고 생각하면 되네. 사령관이나 부사령관이라도 명령을 수행해야 할 때는 있는 법이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차근차근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오히려 백기의 냉소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백기
부장님은 지금 상황을 모르시는 겁니까?
백기
제가 보기에는 저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는 것부터가 그 사람들의 명령인 것 같은데요.
류 부장
어떤 일은 너무 명확하게 들여다보는 게 반드시 좋은 건 아니야.
류 부장
때로는 좀 더 멀리 내다봐야 자네에게도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법이지.
백기
그렇다고 눈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이 멀어서는 안 되겠죠.
류 부장
생각해 본 적 없나? 정말 문제가 있는 상황이라면 NW에서도 이렇게 순순히 협조하지는 않았을 거야.
백기
NW는 자기들 문제조차 아직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사냥꾼 게임 쪽 상황도 모르시는 겁니까?
백기
게다가 그 사람의 Evol은 ‘증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NW가 관심을 보이지 않을 리 없죠. 어느 쪽으로든 그들에게 손해 볼 일은 없으니까요.
전화기 너머에서 체념한 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백기는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직 내부에서 그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런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은, 관련 세력이 이미 내부에 침투해 있다는 뜻일 터였다.
백기의 눈빛에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 안에는 피를 갈구하는 듯한 살기마저 희미하게 어려 있었다.
잠시 뒤, 그는 특파팀 내부 통신 버튼을 눌렀다.
12-05 검은 그림자(黑色影子)
솔직히 방금 전 습격을 겪고 나니 NW 사람들이 그 소녀와 다시 맞닥뜨렸을 때 정말 나를 지켜줄 수 있을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백기가 해결해야 할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언제까지나 그의 곁에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Joker가 언제 갑자기 찾아올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 있었다.
애초에 그 소녀는 정말 약속한 대로 다시 나를 찾아올까? 아니면 그 말도 그저 나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속임수였을까?
능력이 폭주했을 때 잠깐 스쳐 지나갔던 수상한 건물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난번에는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곳에 한 번 더 가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유연
……
너무 많은 의문이 머릿속에 한꺼번에 몰려들자 피로감이 더욱 짙게 밀려왔다.
어디를 가도 안전할 것 같지 않았다. 연이어 벌어진 사건들과 내가 내린 선택들 때문에 주변 상황은 엉망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이미 많은 일의 실마리를 손에 쥐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떻게든 상황의 주도권을 더 많이 되찾아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우선 불안한 마음으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계속 긴장한 탓에 몸을 완전히 이완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불편한 상태에 어느 정도 적응할 수는 있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자 햇살이 비스듬히 창턱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오후의 햇빛은 아직 따스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마취총을 꺼냈다.
집 안은 너무 비좁았다. 움직이기에는 좀 더 넓은 장소가 나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단지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길목마다 있는 모퉁이와 몸을 숨길 만한 장소들을 기억해 두었다.
막 모퉁이 하나를 돌아섰을 때였다. 얼굴에 살이 두툼하게 붙은 남자가 갑자기 좁은 길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섰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과 내 얼굴을 번갈아 훑어보던 그의 시선이 멈췄다. 메마른 입꼬리가 조금씩 벌어졌다.
남자
찾았다.
남자는 음산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발치에 있던 모래와 흙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모래는 빠르게 한곳으로 모여들더니 커다란 칼 한 자루로 뭉쳐졌다.
그가 팔을 움직이자 옷깃이 한쪽으로 비뚤어졌다. 그 아래로 목에 채워진 금속빛 목걸이가 드러났다——
사냥꾼 게임 참가자였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유연
……여긴 게임 구역도 아니잖아요. 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
돌아온 대답은 한층 광기 어린 웃음뿐이었다. 그가 손을 치켜들자 모래로 만들어진 칼이 허공에 떠올랐다. 칼날에서는 고운 모래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거의 동시에 나는 능력을 발동했다. 언제든 이쪽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미친 사람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 법이니까.
그런데 그 ‘칼’이 내 머리를 향해 내리꽂히려는 순간이었다.
머리 위로 날카로운 ‘칼날’ 하나가 갑자기 가로질러 지나갔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모래 칼이 한가운데서 두 동강 나더니 순식간에 무수한 모래알로 흩어졌다. 모래가 얼굴을 향해 쏟아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무언가가 모래를 순식간에 양옆으로 밀어냈다. 곧이어 검은 그림자 하나가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눈부신 햇살이 그의 NW 제복을 환하게 비추었다. 남자가 다시 손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대원은 이미 그의 손목을 붙잡은 뒤였다.
대원은 남자의 팔을 비틀며 몸을 반 바퀴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그를 거칠게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남자가 발버둥 치자 대원은 가차 없이 발을 들어 내리눌렀다. 등 뒤로 비틀린 남자의 팔이 발밑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유연
……
역시 NW의 대응은 빨랐다. 사냥꾼 게임 참가자 정도를 상대하는 데에는 실력이 차고도 남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대원은 어딘가 수상했다. 검은 그림자는 내게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얼굴에는 유난히 특이한 맞춤형 가면까지 쓰고 있었다.
게다가……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뒷모습에는 어딘가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있었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NW 대원은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데려가 처리하려는 듯했다.
유연
……잠깐만요! 잠시만요!
나는 서둘러 그 참가자 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능력을 발동해 그의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전자음
딩동.
멀리서 들려오는 익숙한 전자음이 갑작스럽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 하나만으로도 잔혹하고 냉혹했던 그 게임 속으로 순식간에 돌아간 듯했다.
전자음
지금부터 특별 임무가 시작됩니다.
전자음
이번에 선정된 대상은 Q번 히든 사냥꾼입니다. 해당 참가자가 Evol 능력을 사용하도록 유도한 모든 플레이어에게는 10배의 점수가 지급됩니다.
경쾌한 안내음과 함께 내 사진이 전자 화면에 선명하면서도 차갑게 떠올랐다.
전자음
히든 사냥꾼의 위치는 각 플레이어가 직접 찾아야 합니다.
전자음
단, 특별히 주의하실 사항이 있습니다. 해당 참가자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는 행위는 금지됩니다. 시스템은 실시간 상황에 따라 점수를 정산합니다.
전자음
본 임무에는 시간제한이 없습니다. 플레이어 여러분은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
하하하하하! 내 점수가…… 올랐어!
남자는 얼굴이 짓눌린 채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그런데도 뜨겁게 달아오른 시선만큼은 내 얼굴에 집요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빛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유연
……
전부 미쳐버렸어.
Joker, 그 미친놈은 또 이 참가자들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검증하려는 거야?!
분노로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마음속으로 Joker를 저주하는 한편, 엄청난 안도감과 뒤늦은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다행히도 이전에 상황을 잘못 판단했던 덕분에, 내가 Joker를 도발한 곳은 바로 이 세계였다.
나는 참가자의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곁에 있던 NW 병사가 그를 처리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햇살이 몸 위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빛은 무겁기만 할 뿐, 조금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NW 병사 한 명으로 정말 충분할까?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가능한 한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며 곁에 서 있는 말없는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생각에 결국 그에게 다가갔다.
유연
저기…… 병사님.
유연
요즘 제 주변 상황이 좀 복잡해요. 아마 앞으로 온갖 사람들이 저를 찾아와서 괴롭힐 거예요.
유연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NW 병사
……
어째서인지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유연
정말이에요. 전에 저를 지키던 대원분도 다치셨거든요. 샤오 지휘관님이 병사님께 정말 힘든 임무를 맡기신 게 분명해요.
유연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그렇다고 저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요.
유연
그러니까…… 지원 인력을 몇 명 더 요청해 보는 게 어떨까요?
이상하게도 내 말이 끝나자 그 병사를 둘러싼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며 어두운 곳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런데 그 묘한 느낌이 다시 밀려왔다. 나는 무심코 그를 붙잡으려 했다.
유연
저기, 잠깐만……
순간 병사는 날렵하게 내 손길을 피했다. 덕분에 미처 말을 끝맺지도 못했다.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검은 가면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눈부신 빛이 가면 위로 쏟아져 그 안의 표정을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면 밖으로 내려온 갈색 머리카락과 익숙한 머리 모양은 말없이 무언가를 알려주는 듯했다.
유연
……선……?
아니야, 아니야. 백기는 그렇게 바쁜데 NW 병사로 변장해서 여기에 나타날 리가 없잖아.
게다가 가면 하나 썼다고 내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사람도 아니고……
설마 이 NW 병사는 변장하는 능력이 있어서 일부러 백기처럼 꾸민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유연
혹시 백기가 롤모델이에요?
NW 병사
……
돌아온 대답은 차가운 권총 한 자루였다. 그는 권총을 내 머리에 갖다 대더니 일부러 툭툭 두드렸다——
명백한 경고였다.
유연
……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가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병사는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상해.
NW 병사라면 보통 나한테 저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을 텐데.
나는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방금 본 그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그의 체형과 백기의 모습을 몇 번이고 비교해 보았다.
하지만 정체가 누구든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저 사람은 굉장히 강했다.
잠시 생각한 끝에 나는 단지를 빠져나와 거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큰길로는 가지 않았다. 오히려 습격당하기 좋거나 누군가 행동을 취하기 쉬운 좁은 길들을 골라 들어갔다.
다음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주차된 차 뒤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 사람이 내 옷깃에 손을 대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상대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비틀어 전봇대에 세차게 내리꽂았다.
상대는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골목은 다시 고요해졌다.
나는 계속 앞으로 걸었다. 등 뒤에서, 혹은 모퉁이 너머에서 발소리가 몇 번이고 가까워졌다. 하지만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그 소리는 뚝 끊겼다.
그는 Evol을 사용할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달려드는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도착하기도 전에 가로막혔고, 모든 소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울퉁불퉁한 길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에 가끔 그의 모습이 비쳤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보면 등 뒤의 골목에는 서쪽으로 기우는 석양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다섯 번째 사람이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병사는 몸을 비틀어 칼날을 피하더니 상대의 복부에 주먹을 내질렀다. 남자는 몸을 웅크리며 무릎을 꿇었다. 손에서 떨어진 단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혔다.
나는 그를 지나 골목 입구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잇따라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중에 내가 기다리던 소녀는 없었다.
유연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요. 정말 죄송해요.
NW 병사
……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강한 힘이 내 뒷덜미를 붙잡았다.
옷깃이 거칠게 잡아당겨지면서 발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NW 병사
……
NW 병사
집에 좀 가면 안 돼?
유연
……
낯설고 조금 거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익숙한 짜증과 따지는 듯한 말투도 동시에 나를 향해 밀려왔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너무 놀라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세상에. 정말 선배였어?!
12-06 그림자 호위(影卫)
나는 눈을 깜박이며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을 가린 가면을 바라보니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분명 그렇게 바쁜데 어째서 여기까지 온 걸까? 게다가 왜 NW 병사로 변장한 거지?
내가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가면을 쓴 걸까? 아니면 이 가면에는 다른 기능이 있는 걸까?
선배도 그 사람이 남긴 메시지를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를 걱정해서?
너무 많은 의문이 마음속에 밀려들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앞의 ‘NW 병사’는 여전히 무심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내게 거절할 선택권을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마 내가 이미 정체를 알아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자신의 변장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그가 물었던 말에만 대답하기로 했다.
유연
……그냥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면 그 소녀가 나타날지도 모르잖아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붙잡은 손에서도 힘을 풀지 않았다.
그의 태도를 알아차린 나는 시선을 내렸다. 고개까지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유연
……게다가 지금은 이런저런 일이 너무 많잖아요.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고요.
상대가 백기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순간 서러움과 무력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는 어떻게든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더 많고 복잡한 일들이 끊임없이 밀려와 숨통을 죄는 것 같았다.
"NW 병사"
집에 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마치 맹세처럼 단호했다.
"NW 병사"
거기만큼은 내가 안전하게 만들 테니까.
유연
……
눈가가 저절로 뜨거워지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바람이 가볍게 일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마치 단단하고 안전한 장벽처럼 나를 감싸주었다.
그런데 나는 이 모든 위험을 감당해 주는 사람이 하필 백기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
그래서 나는——
선택지 1. 그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유연
알았어요. 지금 바로 집에 갈게요.
그가 내가 정체를 알아채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으므로, 나 역시 굳이 모른 척하는 연기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내가 가능한 한 행동 범위를 줄인다면 그가 짊어져야 할 피로와 번거로움도 조금은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잠시 생각한 끝에 나는 다시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그런데 내가 말을 듣기로 한 건 ‘당신’을 믿기 때문이에요. NW를 믿어서가 아니라.
"NW 병사"
……
가면 뒤에 숨겨진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린 것 같았다. 그러더니 어쩐지 조금 못마땅해하는 기색까지 느껴졌다.
"NW 병사"
나를 만난 지 두 시간도 안 됐잖아.
유연
그건 우리가 특별히 잘 통하는 사이여서 그런가 보죠.
*
그래서 나는——
선택지 2.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무언가 말하려 한다.
유연
저……
"NW 병사"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하고 싶었던 말들은 그의 단호한 한마디에 모조리 가로막혔다.
그는 차갑게 그 말만 남기고 손을 놓더니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더는 내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고 그의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앞으로도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할 기회는 있을 테니까.
*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백기가 어딘가에 숨어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소파에 앉았다. 세상은 잠시 고요해졌다. 거실에서는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하늘 끝에 걸린 해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도시 위로 펼쳐진 하늘 가장자리가 주황빛이 감도는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나도 조금씩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제야 졸음이 서서히 밀려왔다.
하지만 백기는 아마 지금도 나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지쳐 있던 그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자 나 혼자만 쉬고 싶지 않아졌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메모지 한 장을 꺼냈다——
유연
"피곤하다면 사실 몰래 소파 옆에 앉아서 잠깐 쉬어도 괜찮아요."
유연
……
유연
"수고 많았어요."
글을 다 쓴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무릎 위에 두 팔을 포개어 올리고, 그 위에 머리를 묻은 채 눈을 감았다.
계속 긴장한 상태로 있다가는 체력이 바닥나 오히려 백기에게 짐이 될 것이다.
게다가 내가 이렇게 경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상대도 일부러 함정에 걸려들지는 않을 테니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 혼자 편히 쉬어도 된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유연
……
나는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휴대폰에서 번호 하나를 눌렀다. 다시 몸을 웅크리고 앉아 휴대폰을 머리와 팔 사이에 끼웠다.
"뚜……"
"뚜……"
"뚜……"
길고 규칙적인 통화 연결음이 마치 또 다른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한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나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뚜……"
아마 상대방 역시 나만큼이나 끈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통화 연결이 끊어지려는 순간, 결국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양보한 듯했다.
백기
……크흠. 무슨 일이야?
그는 조용히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방 안에서는 작은 움직임조차 들리지 않았다.
유연
별일은 아니고. 그냥 선배가 바쁜지, 많이 피곤하지는 않은지 궁금해서?
유연
아까는 나를 베란다에 내려놓자마자 가버렸잖아요.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럴 틈도 없었고.
유연
그래서 생각했어요. 내가 전화했을 때 선배가 받아줄 수 있다면, 그동안 잠깐이라도 몰래 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백기
……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얕고 고른 숨소리만이 이어졌다.
백기
다른 일 없으면 끊을게.
유연
에이, 그러지 마요. 이미 받았잖아. 그럼 시간은 조금 있다는 뜻이잖아요.
유연
나도 요즘 일이 정말 많아요. 나를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사냥꾼 게임 참가자들까지 찾아오거든요.
유연
그런데 선배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그날 밤에 갔던 국숫집으로 돌아간 것 같아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 시간처럼 멀리 보이던 해도 어느새 짙푸른 하늘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도시의 가장자리에 희미한 주황빛만 남아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소박하면서도 진한 국수 향기가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소년이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긴장이 풀린, 부드러운 얼굴이었을 것이다.
유연
나랑 조금만 이야기해 줄래요?
백기
……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지는 않았다. 그저 나와 함께 같은 짙푸른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다.
백기
지금 하고 있는 임무는 그렇게 힘들지 않아.
문득 백기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백기
굳이 따지자면 최근 맡았던 임무 중에서 가장 편한 편이야.
유연
정말…… 그렇게 편해?
백기
임무와 관련된 사람이 조금 지나치게 ‘활발하다’는 것만 빼면.
그의 목소리에는 모처럼 여유가 묻어났다. 아마 웃고 있지는 않겠지만, 늘 단단하게 찌푸려져 있던 미간도 조금은 풀렸을지 몰랐다.
어쩌면 지금 어딘가의 벽에 기대어 편안히 고개를 젖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얼굴을 상상하다가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유연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럼 지금 틈틈이 쉬어둬야겠네.
유연
언제 또 갑자기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잖아.
백기
그건 그 애가 얼마나 얌전히 구느냐에 달렸지.
유연
백 경관님, 말투가 참 다정하시네요. 듣고 있으니까 괜히 좀 서운해지는데요?
백기
……
내가 일부러 투정을 부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난처해진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
서운해할 필요 없어.
유연
알았어요. 그럼 선배 말 들을게.
백기
그렇게 쉽게?
유연
응, 그렇게 쉽게.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이 내 입가에도 함께 번지는 것 같았다.
유연
선배, 이 일이 다 끝나면 우리 그 국숫집에 다시 가서 국수 먹자.
도시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에게 모든 일을 잊으라고 말할 수도, 이 모든 소란과 분쟁에서 벗어나 함께 도망치자고 할 수도 없었다.
그 모든 일은 실제로 존재하고,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백기 역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백기이기에, 이 모든 일에 깊이 뛰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유연
난 그날이 그렇게 멀지 않았다고 생각해.
그는 약속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백기
너 지금 많이 졸리잖아. 이제 자.
유연
응? 목소리만 들어도 그렇게 티가 나?
나는 더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고개를 한층 깊이 파묻었다.
유연
그런데 자고 싶지 않아.
백기
자기 싫은 거야, 아니면 무서워서 못 자는 거야?
유연
무서운 건 아니야. 아, 그러고 보니 샤오 지휘관님이 엄청 강해 보이는 NW 병사를 한 명 보내주셨어.
유연
그런데 그 사람은 근무 중이잖아. 나 혼자 쉬기도 미안해서 그 사람도 좀 쉬었으면 좋겠어.
백기
전에도 그랬어?
이번에는 내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헤헤 웃었을 뿐이었다.
유연
선배, 혹시 조금이라도 기분 나빠?
백기
아니.
그는 무언가를 일부러 부정하려는 것처럼 지나치게 단호하게 대답했다.
유연
알았어. 그래도 선배도 기분 나빠할 필요 없어.
유연
내 생각엔 그 사람보다 선배가 더 강하거든.
백기
……
백기
그 사람은 신경 쓰지 마.
유연
정말?
백기
그 사람은 임무 중에 어떻게 몰래 쉬어야 하는지 알고 있어.
나는 또다시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마음이 놓인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유연
선배, 나 사실 조금 피곤해.
백기
자.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단호했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 안에서 희미한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유연
그럼 전화 끊지 말아 줘……
익숙하면서도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를 들으며 마침내 온몸에 피로가 밀려왔다.
유연
선배도 꼭 쉬어야 해……
나지막한 속삭임은 점차 고르고 안정적인 숨소리로 바뀌었다.
그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다가와 소파에 웅크린 그녀의 몸 위로 드리워졌다.
잠자리가 그리 편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손을 뻗을 수 없었다——
NW 병사라면 이런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을 테니까.
그의 시선이 문득 탁자 위에 놓인 메모지로 향했다.
그 안에 적힌 글을 읽자 마음속에서 묘하게 못마땅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대체 뭐가 그렇게 신경 쓰인다는 거지.
그녀는 원래 많은 사람을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낯선 사람이라도 그녀의 다정한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이곳에서 쓸데없는 생각을 품을 입장도 아니었고, 그럴 자격도 없었다.
백기
……
짜증 나.
익숙한 자기혐오가 머릿속을 뒤덮었다. 마치 무언가가 손발을 옭아매는 듯했다.
백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결국 다시 메모지에 적힌 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건 분명 자신에게 쓴 말이 아닌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이유를 찾아낸 것처럼, 머리로 판단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쪼그려 앉아 옆에 놓인 펜을 집어 들고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세상은 더없이 고요했다. 창밖의 바람은 저녁 퇴근길을 붉게 물들인 풍경과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를 조용히 실어 왔다.
점점 밀려오는 졸음에 시선마저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그의 눈길이 옆에서 웅크리고 있는 작은 모습으로 옮겨갔다.
자신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됐다. 적들이 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바보처럼 제 발로 총구 앞으로 뛰어들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장비의 제어로 인해 느껴지는 팽창하는 듯한 압박감과 통증이 더욱 선명하게 신경 말단 하나하나로 번져갔다.
그는 이미 이 힘이 몸에 가하는 부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평온함 속에서 무언가가 함께 깨어난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차가우면서도 뜨거웠다. 혈액이 빠르게 온몸을 내달리는 듯했다.
그런데도 그는 가면을 벗지 않았다. 그는 느릿하게 소파 팔걸이 바깥쪽 그늘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등 뒤, 조금 위쪽에서는 고르고 부드러운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숨결이 그의 피로까지 조용히 달래주는 것 같았다.
그는 주위를 경계하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느새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방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메모지 위에는 어느새 몇 글자가 더 적혀 있었다.
마치 자습 시간에 몰래 주고받던 쪽지 같았다. 반듯한 글씨는 딱딱할 정도로 가지런했다.
누군가 자신의 필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한 획 한 획 정성스럽게 쓴 것 같았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12-07 영혼이 표류하다 (灵魂搁浅)
떠도는 영혼은 어디에서 안식처를 찾을 수 있을까?
*구도심 (旧城区)
다시 제자리로
-오늘날의 사회에서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아내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 나 며칠 뒤에 사직서 내려고 해.
남편
멀쩡히 잘 다니다가 갑자기 왜 그만둔다는 거야? 또 무슨 바람이 든 건데?
아내
당신은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어떻게 첫마디부터 내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할 수 있어?
남편
무슨 일이 있었든 상관없어. 난 찬성 못 해. 당신이 퇴사하는 것도 동의할 수 없고.
남편
지금 경기도 나쁘고, 민간 기업들은 여기저기서 사람을 자르고 있어. 취업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고.
남편
내 월급 하나로는 우리 집 대출금이랑 차 할부금까지 감당할 수 없어.
남편
당신 자신은 생각하지 않더라도 애는 생각해야 할 거 아니야?
남편
부모가 자기 인생 하나 제대로 꾸려 나가지 못하면 애가 어떻게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겠어?
아내
나 너무 지쳐.
아내
일 때문에 몸도 마음도 정말 지쳤어. 가끔은 내가 사람답게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남편
요즘 세상에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남편
나도 지쳐. 나도 그 빌어먹을 상사들이랑 동료들 때문에 못 견디겠다고. 하지만 이게 우리 현실이잖아.
남편
먹고살려면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일도 많은 거야. 그게 당연한 거고.
아내
……그게 정말 당연한 걸까?
남편
일단 퇴사 얘기는 그만하자. 당신도 좀 더 진정하고 생각해 봐.
남편
정 힘들면 이틀 정도 휴가를 내든가. 그러면 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거야.
*습광 골목 (拾光巷)
하룻밤 만에 Evol 각성
-제발 부탁드립니다, 신이시여.
나도 Evolver였으면 좋겠어요. 왜 연모시에 그렇게 많은 Evolver가 있는데 그중에 나는 없는 걸까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요? 왜 우리 부모님은 Evolver가 아닐까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Evolver가 아닌 걸까요? 왜 우리 집안은 대대로 평범한 사람들뿐인 걸까요?
대체 왜요? 이 세상에 정말 신이 있다면, 고차원적인 존재가 있다면, 제발 저를 봐 주세요.
제 고통을 들어 주세요. 저 좀 구해 주세요. 하룻밤 자고 일어났을 때 기적이 일어나게 해 주세요.
제가 하루아침에 Evolver가 되어서 앞으로는 풍족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고민을 하며 살게 해 주세요.
‘Evolver로 사는 것도 참 힘드네. 내 능력을 어디에 써야 할지도 모르겠어.’
‘내 Evol로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사람들의 존중과 인정, 그리고 부뿐이야.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하아, 내 Evol은 아직도 약해. 기껏해야 먹고사는 걱정이나 안 하게 해 줄 뿐이잖아. 나도 평생 서로만을 사랑하는 그런 연애를 하고 싶은데.’
하늘이시여, 우주여.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끝없이 고통받고 고민해야만 한다면, 제가 겪을 고통과 고민은 부디 이런 것들이었으면 좋겠어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하룻밤 만에 Evol 능력이 생기게 해 주세요.
*나의 집 (我的家)
어둠 속의 그
-바람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형체 없이, 소리 없이. 언제 어디서나.
유연
저기…… 안녕하세요. 거기 계세요?
"NW 병사"
……
유연
저기요, 안녕하세요?
"NW 병사"
……
유연
여보세요——
"NW 병사"
말해.
유연
아, 계셨구나! 어디 계세요?
"NW 병사"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유연
그게요. 근처 마트에 가서 먹을 거랑 생활용품을 좀 사 두려고요.
유연
그러면 당분간 밖에 나갈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NW 병사"
뭐가 필요한데? 내가 사 올게.
유연
살 게 좀 많아서요. 같이 가는 편이 더 편하고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유연
물론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시면 인터넷으로 주문해도 괜찮아요.
"NW 병사"
……
"NW 병사"
그럴 필요 없어. 나가자.
"NW 병사"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유연
고마워요.
유연
이따가 밥도 좀 넉넉하게 남겨 둘게요. 혹시 한밤중에 ‘근무’하시다가 배고프시면 직접 데워 드세요.
"NW 병사"
……
"NW 병사"
쓸데없는 짓 하지 마.
12-08 대화하며 나아가다 (对话与前行)
나는 집 근처 마트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잔뜩 사 왔다.
먹을거리를 충분히 마련한 뒤로는 며칠 동안 단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더는 백기에게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그의 부담을 덜어 주고 싶었다.
그의 말대로 우리 집은 정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된 듯했다. 아무런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 찾아왔다가 소리 소문 없이 제압당하고 체포된 적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쩌면 지난 며칠은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던, 내게는 더없이 귀한 평온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뉴스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소식이 올라왔다. 어디에서는 소규모 충돌이 일어났고, 어디에서는 시위와 집회가 열렸다는 이야기들이었다.
휴대폰을 끄고 창문을 닫아 버리면 세상과 단절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했고, 수많은 사람의 삶을 바꾸고 있었다.
집 안은 유난히 고요했지만, 나는 어둠 속 어딘가에서 전해지는 초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유야 무엇이든 그는 이곳에 발이 묶여 있었다.
해야 할 일을 하러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를 이곳에 혼자 남겨 둘 수도 없었다.
밤이 되자 두꺼운 눈처럼 겹겹이 쌓인 구름이 도시 위를 뒤덮으며 하늘의 절반 이상을 가렸다.
나는 발코니에 앉아 멀리 펼쳐진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는 줄곧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길고도 깊은 침묵이 담긴 시선이었다.
나는 우리 둘 다 이렇게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에게 이곳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고 싶었지만, 아마 못 들은 척하거나 거절할 게 뻔했다.
밤바람이 느릿하게 불어왔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한쪽 발을 들어 발코니 난간에 걸쳤다.
"NW 병사"
또 뭘 하려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바로 다음 순간 검은 그림자가 등 뒤에 나타났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유연
잠깐 나와서 저랑 이야기 좀 해 주셨으면 해서요.
유연
그냥 부르면 대답도 안 해 주실 것 같았거든요.
"NW 병사"
……
밤이 깊어 그의 얼굴은 여전히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지금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것 같았다.
"NW 병사"
넌 며칠도 가만히 못 있는 거야?
유연
지금도 충분히 얌전한데요?
"NW 병사"
일단 그 다리부터 내려놓고 헛소리해.
유연
그럼 저랑 이야기해 주실 거예요?
"NW 병사"
……
그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했다. 가슴이 미세하게 들썩이는 걸 보니 크게 숨을 들이마신 모양이었다.
결국 그는 나와 적당히 거리를 둔 빈자리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였다.
나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와 함께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이런저런 화제를 찾았지만, 곁에 앉은 사람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유연
……저기, 제 친구 중에도 그쪽처럼 멋있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 있어요.
유연
뭐든 혼자 해결하려고 해서 늘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죠.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안 하고, 힘들어도 힘들다고 하지 않아요.
유연
어떻게 해야…… 제가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요?
검은 그림자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유연
저는 정말 그 사람을 돕고 싶거든요!
"NW 병사"
신경 쓰지 마.
순간 짧은 대답이 밤바람에 실려 귓가에 닿았다. 너무 빨라서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유연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이 신경 쓰이는걸요.
유연
가끔은 그 사람이 사실 저를 믿지 않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유연
저는 싸움도 잘 못하고, Evol도 언제나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제가 자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유연
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저는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을 때가 있어요……
유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 마음이 그 사람에게 부담이 될까요? 그쪽이라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시선은 그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는 아예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뒤통수만 보여 주더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NW 병사"
내가 어떻게 알아.
부담스러우냐고? 그는 알지 못했다.
그녀를 영원히 지켜 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자신이라면 그저 그녀를 안전하게 지킬 유일한 방법이 위험한 일에서 최대한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것이 그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자, 그녀의 선의에 보답할 방법으로 떠올릴 수 있는 전부였다.
그저 네가 안전하기를 바랄 뿐인데, 내가 하는 일은 왜 번번이 너를 슬픈 얼굴로 만드는 걸까?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데, 나는 왜 자꾸 마음이 쓰이는 걸까?
그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답답하고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애초에 이 모든 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가 말하는 친구가 누군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런데 듣다 보니, 혹시 자신을 말하는 건 아닐까?
어째서인지 한심하게도 왼쪽 가슴의 심장이 조금 빨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심장을 움켜쥔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았어야 했다. 어차피 그녀가 정말 떨어지더라도 건져 올리면 그만이었을 텐데.
유연
그쪽도 모르시는구나……
등 뒤에서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시 실망과 고민이 묻어났다.
유연
그럼 혹시 백기 대장님을 아세요? 그분이라면 알까요?
"NW 병사"
……!
그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러지 않았다면 목구멍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NW 병사"
크흠. 그 친구라는 사람이 백기야?
"NW 병사"
들어 본 적은 있는데, 친하지는 않아.
유연
그렇구나. 그럼 다음에 직접 물어봐야겠네요.
그는 여전히 고개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면은 거의 불투명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무언가를 알아챌 것만 같았다——
유연
그런데 저 내일은 밖에 나가려고요.
바로 다음 순간, 줄곧 등을 돌리고 있던 그가 홱 고개를 돌렸다. 아마 나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유연
일단 노려보지 말고 들어 보세요. 더는 이렇게 손 놓고 기다릴 수 없겠더라고요.
유연
계속 기다리기만 해서는 주도권을 잡을 수 없어요.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해요!
나는 진지한 얼굴로 주먹을 들어 허공에 몇 번 흔들었다.
유연
그 소녀가 저를 습격했을 때, 그 애의 기억을 들여다봤거든요.
유연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수상한 건물 하나를 봤어요.
유연
그 건물이 그들과 관련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하지만 아무리 작은 단서라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요.
"NW 병사"
날 불러낸 진짜 이유가 이거였군. 나한테 통보하려고?
나는 입꼬리를 활짝 올리고 즐겁게 고개를 까딱였다.
유연
거절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어요.
*
다음 날, 나는 나무 사이를 지나 다시 그 수상한 건물 근처로 찾아갔다.
그런데 익숙한 불쾌감이 밀려왔다. 머리가 은근히 욱신거리기 시작했고, 몸 안에서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부풀어 오르는 압박감 속으로 나를 짓누르려 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건물을 살펴보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싶을 만큼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흥분이 치밀어 올랐다.
이전에 품었던 의문 중 하나의 답을 찾아낸 것만 같았다.
"NW 병사"
꼭 들어가야겠어?
검은 그림자도 내 상태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가 옆으로 다가와 의심스러운 기색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유연
네.
유연
"NW 병사"가 제가 어디에 가는지까지 간섭할 수는 없잖아요. 우리 사이가 조금 좋아졌다고 해도 절 막을 권리는 없어요.
몇 번쯤 더 실랑이를 벌여야 할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그가 의외로 선선히 물러났다.
내 대답을 듣고 차갑게 흘겨보기만 하더니, 군화를 울리며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유연
잠깐만요. 그 건물은 문이 없는 것 같은……
‘문’이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는 이미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나뭇잎들이 거세게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의 부름에 응하듯 바람이 손끝으로 모여들더니,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되었다——
그가 손을 움직여 허공에 사각형을 그리자, 건물 벽면에도 그와 똑같은 모양의 절단선이 순식간에 새겨졌다.
동시에 용이 포효하는 듯한 거친 바람이 벽을 향해 몰아쳤다. 마침내 건물에는 강제로 뚫린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유연
……
그는 부서진 돌무더기를 밟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NW 병사"
뭐가 없다고?
유연
……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민망한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유연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생겼네요.
나는 전에 이곳에서 보았던 환영을 떠올리고 장난스러운 마음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NW 병사"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몸 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통증과 불쾌감이 더욱 뚜렷해졌다. 하지만 그 원인을 자세히 살펴볼 틈도 없었다——
어지러운 감각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 무언가가 순식간에 비스듬한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움직인 듯했다.
눈앞에는 여전히 나선형 계단이 서 있었다. 건물 내부 전체가 걷히지 않는 짙은 안개에 잠긴 것만 같았다.
유연
이건 아마 환각일 거예요.
"병사"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듯했다. 한 손으로 내 손목을 붙잡더니 다른 손을 옆으로 크게 휘둘렀다.
손바닥에서 어둠이 스며 나오듯 퍼져 나갔다. 그 어둠은 한순간에 겉모습만 그럴듯한 환상을 모조리 지워 버렸다.
그러자 눈부신 햇빛이 갑자기 시야로 쏟아져 들어와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머리 위를 덮은 거대한 투명 돔에서는 흐릿한 햇살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천체망원경이 놓여 있었다. 커다란 경통은 마치 먼 별들을 바라보는 듯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유연
……여긴 대체……
"병사" 역시 무척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 망원경이 대체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동시에 발아래에서는 어떤 힘이 끊임없이 확산하는 감각이 다시금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투명한 돔 너머를 바라보았다. 근처에 있던 나무의 꼭대기는 이제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있는 위치가 눈에 띄게 높아진 것 같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지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이곳이 정말 하나의 건물이라면 출입문이 없을 수는 있어도, 설마 층을 오르내리는 것까지 순간이동으로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불쾌감을 참고 주변을 돌아다녔다.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몇 번이나 모퉁이를 돌아간 끝에 구석에서 무척 익숙한 물건을 발견했다. 아래쪽을 가리키는 버튼과 회색 강철로 된 커다란 문이었다.
꼭 건물 꼭대기 층에 있는 엘리베이터 같았다.
유연
이렇게 첨단 시설 같은 곳에 저런 구식 장치가 있다니…… 이것도 환각은 아니겠죠?
나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어 벽에 붙은 ‘▼’ 버튼을 눌러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엘리베이터 문이 곧장 열렸다.
이 건물에는 아직도 전기가 들어온단 말이야?!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내부는 그리 넓지 않았다. 어두운 조명이 엘리베이터 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고, 양쪽 벽에 설치된 거울에는 그 빛이 몇 번이고 반사되고 있었다.
시험 삼아 고개라도 들이밀어 보려던 찰나, 누군가 갑자기 옷깃을 붙잡아 뒤로 잡아당겼다.
나는 그대로 몇 걸음 물러났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히자 고개를 돌렸는데, "병사"의 검은 가면에는 마치 ‘불만’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방금 내 행동이 조금 성급하긴 했다.
유연
……그냥 안을 좀 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것 같지 않아요? 이것도 환각일까요?
그는 잠시 말이 막힌 듯하다가 다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결국 체념한 듯 손을 뻗었다.
엘리베이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별다른 힘을 쓰지도 않은 채 버튼을 한 번 더 눌러 문을 열었다.
그가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뒤 몰래 따라 들어오는 나를 돌아보았을 때는 또 한 번 노려보는 듯했다.
나는 못 본 척하며 조작 패널을 진지하게 살펴보았다.
이곳에는 무려 21개의 층이 있었다. 층수 표시기에 떠 있는 ‘21’이라는 숫자는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유연
……우리가 꼭대기 층에 있었구나.
유연
다른 층에도 가 보면 어떨까요? 이 건물이 대체 어떤 곳인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말없는 한숨이 지나간 뒤, "병사"는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허락한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각 층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아예 모든 층의 버튼을 한 번씩 눌러 보았다.
하지만 실제로 눌리는 것은 【1】, 【7】, 【9】, 【13】, 【16】, 단 다섯 개뿐이었다.
유연
이상하네……
그도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손가락으로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어 내가 충분히 살펴볼 시간을 주었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NW 병사"
어디로 갈 건데?
유연
일단 16층에 가 봐요. 여기서 제일 가까운 층이니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 닫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소리도 없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층수 표시기에 ‘16’이 떠올랐다.
어둠을 지나 문이 열리자 발사대와 비슷하게 생긴 거대한 공간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유연
13층에도 가 봐요. 뭔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런데 다시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위쪽 층의 버튼은 더 이상 선택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엘리베이터는 아래로 내려갈 수만 있고 다시 올라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유연
그럼 먼저 9층에 가 봐요. 건물 중간쯤 되는 위치잖아요.
유연
7층에도 가 봐요. 제가 좋아하는 숫자거든요.
유연
이번에는 1층에 가 봐요. 여기가 이 건물의 로비일 것 같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 닫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또다시 소리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잠시 뒤 층수 표시기에 ‘1’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어둠을 지나자 비스듬히 들어온 한 줄기 빛이 어두운 공간의 일부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조금 전 그가 건물 외벽을 잘라 만들어 낸 입구였다.
그곳을 제외하면 사방은 여전히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내가 어둠 속으로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그가 갑자기 옷깃을 붙잡았다.
"NW 병사"
여기 있어.
차가운 군화가 바닥을 밟을 때마다 텅 빈 공간에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때때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그가 손을 뻗어 이 공간에 어떤 시설이 있는지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검은 그림자가 빛과 어둠의 경계를 넘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NW 병사"
여긴 아무것도 없어.
유연
……하필 1층인데 아무것도 없다니요?
그 역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 모든 기묘한 현상은 누구라도 의심을 품게 할 만했다.
그런데 아래층으로 내려올수록 몸 안에서 어떤 힘이 점점 더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숨 쉬는 것조차 답답해질 정도였다.
희미한 장면들이 강한 이끌림과 함께 수시로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관자놀이에서는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고, 맥박이 뛰듯 욱신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몰래 이를 악물고 발밑의 잿빛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1층 아래에도 분명 무언가가 있다.
"NW 병사"
언제까지 참을 생각이야?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병사"가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에는 짜증과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함께 묻어났다. 눈치 빠른 그라면 이미 오래전부터 내 상태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참고 기다려 준 것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그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유연
아무래도 제 친구한테 나쁜 버릇이 좀 옮았나 봐요.
이 말을 듣자 그의 미간이 한층 더 찌푸려진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유연
괜찮아요. 아직 버틸 수 있어요.
유연
여기에 제 Evol에 영향을 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확실해요. 그리고 그건 분명 우리 발밑에 있어요.
유연
지하 1층이나 지하 2층으로 내려갈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이 건물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유연
그런데…… 아래로 내려가려면 설마 바닥을 뚫어야 하는 건 아니겠죠?
바로 다음 순간, 옆에 있던 사람이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유연
저는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함께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나을 거예요.
그는 자신을 붙잡은 내 손을 내려다보았지만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한바탕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일까. 마침내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내 손목을 붙잡더니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끌었다.
그는 나를 엘리베이터 가장 안쪽 구석으로 데려간 뒤에야 말없이 손을 놓았다.
"NW 병사"
쪼그려 앉아. 단단히 붙잡고 몸을 웅크려.
유연
……?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검은 가면과 마주한 순간 모든 질문을 도로 삼켰다. 나는 그가 지시한 대로 자세를 취했다.
유연
……알겠습니다! 장관님!
그는 한숨을 내쉰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느슨해졌던 기색을 거두었다. 옆쪽 거울에는 곧게 선 그의 옆모습이 비쳤다. 사방에서 희미한 기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 순간, 문밖에서 귀를 찢는 듯한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발밑의 바닥이 크게 흔들리자 나는 황급히 벽을 단단히 붙잡았다.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보이던 빛이 조금씩 위로 멀어졌다. 무언가가 엘리베이터를 억지로 아래로 밀어붙이는 듯했고, 층수 표시기의 숫자도 어지럽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무식한 방법이잖아!
격렬한 진동에 나도 모르게 몸을 더욱 웅크렸다. 하지만 지금 백기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몸 안에서 부풀어 오르던 힘도 점점 더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생각을 모두 떨쳐 내고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힘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머릿속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갑자기 거세졌다. 온몸이 찢겨 나가는 듯한 강렬한 감각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그 미묘한 순간을 붙잡기도 전에 엘리베이터는 계속 내려갔고, 압박감도 점차 약해졌다.
유연
잠깐만요…… 조금만 위로……!
그는 마치 아주 정밀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처럼 즉시 반응했다. 다음 순간 발밑에서 무언가가 떠받치는 힘이 느껴졌다——엘리베이터가 다시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유연
조금만 더 위로……
유연
조금만 더 올라가 주세요……
끊임없이 요동치던 힘이 온몸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맥동을 따라가며 어떤 근원을 찾아 헤맸다.
유연
바로 여기예요!
내 말이 끝나자 엘리베이터도 흔들림 없이 멈춰 섰다. 층수 표시기가 두어 번 깜빡이더니 【0】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바로 다음 순간, 두 짝의 문이 양옆으로 거칠게 밀려 열렸다. 귀를 찢는 듯한 마찰음 속에서 점점 넓어지는 틈으로 한 줄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거의 일어설 수조차 없어서 간신히 고개만 들어 올렸다.
엘리베이터 밖에는 탁 트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은 잿빛이 감도는 검은 금속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정중앙에는 높이 1미터쯤 되는 장치 하나가 서 있었다.
각진 금속 지지대 몇 개가 바깥쪽으로 뻗어 나와 중앙에 수직으로 세워진 발광 장치를 떠받치고 있었다.
지지대 사이의 틈으로 빛이 흘렀고, 그 빛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서 있었다. 어지럼증이 연달아 밀려오면서 눈앞의 장치가 여러 개의 잔상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이어서 더욱 기괴하고 현란한 장면들이 통제할 새도 없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불길이 치솟고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졌다.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는 기도를 올렸다.
여러 사람이 빛의 고리 안에 서로 엇갈린 채 서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죽음을 각오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광경도 서서히 사라지고 흩어졌다. 이윽고 자잘한 잿빛 모래가 되거나 새로운 빛의 궤적으로 변해 갔다.
???
이것은 과거이자 미래……
누군가 나지막이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정말 들은 소리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낸 환청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환영처럼 일렁이고 깜빡였다. 마치 세계가 나를 부르며 기어코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려는 듯했다.
나는 엘리베이터 벽을 짚고 그 무시무시한 이끌림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러나 발밑의 바닥마저 빠르게 점멸하는 장면들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 혼란스러운 광경 사이로 눈앞의 사람이 다급히 내미는 손이 보였다.
유연
……선……
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 손끝은 그의 손바닥을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찰나의 순간, 나는 그 사람의 몸마저 뚫고 지나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거칠게 넘어졌다.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시야 한쪽에서 날카로운 바람을 몰고 오는 그림자가 눈앞까지 빠르게 들이닥쳤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한 쌍의 호박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역시 그 순간 내 얼굴을 알아보았다. 나를 향해 쏟아지던 공격이 갑자기 멈춰 섰고, 가까스로 방향을 튼 바람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특파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검은 가면도 없었다.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은 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유연
……선배……?
12-09 납치 (绑架)
하지만 이쪽 세계의 장치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장치에 의해 끊임없이 증폭된 힘이 무시무시한 격류가 되어 온몸을 휩쓸었다.
반대편 세계에서도 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 세계를 온전하게 완성할 마지막 조각이라도 되는 것처럼.
유연
……선배…… 저…… 기계……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온몸이 너무 아파서 제대로 말을 이을 수조차 없었다.
또다시 다른 세계로 끌려갈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무언가 거칠게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모든 통증과 몸이 끌려 나가는 듯한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온몸에서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통제를 벗어난 힘은 아직 관성에 따라 몸 안에서 거세게 흐르며 퍼져 나가고 있었다. 마치 수도꼭지를 잠글 수 없어 물이 계속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때 다급하면서도 따뜻한 팔이 등 뒤에서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순간 수많은 장면이 본능적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쉴 새 없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백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만유의 맞은편에 앉아 한마디 한마디 인내심을 갖고 그의 기억을 물었다.
이해타산에 밝아 보이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실종자들의 흔적을 찾았다.
그는 NW의 유리 실험실로 들어가 똑같은 검은 가면을 썼다. 검은 바람이 그의 주위를 휘감았다——마침내 실험실 전체가 잿더미로 사라질 때까지.
그는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황혼이 내려앉은 묘지에 앉아 텅 빈 눈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빛 속에 서 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든 내일이 그의 등 뒤에서 천천히, 고요하면서도 눈부시게 밝아질 것만 같았다.
유연
……미안해요……
그와 관련된 일들이 이렇게 낱낱이 펼쳐지고 있는데도, 나는 그것을 멈출 힘조차 없었다.
백기의 손에서는 어떤 기계가 끊임없이 깜빡이고 있는 듯했다. 아마 그도 내 능력이 통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두 팔로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유연
……잠깐……만.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옷깃을 붙잡고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연
나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지 마……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거야……
유연
여길 떠나면…… 나중에 다시 건너왔다가…… 여기로 돌아오는 데…… 또 한참 걸릴 테니까……
유연
선배…… 나한테서 조금만 떨어져 줘…… 안 그러면…… 자꾸 보이게 돼……
지금은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를 감싸 안은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만 느껴졌다. 그의 걸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유연
……부탁이야……
백기
……
그가 걸음을 멈춘 것 같았다.
유연
……제발……
백기
……5분.
백기
5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으면 그땐 타협 없어.
유연
7분만…… 안 될까?
백기
계속 흥정할 거면 지금 당장 나간다.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심하며 눈을 감았다.
그는 여전히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귓가에는 단단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벽에 몸을 기댄 듯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 몸 안에 흐르는 힘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조금씩 그 힘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한참 뒤 길게 숨을 내쉬자, 눈앞을 뒤덮었던 수많은 장면이 마침내 썰물처럼 물러났다. 그 너머로 잔뜩 미간을 찌푸린 한 쌍의 호박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유연
이제 많이 괜찮아졌어.
하지만 내 말에도 그의 굳게 찌푸린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나는 웃으며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살며시 쓸었다.
유연
인상 좀 펴요. 하나도 안 멋있으니까.
백기
……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백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유연
사실 방금 선배가 부순 그 기계 때문이에요.
나는 고개를 돌려 이미 산산조각 나 바닥에 흩어진 기계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유연
저 기계가 계속 내 능력에 영향을 주고 있었어요. 한참 전부터.
유연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있냐면……
몸에 어느 정도 힘이 돌아온 것을 깨달은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러면서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는 그에게 나를 내려 달라고 해서 다시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섰다.
유연
그건 나중에 꼭 설명할게요. 그런데 지금은 먼저 가 봐야 해.
유연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
백기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본능적으로 높아진 목소리에서 묘하게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지만 바로 다음 순간 자신의 태도를 알아차렸는지, 그는 짜증스럽게 뒷목을 쓸었다.
백기
아니, 다른 뜻은 없어.
유연
……
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앞의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하는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유연
서운해하지 마요.
그가 잠시 넋을 놓은 사이, 나는 다시 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연
돌아와서 꼭 설명할게요. 그러니까 선배도 너무 무리하지 마. 알겠죠?
나는 굳이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저 하고 싶은 말을 남겼다. 리고 다시 힘이 증폭될 것에 대비해 마음을 다잡고, 나를 이끄는 힘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세계를 건너갔다. 그런데 눈을 떴을 때, 예상했던 혼란스러운 힘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 기계가 놓여 있던 자리에도 산산이 부서진 잔해만 남아 있었다.
——이쪽 세계의 기계 역시 백기가 부숴 놓은 것이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손을 뻗어 내 손목을 힘껏 움켜쥐었다.
"NW 병사"
……
이번에는 그의 몸을 통과하지 않았다.
그의 온몸은 잔뜩 긴장해 있었고, 손끝은 희미하게 하얗게 질려 있었다.
유연
나 돌아왔어요.
나는 다른 손을 들어 그의 손등 위에 살며시 얹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더 확실히 느낄 수 있도록.
유연
아까 그 기계가 제 능력을 극한까지 증폭시키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반대편 세계에 그대로 끌려가 버렸어요.
"NW 병사"
반대편에도 같은 기계가 있었겠군.
유연
맞아요. 역시 병사님, 정말 똑똑하시네요~
그가 어이없어하는 기색을 보이자 나는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유연
전에 제가 말했던 그 친구 기억하세요?
유연
제가 운이 정말 좋았나 봐요. 그 친구도 마침 조사를 하다가 거기에 와 있었거든요.
유연
그래서 그쪽에서 제 능력에 영향을 주던 기계를 부숴 줬어요.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고요.
"NW 병사"
……그런데 왜 다시 돌아온 거야?
유연
그쪽이 아직 여기 있잖아요.
생각할 틈도 없이 튀어나온 내 말에 그가 순간 멈칫한 듯했다. 한참이나 무슨 말을 삼키고 있더니, 결국 고개만 돌렸다.
"NW 병사"
그럼 지금은 몸이 어때?
유연
그 기계가 없어지니까 확실히 훨씬 편해졌어요.
유연
이렇게 오래 저를 괴롭히던 원인을 드디어 찾았으니,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한번 알아봐야겠어요.
나는 이를 악물고 기계의 잔해 근처에 쪼그려 앉아 힘을 움직였다. 역시나 이 기계에도 매우 비슷한 보호 조치가 되어 있었다. 상대가 지나치게 철저하게 일을 처리해 놓은 탓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유연
정말 짜증 나…… 여기 남아 있는 기억도 그 사람이 손을 써 놔서 전혀 볼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는 건 이 모든 일이 여전히 그 수상한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처음 B.S.에서도 방송탑을 이용해 비슷한 수법으로 내 능력을 자극하고 영향을 준 적이 있었다.
그때의 목적은 내 힘을 깨워 진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무엇을 위해서일까?
이 모든 일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병사’가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NW 병사"
아래에 공간이 더 있을 거야……
???
이거 만드는 게 생각보다 꽤 번거롭거든.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 수상한 소녀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함께 쪼그려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소녀는 몹시 아쉽다는 듯 다른 손으로 기계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
정말 여기서 뭔가 알아낼 줄은 몰랐는데. 제법이네.
내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그림자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그는 유령 같은 움직임으로 소녀를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코앞까지 몰아쳤지만 소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눈꺼풀만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손가락 끝에 집고 있던 기계 조각만이 홀로 바닥에 떨어져 가벼운 소리를 냈다.
동시에 어떤 힘이 나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몸이 허공에 뜨는 듯한 감각이 들더니, 갑자기 밀려온 어둠과 무중력감이 나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눈앞으로 서로 엇갈리는 네온 불빛이 갑자기 쏟아져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금속 벽은 어느새 높낮이가 제각각인 빌딩 숲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어느 건물의 옥상에 서 있었다. 막아 주는 것 하나 없는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때리며 한기를 일으켰다.
유연
……
어떻게 한순간에 여기까지 온 거지? 그 소녀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여유롭게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차가운 웃음을 눈에 띠고 있었다. 텅 빈 옥상에 나와 그녀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차갑게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유연
보아하니 그쪽 사람들은 꽤 많은 모양이네요.
유연
그 공간계 Evolver도 근처에 있나요?
소녀는 내 말에 담긴 의도를 알아차린 듯했다.
그녀는 웃으며 바람에 날려 얼굴로 흘러내린 잔머리를 쓸어 넘겼다.
???
그 사람은 여기에 없어. 하지만…… 그 사람도 너한테는 낯설지 않을걸.
나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속에서 불쾌감이 점점 치밀어 올랐다.
유연
그쪽 사람들이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요. 그냥 똑바로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
그러니까 똑바로 말해 줄 수 없다는 뜻이지. 네가 꽤 똑똑하잖아.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성급하게 행동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나는 주변을 살피며 언제든 다른 세계로 건너갈 준비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머리 위에서 갑자기 낮고 묵직한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껍게 쌓인 구름이 순식간에 거칠게 뒤집혔다. 광풍이 끊임없이 휘몰아쳤고, 마치 사나운 맹수처럼 사방을 가로질렀다.
무언가를 감지한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소용돌이치는 구름 아래로 소리 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병사’의 몸을 휘감은 검은 바람이 양옆으로 펼쳐졌다. 마치 거대한 날개가 갑자기 펼쳐진 것처럼 그의 등 뒤에 드리워진 밤하늘을 넓게 가렸다.
바람 소리는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마치 모든 것을 찢어 버리고 집어삼킬 수 있는 심연이 다가오는 듯했다.
그는 바람을 딛고 공중에 떠 있었다. 가면 뒤에 감춰진 시선은 곧장 소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소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는 등 뒤에 모아 두었던 두 손을 조용히 몸 옆으로 내렸다.
???
백 경관님, 정말 성가신 사람이네.
저들은 분명 백기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바람이 순식간에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그의 몸이 칼집에서 뽑혀 나온 날카로운 칼날처럼 아래로 급강하했다.
곧장 소녀를 향해서였다. 소녀는 즉시 몸을 옆으로 틀어 피했다.
하지만 정면에서 몰아친 충격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그녀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고, 옥상 가장자리의 낮은 벽에 세게 부딪혔다. 그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접근했다. 소녀는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벽을 따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움직임조차 이미 백기가 예상한 경로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한발 앞서 소녀의 퇴로를 막았다.
소녀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방향을 바꿀 틈도 없이 검은 칼날 하나가 옆으로 날아들어 갈비뼈 부근을 거세게 가격했다.
소녀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벌어졌다. 몸이 옆으로 기울더니 두 무릎이 바닥에 세차게 부딪혔다.
???
……!
소녀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이를 악물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팔이 한 번 부들거리더니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계속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물었다.
유연
당신은 대체 누구예요?
유연
당신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거냐고요!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바람의 칼날에 허리와 배 부근이 찢어져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가 드러났다.
???
우리는 그저 미래를 바라는 사람들일 뿐이야.
???
그리고 미래에는 더 많은 가능성이 필요하거든.
피가 계속 옷자락을 타고 떨어졌지만, 소녀는 상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멀리 도시의 하늘을 향해 있었다.
???
이쪽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또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어.
???
그리고 우리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소녀의 눈빛에 의미심장한 기색이 감돌았다. 그녀는 담담하면서도 어딘지 아쉬운 듯 백기를 바라보았다.
???
세계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래도 창조보다 파괴가 훨씬 빠르고 쉬울 테니까.
???
그리고 파괴가 만들어 내는 선택은 우리 모두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직접적일 거야.
???
이를테면……
그 순간, 멀리서 묵직한 굉음이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병사’의 등 뒤, 저 멀리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번쩍였다.
그 빛은 거센 불길을 꼬리처럼 끌며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아주 잠깐 모든 것이 멈춘 듯하더니, 멀리서 거대한 화염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하늘을 뒤흔드는 굉음이 뒤늦게 몰려왔다. 발밑에서는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앞에서 먼 곳의 풍경이 점차 거대한 불꽃의 형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맹렬한 불길이 먼지와 파편을 휘감고 하늘로 솟구쳤다. 거대한 연기와 먼지 구름이 사방으로 거칠게 번져 나갔다.
곧이어 폭발의 충격파가 빌딩 지붕들을 연달아 넘어왔다. 뜨거운 여파가 불길의 혀처럼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백기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그는 눈앞의 폭도 따위는 더 이상 신경 쓰지도 않았다. 총알처럼 빠른 속도로 그 방향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
도시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상징과도 같은 곳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떨까?
사납게 치솟은 바람이 포효하듯 긴 여운을 남겼다. 그 바람 속에서 소녀의 목소리와 모습도 순식간에 희미해져 사라졌다.
나는 겁에 질려 눈을 크게 떴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저 불길과 폭발이 일어난 방향은……
특파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