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깨어난 도시 (苏醒之城)
소년은 중절모를 쓰고, 서로 다른 스타일이 뒤섞인 셔츠와 편안한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소년
지난번에는 누가 널 도와줬지만, 이번에는 반칙하면 안 돼.
이택언은 어쩐지 이 기묘한 소년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는 지금 이 소년이 나타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택언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소년
몰래 수작 부릴 생각도 하지 마. 난 전부 보고 있으니까~
마치 그의 속마음을 한눈에 꿰뚫어 본 듯 소년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말투는 천진난만했지만, 그 안에는 또래 아이답지 않은 침착함이 배어 있었다.
검은 소용돌이가 점점 커지며 방 안을 죽음처럼 고요한 어둠으로 뒤덮었다.
그때 기계적인 바이올린 선율이 느릿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뒤틀린 공간에 갑자기 균열이 생기더니, 검은 구두를 신은 발이 그 틈으로 걸어 나왔다.
소년은 고개를 갸웃하며 흥미롭다는 듯 말끝을 올렸다.
소년
네가 시간 관측자야?
제로
너와 조건 하나를 걸고 이야기하고 싶어.
첫 아침 햇살이 소리 없이 내려앉으며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도시를 깨웠다.
하늘에 떠 있던 혜성과 기이한 천문 현상은 이제 어젯밤 꿈처럼 아득해졌지만 모든 사람의 기억에는 깊은 흔적을 남겼다.
번화가의 대형 전광판부터 자동차 라디오까지 곳곳에서 당국의 최신 발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내 방송
이상 천문 현상은 종료되었으며, 위기 상황은 해제되었습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안심하고 외출하셔도 됩니다.
갑작스럽게 중첩 구역에 휘말릴 위험도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시 차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한 거리에서는 최근 일어난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행인 A
드디어 정상으로 돌아왔네. 며칠 전에는 진짜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니까.
행인 B
그러게 말이야. 전에는 연모시 재건 계획이니 뭐니 하면서 대대적으로 추진하더니, 오히려 도시가 갈수록 엉망이 됐잖아!
행인 C
그런데 혜성이 나타나고 세상이 멸망할 것 같았던 그 광경, 어쩐지 익숙하지 않아?
나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계속 들어……
행인 D
또 시작이네. 그냥 네 착각이라니까!
유연
……역시 다들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네.
혜성이 사라진 뒤 이틀 동안,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도 가끔 이번에 겪은 일들이 어딘가 낯익다고 말하곤 했다.
심지어 지난 17년 동안 자신들이 겪어 온 일과 조금씩 어긋나는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이번 혼란을 겪고 난 뒤 생긴 기시감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나 역시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서자 동료들이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자리 근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예준
나 요 며칠 우리 회사가 망하기 직전까지 가는 꿈을 꿨어.
그런데 위기의 순간에 내가 중책을 맡고, 사장님이 나서서 상황을 수습하는 거야……
고은
너는 그만 좀 잘난 척해라.
사장님이 위기를 수습했다는 건 믿겠는데, 너는 발목이나 안 잡았으면 다행이지.
편집기사
그러고 보니 요즘 정말 이상하긴 해.
지난주 금요일에 과자를 세 봉지 샀는데, 오늘 보니까 한 봉지가 감쪽같이 사라졌더라고.
촬영기사
그거 네가 몰래 먹어 놓고 까먹은 거 아니야?!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동료들은 느긋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벌써 이틀이 지났는데도 눈앞의 익숙한 풍경을 보고 있자니 여전히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만 같았다.
내가 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유영이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손을 흔들었다.
유영
사장님!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동료들이 웃으며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유영
이상하게 오늘은 사장님을 보니까 유난히 반가워요~
마치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 같아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때 뒤에서 안나연이 웃으며 다가왔다.
안나연
그동안 워낙 별의별 일이 다 있었으니까 그런가 봐.
안나연
그런데 유연아, 너도 정말 사람 걱정시키더라.
그때 내가 얼마나 전화를 했는데 계속 안 받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니까!
나를 걱정하는 동료들의 얼굴과 주위에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반복되던 48시간과 멈춰 버린 톱니바퀴가 마치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유연
미안해요. 다들 걱정하게 해서……
그래도 위기는 지나갔고, 모두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안나연
그러게.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
하늘에 혜성이 꼼짝도 않고 떠 있을 때는 정말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니까.
유연
언니, 그 얘기 벌써 이틀 동안 세 번째예요……
안나연
알았어, 알았어. 이제 그만할게.
우리도 슬슬 다시 일할 준비를 해야지!
안나연
내가 들은 바로는 여러 언론사가 이번 며칠 동안 일어난 이상 현상을 주제로 프로그램이나 기사를 준비하고 있대.
안나연
우리도 이 소재로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이라면 서둘러 준비해야 해.
유연
좋아요. 일단 한예준에게 제보 접수 창구부터 열어 달라고 할게요.
저도 흥미로운 소재가 없는지 한번 찾아볼게요!
나는 컴퓨터를 켜고 뉴스 사이트에 접속했다.
통유리창 너머로 들어온 햇살이 몸을 따스하게 감쌌다.
그 온기에 지금의 분주하면서도 평온한 일상에 저절로 마음이 놓였다.
예상대로 며칠 전 종말을 앞둔 듯했던 도시의 모습과 기이한 천문 현상, 거대한 혜성이 여전히 실시간 인기 검색어를 차지하고 있었다.
누리꾼 A
정부 발표는 대체 뭐야?
위기가 해제됐다는 말만 하면 다야?
애초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데? 또 일어날 수도 있는 거 아냐?
누리꾼 B
뉴스 봤는데 연모시뿐만 아니라 주변 도시 여러 곳에서도 중첩 구역이 나타났었대.
건물이 무너진 곳도 꽤 많다던데.
누리꾼 C
너희 요즘 이상한 꿈 꾼 적 없어?
나는 자꾸 내가 대기업 사장이 된 꿈을 꾸는데, 깨고 나면 여전히 월급쟁이더라.
누리꾼 D
그건 그냥 진짜 꿈을 꾼 거잖아. 하하하……
게시글과 댓글은 온갖 이야기로 뒤섞여 있었지만, 대부분 도시 중첩 현상과 혜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마우스를 움직이며 글을 훑어보던 중, 문득 한 게시글의 제목에 시선이 멈췄다.
'기억이 서로 어긋나는 느낌을 받은 사람 있어?'
'요 며칠 갑자기 어릴 적 일이 이것저것 떠오르는데, 내가 기억하던 것과 조금씩 달라. 혹시 나랑 비슷한 사람 있어?'
댓글을 살펴보니 대부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글쓴이의 말에 공감하는 댓글은 몇 개뿐이었다.
실제로 주변 사람들과 나눈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첩 현상이 사람들의 기억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인 걸까?
나는 웹페이지를 계속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다양한 자료를 살펴보며 몇 가지 프로그램 기획안을 간단히 작성했다.
이택언과도 한번 상의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휴대폰을 켜 보니 그에게서 먼저 문자가 와 있었다.
이택언
요즘 프랑스에 있어요. 새로운 기획안이 있으면 메일로 보내세요.
갑자기 프랑스에는 왜 간 거지?
의아한 마음에 답장 창에 '출장이에요?'라고 적었다가 잠시 고민한 끝에 지우고 다시 글자를 입력했다.
유연
돌아오길 기다릴게요!
유연
새 기획안도 메일로 보냈어요~ 이 대표님, 검토 부탁드립니다!
유연
여기에 귀여운 이모티콘 하나만 더 넣으면…… 완벽해!
기획안의 개요를 이택언에게 메일로 보낸 뒤, 지난 이틀 동안 밀려 있던 메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달이 떠오를 무렵이 되어서야 마침내 마지막 문장을 입력할 수 있었다.
밤바람에는 제법 매서운 냉기가 실려 있었다.
비가 내리는데도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모두 되찾은 일상을 축하하기라도 하는 듯 활기가 넘쳤다.
나는 퇴근길을 걸으며 평범하지만 소중한 이 일상을 만끽했다.
마치 나에게 그런 힘이 있었던 적조차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때 주변 나무에 걸린 장식등이 빗속에서 차례차례 불을 밝혔다.
문득 귓가에 금속이 바닥에 떨어지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이자 굵은 나사 하나가 굴러와 발치에 멈춰 섰다.
바로 다음 순간, 갑작스러운 비명이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끊어 놓았다.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경쾌하고 평화로운 음악을 뒤덮었다.
순식간에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자 높은 건물 꼭대기에서 거대한 광고판이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놀란 외침과 비명이 뒤섞이는 가운데 거대한 광고판이 굉음을 내며 지면에 부딪혔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였다.
샤오위에는 사무용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형광등의 새하얀 빛은 속내를 알 수 없는 그의 표정을 더욱 차갑게 비추었다.
그 앞에 펼쳐진 수첩에는 몇 가지 단어가 휘갈겨져 있었다.
'세계 중첩', 'CORE', '혜성으로 인한 종말'……
그는 잠시 펜을 멈추더니 '섣달그믐의 변고'라는 글자 옆에 '발생하지 않음'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 뒤에 물음표를 하나 덧붙였다.
머릿속에는 갑자기 떠오른 흐릿한 정보들이 조각조각 스쳐 지나갔다.
분명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마치 직접 겪은 일인 것 같은데 정작 아무런 기억도 없는 듯했다.
???
샤오 지휘관님.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문을 두드렸다.
샤오위에는 수첩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샤오위에
평소엔 용건 없이는 찾아오지 않으시는 허 교수님이 웬일이십니까?
CORE 실험에 새로운 진전이라도 있었습니까?
허묵
강대한 힘이 스며들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샤오 지휘관님은 너무 서두르고 계시는군요.
허묵
한 가지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다가 다른 중요한 정보를 놓치면, 오히려 득보다 실이 클 수 있습니다.
샤오위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의 눈빛에 서린 경계심은 소리 없이 감춰졌다.
허묵
혹시 지휘관님께서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어떤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허묵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짚었다.
샤오위에의 눈빛이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을 확인한 그는 여유롭게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샤오위에가 손을 뻗어 허묵에게 자리를 권했다.
샤오위에
자세히 들어 보고 싶군요.
41-2 악몽 (噩梦)
웅웅거리며 진동하는 휴대폰 소리에 나는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책상 위에 펼쳐진 수첩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리고 있었다.
광고판이 떨어져 내리며 몸을 덮쳤을 때의 고통이 마치 실제로 겪은 일처럼 생생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나서야 손바닥이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유연
……꿈이었어?
창밖에는 햇살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지만, 어쩐지 한기가 느껴졌다.
꿈속에서 겪은 일들이 아직도 하나하나 선명했다.
빗물 냄새와 광고판이 굉음을 내며 추락하던 소리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감각 속에 맴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낯설지 않았다.
유연
예지몽……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CORE가 깨어난 영향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이 예지몽은 내게 무언가를 알려 주려는 걸까?
아니, 어쩌면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저 평범한 악몽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애써 떨쳐 냈다.
무심코 휴대폰을 집어 들자 화면에 읽지 않은 메일 한 통이 떠 있었다.
허묵
좋은 소식이 있어요.
혈액병 치료제가 임상 관찰과 후속 추적 검사까지 통과했어요.
조만간 정식으로 출시될 것 같으니, 이제 안심해도 돼요.
유연
!
간결하고 명확한 내용에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걱정이 단번에 사라졌다.
나는 곧바로 기운을 차리고 허묵에게 답장을 보냈다.
유연
허 교수님! 이렇게 엄청난 소식을 직접 전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해요! OvO
허묵
그 엄청난 소식은 당신이 노력해서 얻어 낸 결과인걸요. ^_^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의자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기대자, 노을빛이 사무실을 따뜻한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마음속에 드리워져 있던 먹구름도 걷히고 햇살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좋은 소식에 한껏 들뜬 채 남은 일을 마무리한 나는 마지막 노을빛을 밟으며 퇴근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출입구 옆에 느긋하게 기대어 선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밤바람 속에서 그가 내쉬는 하얀 입김이 뚜렷한 얼굴 윤곽을 한층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가슴 가득 기쁨이 차올라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달려갔다.
유연
선배! 여긴 어쩐 일이에요?
백기는 달려오는 나를 안정적으로 품에 받아 안았다.
허리를 감싼 커다란 손으로 나를 살짝 들어 올리더니 더욱 꼭 끌어안았다.
백기
오늘은 일이 별로 없어서 좀 농땡이 피우려고.
너 퇴근하는 것도 데리러 오고, 같이 저녁도 먹을 겸.
백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저녁노을보다 더 밝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거의 망설이지 않고 한 장소를 떠올렸다.
유연
그거 정말 잘됐네요.
저도 마침 꼭 먹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의미심장한 내 말투를 들은 백기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미소 지었다.
백기
우연이네. 나도 그런데.
우리는 늘 앉던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 사장님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두 그릇을 들고 오셨다.
사장님
맑은 국물 국수랑 특급 고추기름 국수야.
둘 다 맛을 새롭게 손봤지.
사장님
많이들 먹어! 사양하지 말고!
혹시 입맛에 안 맞는 게 있으면 꼭 얘기해 주고.
커다란 그릇 밖으로 넘칠 듯 푸짐하게 담긴 국수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백기
괜찮아. 다 못 먹으면 내가 먹으면 되니까.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며 쌀쌀한 밤 풍경에 정겨운 온기를 더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백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매운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있었다.
김이 서린 호박색 눈동자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이 어려 있었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듯, 그는 자기 그릇에서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후후 불더니 내게 내밀었다.
백기
한 입 먹어 볼래?
유연
네!!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가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국물이 혀끝을 지나 목으로 넘어갔다.
그다음 순간, 혀뿌리부터 얼얼한 감각이 퍼져 나왔고 나는 매운 기운에 사레가 들려 기침을 터뜨렸다.
백기
괜찮아?
나는 손을 저어 괜찮다는 뜻을 전했지만, 기침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옆자리에서 국수를 먹던 아저씨가 그 모습을 보고 웃으셨다.
아저씨
아가씨, 여기 국물은 엄청 매워!
그렇게 급하게 마시면 안 되고 천천히 마셔야지.
백기
알고 있어요.
그냥 너무 오랜만이라 그리웠나 봐요.
아저씨
그러니까 말이야!
며칠 동안 계속 문을 닫았잖아.
나처럼 국수 좋아하는 사람은 먹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아저씨의 말에 주위 손님들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국수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김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곳은 밤 풍경 속에서도 유난히 따스한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입안에는 여전히 진한 국물의 향이 남아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정겨운 풍경을 바라보다가 눈앞의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유연
이렇게 있으니까 정말 좋네요.
백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유연
아, 맞다. 선배.
기억나요? 그때도 우리 여기 앉아서 국수 먹었잖아요.
백기는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내가 언제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차렸다.
백기
응. 그때도 사장님이 국수랑 고명을 잔뜩 주셨지.
넌 그걸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먹었고.
굶어 죽은 귀신은 되기 싫다면서.
유연
풉, 그런 것까지 기억 안 해도 되거든요!
그래도 그때는 정말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하고 먹었으니까요!
유연
다만 그때는 너무 썰렁했죠.
역시 지금처럼 북적이는 게 좋아요.
사장님도 바라던 대로 더 많은 사람에게 새로 개발한 국수를 맛보여 줄 수 있게 됐고요!
백기
다 네 덕분이야.
유연
시민들을 위해 동분서주한 특파팀 덕분이죠.
그리고 종말을 앞두고도 꿋꿋하게 살아간 모든 사람들 덕분이고요.
나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앞의 그에게 시선을 돌려 진지하게 말했다.
유연
무엇보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게 끝없는 용기를 준 선배 덕분이에요.
백기는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별빛 같은 작은 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내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백기
혼자 혜성을 마주했을 때…… 무서웠어?
유연
당연히 무서웠죠.
유연
그렇지만 아직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고, 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힘과 용기를 떠올리면……
유연
다시 한번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저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아주 많거든요.
유연
앞으로도 선배랑 계속 린씨네 식당에 와서 국수를 먹고 싶고,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밀크티도 함께 마시고 싶어요.
나는 고개를 들어 백기를 바라보았다.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는 오직 한 사람의 모습만이 담겨 있는 듯했다.
유연
이 세상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언제까지나 제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유연
이렇게 말하고 보니 소원이 참 많네요.
저 너무 욕심 많은 걸까요?
백기가 웃으며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목소리는 경쾌하면서도 확신에 차 있었다.
백기
많지 않아.
넌 그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어.
백기
게다가 넌 이미 가장 이루기 어려운 소원을 이뤘잖아.
다른 소원들도 분명 이루어질 거야.
41-4 추락의 위협 (坠落的威胁)
바다 분식을 나서자 맑았던 밤하늘에서 뜻밖에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백기는 우산을 펼쳐 들고 나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따뜻한 국수를 먹으며 얻은 온기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금세 사라졌다.
추위에 빨개진 내 코끝을 바라보던 백기가 가볍게 웃었다.
백기
국수도 먹었으니, 이제 따뜻한 밀크티 차례인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잔뜩 부른 배를 만져 보니 조금 망설여졌다.
나는 그의 손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유연
선배가 그렇게까지 마시고 싶다면, 저도……
그때 멀지 않은 곳의 거리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말을 멈췄다.
높이 솟은 사무용 빌딩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에는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우산은 나와 백기를 작은 공간 안에 감싸 안았다.
빗물이 바닥에 비친 불빛을 번지게 하면서 거리는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들었다.
어딘가 낯익은 풍경이었다.
순간 오후에 꾼 악몽이 떠올랐다.
등골이 서늘해진 나는 걸음을 멈췄다.
백기
왜 그래?
나는 잠시 망설였다.
백기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연
……오늘 오후에 꿈을 하나 꿨어요.
유연
꿈에서도 제가 바로 이 거리를 걷고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처럼 비가 내리고, 거리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유연
그렇게 걷다가 길 양쪽 나무에 걸린 장식등이 켜졌고, 그다음에는……
나는 멀리 보이는 높은 건물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순간 거대한 광고판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연
저 건물에 달린 광고판이 떨어졌어요.
광고판이 나를 덮쳤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백기의 눈빛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유연
이 꿈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평범한 악몽이었을 수도 있고요……
백기
평범한 악몽이든 아니든, 확인해 보는 게 안전하겠어.
백기
어차피 바람 한 번이면 되는 일이니까.
그의 태연한 말투에 불안했던 마음이 금세 가라앉았다.
백기
시내 장식등은 정확히 8시에 켜져.
네 꿈대로라면 아직 5분 남았으니까,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게.
유연
그럼 저도 같이……
백기
괜찮아. 마침 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하나 있거든.
백기
나도 밀크티 한 잔 마시고 싶어.
펄 추가하고, 당도는 50%로.
아직 조금 망설여졌지만, 백기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
그럼 빨리 돌아와요.
백기
명령 받들겠습니다.
상업용 빌딩 옆 골목은 어둑했다.
바로 옆 거리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오히려 이곳을 더욱 적막하게 만들었다.
백기는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밤의 어둠과 빗소리를 틈타 바람을 타고 솟아올랐다.
그는 소리 없이 건물 옥상에 내려앉았다.
길고 곧게 뻗은 그의 몸은 어둠 속에 감춰진 한 자루의 총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광고판 뒤에는 한 청년이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광고판의 무게를 지탱하는 볼트 몇 개는 이미 느슨해져 있었다.
광고판에 연결된 전선도 모두 끊어져 있었는데 절단면은 새것처럼 반듯했다.
청년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수상쩍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돌린 순간, 눈앞에 우뚝 선 키 큰 사람과 마주쳤다.
백기
지금 뭐 하는 거지?
청년은 깜짝 놀라 공구를 내던지고 돌아서서 달아났다.
하지만 빠르게 몰아치는 바람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순식간에 그를 바닥에 짓눌렀다.
보이지 않는 바람 덩어리가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한 광고판을 떠받쳤다.
백기는 눈을 내리깔고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백기
공공시설물을 훼손하고 인명 피해를 일으키려 한 혐의로 널 체포한다.
청년
체포? ……씨발, 누구 겁주는 줄 알아?!
청년의 얼굴에 흉악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또 한 차례 바람이 몰아쳤다.
마치 작은 개미 한 마리를 짓밟듯 청년을 바닥에 짓눌렀다.
그의 품속에서 총 한 자루가 떨어졌다.
백기는 고개를 숙여 총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눈빛에 경계심이 떠올랐다.
백기
너, GR 소속이야?
나는 밀크티 두 잔을 든 채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는 어느새 7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연
선배는 왜 아직도 안 돌아오지?
설마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시간은 일 초, 일 초 흘러갔다.
어느새 7시 59분.
30초, 20초……
주변 나무에 걸린 장식등이 일제히 켜진 바로 그 순간, 기다리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백기는 8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다만 머리 위로 머리카락 두 가닥이 바람에 휘말려 삐죽 솟은 채 살랑거리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광고판은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아름다운 음악이 어우러진 거리는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백기는 내 손에서 우산을 넘겨받으며 시원스럽게 웃었다.
백기
보고합니다, 대장님. 임무 완료!
백기
실제로 낡아서 헐거워진 나사가 하나 있더라고.
건물 관리실에 연락해서 긴급 보수하도록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 삐죽 솟은 그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지만, 동시에 뒤늦게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 꿈은 역시 예지몽이었다.
내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일까.
백기는 내 손을 붙잡고 자연스럽게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가슴 깊숙이 퍼지며 불안한 마음을 조금씩 몰아냈다.
나는 그에게 미소 지으며 손을 더욱 꼭 맞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건넸다.
유연
수고하셨어요, 백 경관님!
임무 완료 보상이에요. 설탕은 뺐으니까 아주 건강하답니다.
백기는 내가 내민 밀크티를 그대로 한 모금 마셨다.
자유롭고 환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내 얼굴에 머물렀다.
백기
아직 임무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보상은 미리 받아 둘게.
백기
널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줘야 임무가 끝나니까.
이상 현상을 주제로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로 하고 제보를 받기 시작한 뒤, 며칠 사이 회사로 들어오는 사연이 점점 많아졌다.
수많은 제보를 살펴보던 나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한 가지 변화를 발견했다.
'기억'에 관한 내용이 담긴 제보가 늘어나고 있었다.
유연
설마 세계 중첩 현상이 기억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는 걸까?
의문을 품은 채 실시간 인기 검색어에서 관련 키워드를 찾아보았다.
유연
'중첩', '기억'……
역시 예상대로 관련 검색어가 이전보다 조금 더 늘어나 있었다.
자료를 정리할 문서를 하나 만들려던 참에 갑자기 안나연이 문을 두드렸다.
안나연
유연아, 시청에서 사람이 왔어.
41-6 도사리는 위기 (危机环伺)
응접실 문을 열자마자 그 골칫거리와 눈이 마주쳤다.
유연
양기준 씨?
양기준은 정중한 미소를 띤 채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기준
오랜만에 귀사를 방문했는데, 유연 회사가 갈수록 번창하는 것 같군요.
유연
과찬이세요. 여러모로 도움을 받은 덕분이죠.
유연
그런데 양기준 씨께서는 이번에 무슨 일로 저희 회사를 찾아오셨나요?
양기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귀사에는 좋은 소식이 될 수도 있겠군요.
양기준은 그렇게 말하며 뒤에 서 있던 수행원에게 눈짓했다.
수행원이 서류 몇 부를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첫 장을 펼치자 큼지막한 글씨로 제목이 적혀 있었다.
'연모시 재건 계획 홍보 방안'
양기준
도시 중첩 현상과 기이한 천문 현상으로 인해 재건 사업이 한동안 잠정 중단됐습니다.
양기준
이제 위기가 해소됐으니, 저희는 재건 사업을 최대한 빨리 재개할 계획입니다.
양기준
귀사의 《기적을 찾아서》는 그동안 Evol 관련 홍보 사업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해 왔습니다.
양기준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귀사가 시청의 든든한 협력자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서류를 꼼꼼히 넘겨 보면서도 양기준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서류에 적힌 조항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양기준의 말투도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설마 정말 업무 협의를 하러 온 것뿐일까?
하지만 이런 일 때문에 굳이 그가 직접 찾아올 필요까지는 없을 텐데.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들었다.
유연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내용은 대체로 이해했어요. 앞으로 협조해야 할 홍보 업무가 상당히 많겠네요.
유연
다만 저희 회사 규모를 고려하면 먼저 내부적으로 논의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내 신중한 태도에도 양기준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양기준
물론입니다.
양기준
그럼 앞으로의 협력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를 미리 기원하겠습니다.
양기준은 정중하게 웃으며 부하들과 함께 응접실을 나서려 했다.
그런데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양기준
그러고 보니……
양기준
제가 최근에 꿈을 하나 꿨습니다.
나는 흠칫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양기준의 얼굴은 저녁 어스름 속에 가려져 있었다. 오직 두 눈에만 희미하고 어두운 빛이 어려 있었다.
양기준
꿈에서 제가 어느 프로듀서와 격렬하게 충돌하더군요.
그러다가 결국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습지 않습니까?
그는 그런 꿈을 꿨다는 사실이 터무니없이 우습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나도 모르게 손끝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했다. 고요함 아래 숨어 있던 불길한 기운이 소리 없이 부딪쳤다.
유연
요즘 너무 피곤하셔서 이상한 꿈을 꾸신 게 아닐까요?
양기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마치 내 말이 얼마나 믿을 만한지 가늠하는 듯했다.
양기준
그렇습니까?
하지만 설령 꿈이 아니었다고 해도 저는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양기준
지금은 무엇보다 연모시 재건 사업을 함께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양기준
앞으로 유연 씨와 협력하게 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그 뒤로 사흘 동안 양기준에게서는 협력에 관한 추가 연락이 오지 않았다.
상대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이상 나 역시 당분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했던 말은 마치 저주처럼 귓가를 맴돌며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유연
이제 그만 생각하자……
유연
어쨌든 그 사람이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절대 방심해서는 안 돼.
나는 조금씩 흔들리는 지하철 객차 안에 앉아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억지로 떨쳐 내려는 듯이.
행인 A
방금 찾아봤는데, 오늘 밤 중앙광장 야시장에서 공연도 한대.
근데 앞자리를 잡으려면 서둘러야 한다더라.
행인 B
그럼 이따 내리자마자 바로 가자!
좋은 자리부터 잡아야지!
시공간 중첩 현상으로 오랫동안 텅 비어 있던 지하철은 어느새 예전의 북적이는 모습을 되찾았다.
꾸벅꾸벅 졸고 있자니 주변 사람들의 어수선한 대화 소리가 지하철의 덜컹거리는 소음에 뒤섞여 들려왔다.
그때 휴대폰이 두 번 진동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이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백기
난 세 정거장 남았어. 유연이 너는?
나는 고개를 들어 지하철 노선도를 확인했다.
'중앙광장'역까지 정확히 세 정거장이 남아 있었다.
유연
저도 세 정거장 남았어요~
백기
좋아. 이따 지하철역에서 보자.
백기와의 대화창을 닫자 회사 단톡방에 새로운 소식이 올라왔다.
한예준
대박 소식! 연모시에 새 지도자가 온대. 재건 사업을 추진하러 온다던데?
유영
나도 들었어! 시청을 지원하려고 다른 성에서 특별히 파견하는 고위 관계자라나 봐!
새 지도자?
어제 양기준을 만났을 때는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양기준은 재건 사업의 총책임자였다.
그렇다면 새로 부임한다는 그 사람과는 어떤 관계에서 '협력'하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보고 있거나,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광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연
……착각인가?
나는 눈을 깜빡이고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지하철에서 내려 밖으로 걸어가며 백기에게 '저 도착했어요!'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10분이 남아 있었다.
승강장에서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아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듯한 시선이 다시 느껴졌다.
아까보다 훨씬 선명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섬뜩한 느낌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주머니 속 마취총을 꽉 움켜쥐고 경계하며 오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대체 누구지?
입술을 깨물었다.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사람이 수상하게 느껴졌다.
바로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지하철이 들어오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몰려드는 인파에 떠밀려 나도 승강장 쪽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유연
잠깐만요, 지나갈게요. 저는 나가야 해서……
죄송해요!
비틀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오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세게 밀쳤다.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이 몸이 철로 위로 세차게 떨어졌다.
승강장이 반 박자 정도 정적에 잠겼다가, 곧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행인 A
꺄아아악——!
행인 B
세상에! 사람이 떨어졌어!!
지하철 바퀴가 선로를 짓밟으며 달려오는 굉음이 귀를 찢을 듯 울렸다.
머릿속이 웅웅거렸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격렬하게 진동하는 철로 위로 먼지가 피어올라 까진 피부를 스쳤다.
선명한 통증이 밀려오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움직여.
빨리 움직여야 해!!
하지만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고, 마치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움직여 봤지만 고작 몇 센티미터 정도 옮겼을 뿐이었다.
관자놀이가 쿵쿵 뛰었다. 목이 꽉 조이는 듯해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멀리서 다가오던 지하철의 전조등이 정면으로 쏟아졌다.
마침내 거대하고 눈부신 빛이 내 시야를 온통 뒤덮었다.
???
연아!!!
익숙한 외침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내 의식을 깨웠다.
다급하게 밀려온 기류가 나를 감싸 안았다.
어둠을 가르는 날카로운 검처럼, 그 바람은 모든 위험을 베어 내는 듯했다.
갑자기 몸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부드럽고도 소중히 감싸는 바람이 나를 떠받쳐 올렸다.
다음 순간 거센 기류가 옷자락을 휘날렸고, 지하철이 내 발아래를 굉음과 함께 스쳐 지나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순식간에 귓가에는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와 정신없이 뛰는 심장 소리만 남았다.
지하철은 한참을 더 달리고 나서야 가까스로 멈춰 선 듯했다.
눈을 뜨자 철로 위에 떨어뜨린 가방이 보였다.
거대한 쇳덩이에 무참히 짓밟힌 가방은 산산조각이 나, 선로 사이로 잔해만 드러내고 있었다.
승강장에 채 내려서기도 전에 누군가가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백기
괜찮아, 연아. 이제 괜찮아……
머리 위에서 백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나를 끌어안은 품마저 떨리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행인 A
세상에, 너무 무서워! 저 여자분 괜찮으신 거야?
행인 B
혹시 선로에 뛰어들어서 자살하려던 거 아니야……?
행인 C
나 방금 누가 저 여자를 밀치는 것 같았는데!
행인 B
쉿, 함부로 말하지 마……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가 마치 얇은 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했다.
백기는 나를 더욱 힘껏 품에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역무원
손님! 괜찮으세요?!
저는 역무원입니다. 이미 구급차를 불렀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두 분을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역무원
선생님, 우선 역 안에 있는 응급처치실로 이동하시죠.
머리 위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백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차갑고 날 선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다치지 않았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열자 목소리가 너무나도 쉰 소리로 나와 나 자신조차 놀랐다.
유연
선배……
백기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마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는 내 어깨를 움켜쥔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백기
이제 괜찮아.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움츠러든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백기는 그런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바닥 안에 감싸 쥐었다.
그때 머리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신호음이 울리더니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역내 안내 방송
승강장에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역무원의 안내에 따라 질서를 지키며 승강장을 벗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백기
잠깐만요.
백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는 한쪽 팔로 나를 가로안아 들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역무원에게 경찰 신분증을 내보였다.
백기는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차갑게 훑어보았다.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을 듯한 위엄이 실려 있었다.
백기
경찰입니다. 이번 사건은 계획적인 살인 미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백기
곧 경찰이 도착할 겁니다.
그때까지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현장에 남아 주셔야 합니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한층 커졌다.
하지만 백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선 채 다시 역무원을 바라보았다.
백기
응급처치실로 안내해 주세요.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내 손을 꼭 잡고 있다는 감촉만이 선명했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앞으로 움직였다.
응급처치실에 들어서자 지하철역의 소음이 상당 부분 차단되었다.
백기는 나를 의자로 데려가 앉혔다.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무언가가 어깨 위로 덮였다.
그는 휴대폰을 스피커폰으로 전환해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역무원이 건네준 구급상자를 열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솜에 생리식염수를 적셨다.
백기
……그래, 지하철 중앙광장역이야. 시간은 저녁 7시 50분쯤.
백기
서둘러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승강장 CCTV부터 확인해.
용의자를 확보한 다음 승객들을 대피시켜.
고진
알았어. 바로 갈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통화가 끝난 뒤 백기는 내 뺨 옆에 생긴 찰과상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차가운 솜이 상처에 닿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백기는 곧바로 손을 멈췄다.
백기
아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얼굴에 닿는 그의 손길은 눈에 띄게 더 부드러워졌다.
잠시 후, 백기가 나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마치 조금이라도 세게 건드리면 내가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듯, 한없이 조심스러운 품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가슴에서 전해지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 번, 또 한 번.
심장이 힘차고 또렷하게 뛰고 있었다.
41-7 뜻밖의 심연(연못)
부엌에서 전자레인지가 작동하는 작은 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띵——'
가벼운 소리와 함께 백기가 음식 접시 몇 개를 들고 나왔다.
백기
고진이랑 다른 녀석들이 이제 내 전자레인지 솜씨는 경지에 올랐다고 하더라.
나도 꽤 괜찮아졌다고 생각해.
백기
일단 먹어 봐. 입맛에 안 맞으면 다른 걸로 바꿔 줄게.
소고기 파이와 구운 죽순의 향이 뒤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백기를 바라보았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더없이 맑은 샘물 같았다.
그 안에는 나를 향한 걱정과 조심스러운 마음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만약 아까 백기가 제때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이성이 마침내 무너졌다.
코끝이 찡해지더니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백기는 깜짝 놀라 허리를 숙이고 내 눈물을 닦아 주려 했다.
그런데 그때 부엌에서 물이 끓는 날카로운 주전자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불을 끄려다가, 내게서 손을 떼자마자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사이 그의 관자놀이에 가느다란 땀방울이 맺혔다.
주전자 소리는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결국 다급해진 백기가 손을 한 번 휘둘렀다.
바람 한 줄기가 부엌을 가로지르자 주전자 소리가 멎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나는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백기는 내 뒤통수를 한 번, 또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은 한없이 다정하고 인내심이 깊었다.
유연
저, 저는 그냥 역에서 나가서 선배를 만나려고 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유연
……그런데 갑자기 누가 저를 밀었어요.
나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곧 뜨거운 숨결이 눈썹 언저리에 닿았다.
백기
무서워하지 마. 이제 괜찮아.
내가 여기 있잖아.
백기
그 자식은 반드시 잡을 거야.
백기는 서두르지 않고 나를 품에 안아 주었다.
손가락 끝으로 얼굴의 상처를 피해 가며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 알 수 없었다.
목은 쉴 대로 쉬어 따끔거렸고, 눈도 뻑뻑하고 시큰거렸다.
하지만 그의 품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를 느끼고 있자니, 줄곧 불안하게 떠 있던 마음도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옷깃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참에 하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제야 점심때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백기는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젓가락을 내 앞으로 밀어 주었다.
백기
일단 뭐라도 좀 먹고 기운부터 차리자.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그릇에 닭튀김 한 조각을 올려놓았다.
이어서 마늘을 곁들인 양송이버섯도 한 조각 집어 주었다.
백기
전에 라면이랑 빵을 좀 줄여야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다른 간편식도 이것저것 먹어 봤어.
백기
전자레인지로 닭날개 굽는 것도 꽤 잘해.
다음에 한번 해 줄게.
백기
아, 그리고 특파팀 근처에 서양식 패스트푸드점이 새로 생겼어.
요즘 우리 팀의 새로운 단골 회식 장소가 됐거든.
다음에 너도 데려갈게.
백기는 일부러 내 불안을 달래 주려는 듯했다.
어쩌면 자신이 느끼는 불안까지 떨쳐 내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최근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들을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백기
고진이 얼마 전에 시내에 있는 실내 스키장을 하나 알아냈어.
나중에 휴가 내면 우리 같이 가 보자.
백기
항졔 기억나?
며칠 전에 누가 계속 익명으로 꽃을 보냈대.
장난인 줄 알고 단서를 따라가서 그 사람을 '잡았는데', 알고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
백기
아율이 준비한 깜짝 선물이었대.
백기
아, 맞다. 당조한테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가 하나 있거든.
최근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며칠 전에 특파팀으로 당조를 찾아왔어.
케이크도 하나 가져왔고.
백기
녀석은 입으로는 귀찮다고 투덜거리더니, 하루 종일 입이 귀에 걸려 있더라.
그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따뜻한 무언가가 마음을 감싸는 것 같았다.
불안하게 뛰던 심장도 조금씩 진정되었다.
그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백기는 발신 번호를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어디에서 걸려 온 전화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를 따라갔다.
백기
……알았어. 일단 그 사람은 붙잡아 둬.
내가 돌아가서 이야기할게.
통화를 마친 백기가 뒤돌아보다 나를 발견하고 미소 지었다.
백기
다 먹었어? 더 먹을래?
유연
……사람을 잡은 거예요?
백기
걱정하지 마. 내가 처리할게.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에게 다가가 고개를 들고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유연
저한테 일부러 숨기지 않아도 돼요.
선배, 사실 요 며칠…… 계속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백기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더 묻지 않고 내 손을 잡아 소파로 데려가 앉았다.
내가 이야기를 이어 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맞잡은 손에서는 끊임없이 온기가 전해졌다.
나는 뒤엉킨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며 최근 일상에서 일어난 일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유연
요즘 자꾸 누군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을 찾아본 적은 한 번도 없고……
유연
그래서 지금까지는 제가 너무 예민해진 건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유연
그리고 예지몽에서 떨어졌던 그 광고판도 있어요.
백기는 잠시 침묵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가 무언가 말하려다 망설이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연
선배…… 혹시 뭔가 알고 있어요?
백기
……응. 하지만 나도 방금 확실히 알아낸 거야.
백기
광고판에 손을 댄 놈이랑 오늘 널 밀친 놈.
둘 다 GR 소속이야.
나는 멍하니 백기를 바라보며 그가 전한 사실을 이해하려 애썼다.
백기
전에 광고판을 건드린 놈을 발견했을 때는 그 녀석들의 진짜 목적이 뭔지 확신할 수 없었어.
백기
하지만 이제는 확실해.
녀석들이 노리는 건 CORE야.
온몸이 굳어 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정수리까지 퍼졌다.
백기는 머리를 한 차례 헝클어뜨리며 속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백기
미안해.
녀석들이 너한테 손을 대기 전에 해결하려고 했어.
네가 매일 이런 일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했거든.
유연
잠깐만요——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중요한 사실이 갑자기 떠올랐다.
유연
그러니까…… GR 사람들이 제가 CORE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
백기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심각해졌다.
백기
정보가 어디서 새어 나갔는지 지금 추적하고 있어.
백기
정보를 팔아넘긴 놈이 있을 수도 있고, 내부에 첩자가 있을 수도 있어.
심지어 이번 세계 중첩 현상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있고.
유연
세계 중첩 현상이 사람들의 기억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에요?
백기
맞아.
유연
그런데 그 과거의 기억에는 CORE에 관한 정보가 없었을 텐데……
바로 그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나도 모르게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백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말없는 긍정을 읽을 수 있었다.
백기
최근 특파팀에서 기계 상자를 팔아넘기던 일당을 검거했어.
그중 상당수는 남들을 따라다니던 건달이었지만, 몇 명은 BLACK SWAN 소속이었어.
백기
그중 한 명이 조사받는 과정에서 사건 당시의 상황과 명백히 맞지 않는 진술을 했어.
백기
그자는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지.
백기
'우리는 QUEEN을 찾아야 한다.'
마음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무언가가 순간 더욱 팽팽해졌다.
멀고도 흐릿했던 기억들이 갑자기 아우성치듯 밀려들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유연
선배, 그럼 앞으로…… 제가 더 많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걸까요?
백기가 눈을 내리깔았다.
귓가에 닿은 그의 손길에는 나를 달래려는 마음과 애틋함이 어려 있었다.
백기
내가 있으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백기
누가 감히 널 건드리러 오든, 다시는 얼씬도 못 하게 멀리 쫓아 버릴 테니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주기락은 화면에 뜬 익숙한 번호를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린 채 전화를 받았다.
???
생각은 좀 해 봤나?
주기락
생각할 것도 없어.
너희 제안에는 관심 없다고 이미 말했잖아.
전화 너머에서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가라앉은 목소리에 섬뜩한 적의가 실렸다.
???
3684. 네 사명을 잊지 마라.
주기락
그건 너희가 내게 요구한 일이지, 내 사명이 아니야.
그 말을 끝으로 주기락은 전화를 끊었다.
푸른 눈동자 깊은 곳에서 거센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주기락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눈에는 오직 냉담한 기색만이 남아 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에도 은빛 서리가 스며들었다.
그는 낡은 건물의 어두운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라갔다.
허물어져 가는 창가에 다다르자 그가 찾던 사람이 보였다.
짙은 녹색 머리의 청년은 조용히 다가오는 발소리를 알아차리고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그 청년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던 꼬맹이는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헬리오스
지난번 등대에서 너한테 주기로 약속한 데이터는 전부 가져왔어.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41-9 눈앞에 가득한 별빛 (满目星河)
그날 이후로 매일 출퇴근할 때마다 백기와 블랙이는 내가 고개만 돌리면 바로 볼 수 있는 곳에 나타났다.
그가 데려다주고 지켜 준 덕분인지, 며칠 동안은 더 이상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백기의 말대로 앞으로는 나를 노리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GR, BLACK SWAN, 어쩌면 양기준까지……
맞다, 샤오위에는? 그 사람도 앞으로 무슨 행동을 취하지 않을까……
흉악하거나 음침하거나 오만한 얼굴들이 머릿속을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아직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이 숨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유연
……
순간 밀물처럼 피로가 몰려와 머릿속의 어두운 얼굴들을 모조리 삼켜 버렸다.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 사이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퍼져 나갔다.
나는 백기의 넓은 등에 몸을 기댄 채 나도 모르게 그를 조금 더 꼭 끌어안았다.
내 불안을 알아차린 듯 백기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백기
왜 그래?
유연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선배가 요 며칠 저 데려다주느라 자기 일도 못 했을 텐데,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백기
……
내가 대충 둘러댄 말에 백기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오토바이가 갑자기 속도를 높이며 집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유연
어?
예정된 길을 벗어난 우리는 길게 뻗은 도로를 따라 어두운 밤의 끝을 향해 달렸다.
도시의 소란스러운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오토바이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산 정상에 도착하자 백기는 오토바이를 세우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가 산꼭대기에서 풍경을 보여 주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발밑이 가벼워지더니 몸이 둥실 떠올랐다.
오랜만에 느끼는 공중에 떠 있는 감각에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나는 백기에게 미소 지었다.
유연
오늘도 하늘 산책하러 온 거예요?
백기
오늘은 산책 안 해.
그냥 별만 볼 거야.
그는 내 손을 잡고 고개를 들어 더욱 높은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밤하늘은 손만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웠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별들이 은하수처럼 찬란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때 백기가 갑자기 내 손을 놓았다.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여전히 허공에 안정적으로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더없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나를 공중에 부드럽게 떠받치고 있었다.
백기는 편안한 자세로 허공에 드러누웠다.
그가 무척 편안해 보이기에 나도 그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며 '누웠다'.
눈앞 가득히 은하수가 펼쳐졌다.
끝없이 넓은 하늘과 땅 사이에 몸을 맡기자 조금 전까지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함도 한 줄기 산들바람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깊이 숨을 내쉬고 옆에 있는 백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 몸도 이 광활한 밤하늘에 녹아드는 모습을 상상했다.
유연
지난번에 선배가 별을 보여 줬던 곳은 이 산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유연
선배는 별 보기 좋은 곳을 어떻게 이렇게 많이 알아요?
백기
학교 다닐 때 야간 자율학습을 몇 번 빠진 적이 있거든.
그때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별이 가장 밝게 보이는 곳을 찾았어.
유연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았어요?
백기
응. 도시에서는 별이 잘 안 보이니까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
백기
누가 올려다보더라도 내가 조금 더 높이 날면 발견하기 힘들고.
그 광경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백기
여기는 얼마 전에 발견했어.
그때 맡았던 임무가 결과가 좋지 않아서 고진이랑 다른 녀석들이 억지로 쉬라고 내보냈거든.
그런데 잠도 안 오고 해서 한밤중에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찾았지.
백기
여긴 정말 탁 트여 있어.
마치 은하수에 누워 있는 기분이 들어.
백기
어디로 가든 아무도 날 막지 못할 것 같고…… 자유로워.
유연
자유라……
나는 그 단어를 나지막이 되뇌며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 드넓은 세계가 내게는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나는 언제쯤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몸속의 CORE가 힘차게 뛰는 심장과 같은 박동으로 움직였다.
마치 그런 꿈을 꾸는 나를 소리 없이 비웃는 것 같았다.
백기
유연아, 만약……
백기
유연아?
백기가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유연
……잠깐 딴생각을 했어요.
뭐라고 했어요?
백기의 눈에는 조금 난감한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내가 미처 이해할 수 없는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백기
내 말은…… 만약 그 힘이 없었다면, 넌 더 자유로웠을 것 같아?
유연
네? 선배가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요?
선배답지 않게.
백기
요 며칠 네가 행복해 보이지 않았거든.
백기
아니, 생각해 보면 네가 행복해하는 순간 자체가 너무 적어.
그게 마음 아파.
그는 내가 애써 유지하던 태연한 모습을 너무도 솔직하게 꿰뚫었다.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나는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유연
생각해 봤어요. 아주 여러 번요.
유연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CORE를 찾아다녔던 거예요.
CORE만 찾으면 제가 원하던 삶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유연
그렇게 찾고 또 찾았는데…… 결국 그 수수께끼의 답이 저 자신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보이지 않는 두 손이 나를 하나의 원 안에 가둔 것 같았다.
끝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곳이 또 다른 시작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걸어도 내가 가고 싶은 곳에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연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게 됐어요……
백기
그런데 나는 아직도 그런 꿈을 꾸고 있어.
백기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들어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백기
나는 자주 바라.
네가 그저 행복한 여자아이였으면 좋겠다고.
백기
매일 회사 일 때문에 고민도 하고,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러 다니기도 하면서 말이야.
백기
네 주변에 위험한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늘 두려워.
이 세상의 모든 위험이 너를 피해 갔으면 좋겠어.
그는 내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밤하늘의 별들보다 더욱 찬란한 작은 빛들이 어려 있는 듯했다.
백기
하지만 유연아.
가끔은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더라도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있어.
유연
……제가 정말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백기
그럼.
넌 세상을 두 번이나 구한 사람이잖아.
그의 대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순간 몸을 짓누르던 거대한 산의 무게를 누군가 함께 짊어져 준 것만 같았다.
나는 가슴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연
그렇지만 지금은 제 주변에 도사리는 위험이 더 많아졌는걸요.
백기
괜찮아. 내가 더 강해질게.
백기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나는 언제나 네 힘이 되어 줄 거야.
유연
선배, 왜 갑자기 맹세라도 하는 것처럼 말해요……
백기의 확신에 찬 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조금 부끄러워져 그의 손을 붙잡고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다.
머리 위에서 백기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내 턱을 살살 간질였다.
백기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너도 맹세 하나쯤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유연
싫어요…… 저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들어 백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유연
선배, 저도 강해질 수 있게 도와줘요.
41-10 특훈 (特训)
내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답하겠다고 했으니, 백기가 거절할 리 없었다.
그는 나를 위해 가벼운 훈련 계획을 세웠다.
체력 단련과 격투 훈련뿐만 아니라 사격 실력까지 다시 다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사격장에서 몇 차례 특훈을 받고 나니 실제로 명중률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이날도 사격장 입구에 도착하자 일찌감치 나를 기다리고 있는 백기가 보였다.
백기
왜 이제 와? 길이 막혔어?
유연
아니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유연
어제 격투 수업이 너무 힘들어서…… 오늘 아침에는 도저히 못 일어나겠더라고요.
그래서 10분만 더 누워 있었어요……
내가 불쌍한 목소리로 변명하자 백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내 손을 잡아당기더니 팔을 가볍게 주물러 주었다.
백기
그럼 오늘은 하루 쉴까?
우리 그냥 놀러 갈래?
유연
노노노! 아직 포기하겠다는 말은 안 했거든요!
유연
백 교관님, 설마 경찰학교에서도 교육생들을 이렇게 느슨하게 가르치는 건 아니겠죠?
백기
걔들은 특별 대우받을 자격이 없지.
백기
그럼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힘들어지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유연
네!
유연
오늘은 몇 번 사격장에 가요?
백기
2층 3번 사격장.
막 계단을 올라가려던 참에 옆쪽 엘리베이터에서 카트를 밀고 나오는 직원 두 명이 보였다.
나는 카트 위에 놓인 점검 도구 상자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유연
위층 사격장들은 아직 점검이 안 끝났어요?
백기
응. 듣기로는 원래 오늘 사격장을 운영하지 않을 예정이었대.
그런데 내가 미리 예약해 둬서 이용할 수 있는 거야.
과연 평소라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3번 사격장에는 오늘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백기는 탄창과 방음 헤드셋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차가운 금속 탄창을 끼워 넣고 안전장치를 풀어 장전했다.
금속이 맞물리는 경쾌하고 단정한 소리가 울렸다.
반대편의 백기는 나보다 더 빠르게 탄창을 장착했다.
이미 두 손으로 총을 들어 올린 그의 어깨와 목, 등에는 단단하고 힘 있는 선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별다른 조준 동작도 없이 가볍게 몇 발을 쏘았다.
탄환은 단 한 발도 빗나가지 않았다.
유연
역시 백 경관님!
백기에게는 물 마시는 것만큼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백기는 미소를 지으며 총을 내렸다.
그때 외투 아래로 그가 평소 사용하는 권총집이 보였다.
유연
선배, 오늘은 왜 개인 총까지 가지고 왔어요?
백기
요즘 GR이랑 기계 상자 사건을 추적하고 있어서 특파팀 전체가 비상근무 중이거든.
평소에도 총기를 휴대할 수 있도록 허가가 났어.
나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자세를 안정적으로 잡고 총을 들어 올렸다.
눈앞의 표적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방음 헤드셋을 거쳐 둔탁하게 들려오는 총성과 함께 강한 반동이 전해졌다.
엄지와 검지 사이가 살짝 얼얼해졌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탄환은 표적의 7점 구역에 정확히 꽂혀 있었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자세를 조금 고쳐 잡고 연달아 몇 발을 더 쏘았다.
대부분의 탄환이 표적 중심부 근처에 명중했다.
유연
어때요? 며칠 연습한 보람이 있죠?
나는 의기양양하게 백기를 바라보았다.
그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백기
확실히 잘하네.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겠어.
바로 다음 순간, 눈앞의 표적이 불규칙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연
……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다시 총을 들어 올렸다.
표적은 겉보기에 그리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조준하려고 할 때마다 절묘하게 위치를 바꿨다.
연달아 몇 발을 쏘았지만 겨우 세 발만 명중시킬 수 있었다.
유연
으으, 분해……
정확하게 조준하려고 애쓸수록 탄환은 오히려 표적 중심에서 멀어졌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성취감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
속상한 마음에 방아쇠에서 손을 떼려던 순간, 등 뒤로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두 팔이 양옆에서 뻗어 나오더니 내 손목을 안정적으로 받쳐 주었다.
백기
총을 쥐는 자세부터 고쳐 봐.
팔을 들어 올릴 때 바로 목표를 겨눠야 해.
눈으로 쫓아가면서 조준을 수정하려고 하지 말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표적이 움직이는 순간 정확하게 총구를 맞추고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이 표적 정중앙에 명중했다.
그의 자세는 나를 거의 완전히 품에 가두고 있었다.
크고 든든한 손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 상태로 몇 발을 더 쏘았고, 탄환은 매번 정확하게 명중했다.
나도 그의 속도를 따라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등에 닿는 따뜻한 온기와 이따금 관자놀이를 스치는 숨결 때문에 정신이 자꾸 엉뚱한 곳으로 달아났다.
백기
힘들어?
백기가 예고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몰래 그를 훔쳐보던 내 시선이 그대로 그의 눈과 마주쳤다.
유연
아, 아니요!
그냥 선배가 시범 보여 주는 걸 보니까 이제 좀 감이 잡힌 것 같아서요!
백기
그래……?
백기는 붉어진 내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말끝을 길게 늘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장난기 어린 입맞춤이 내 관자놀이에 내려앉았다.
백기
그렇게 자신 있다면, 이제 교육생이 교관에게 배운 성과를 보여 주시죠.
유연
……알았어요!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졌다.
나는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다시 눈앞의 표적을 겨누었다.
방금 백기가 보여 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떠올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
얼마나 오래 사격했을까.
팔이 뻐근해지기 시작할 무렵, 몸이 조금씩 움직임의 요령을 익혀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화면에 표시된 명중률은 여전히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연
이건 너무 어려워요.
아무래도 백 코치님께 몇 번 더 배워서 확실하게 익혀야겠는데요?
백기
문제없어. 내가 있잖아.
반드시 제대로 배울 수 있게 해 줄게.
백기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지는 마.
이런 동작은 정식 경찰도 효과를 보려면 오랫동안 연습해야 하거든.
유연
그럼 작은 목표를 하나 세워야겠어요.
훈련을 마칠 때쯤에는 백 경관님이 안심하고 등을 맡길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었으면 좋겠어요.
백기
난 지금도 너한테 안심하고 등을 맡길 수 있어.
그의 목소리는 경쾌했다.
마치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맑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정확히 마음 한가운데에 닿은 듯했다.
유연
그럼 저도 더 열심히 해서 실력을 키워야겠네요~
백기
큼, 그렇게까지 잘할 필요는 없어.
네 힘으로 해결하기 어렵겠다 싶으면 그냥 내 이름을 불러.
밖을 보니 어느덧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
우리는 간단히 장비를 정리하고 사격장을 나설 준비를 했다.
오늘은 예약한 사람들만 받았기 때문인지, 3번 사격장에는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건물 밖에서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와 백기의 대화 소리, 발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직원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절반쯤 내려왔을 때, 나는 망설이다 걸음을 멈췄다.
유연
선배…… 지금 사격장이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
백기
……내 곁에 바짝 붙어 있어.
우리는 서둘러 출입구로 향했다.
유리문 너머는 마치 검은 안개가 한 겹 드리워진 것처럼 기묘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백기가 문을 밀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연
선배, 이게 대체……
백기는 미간을 깊이 찌푸리며 문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백기
우리, 여기에 갇힌 것 같아.
언제부터인지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로비 위쪽에서 '연모시 사격장'이라고 적힌 간판이 기묘하게 두 번 깜빡였다.
41-12 그림자 (暗影)
백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채 이해하기도 전에, 그는 옆에 놓인 공구함에서 망치를 꺼내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유리창을 힘껏 내리쳤다. 엄청난 굉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리 두꺼워 보이지도 않는 유리는 꿈쩍하지 않았다.
금 하나조차 생기지 않았다.
유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백기
여긴 진짜 사격장이 아닐지도 몰라.
일종의 이공간일 가능성이 있어.
마지막 세 글자를 듣자 나도 모르게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공간에 휘말리는 일이라면 이미 지겹도록 겪어 봤다.
유연
설마 지난번에 저를 선로로 밀어 떨어뜨린 GR 사람들이 그걸로도 부족해서, 이번에는……
백기
당황하지 마.
백기는 나를 안심시키듯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백기
우선 Evol로 이 공간을 부술 수 있는지 시험해 볼게.
백기는 나를 품에 안고 팔에 살짝 힘을 주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듯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우리는 여전히 땅 위에 서 있었다.
백기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경계심이 어린 그의 얼굴에 드물게 놀란 기색이 스쳤다.
백기
……Evol이 안 써져.
유연
?!
나도 서둘러 내 능력을 확인해 보았다.
CORE는 여전히 내게 반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지 능력은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발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초조하게 백기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그는 미간을 깊이 찌푸린 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백기
이 느낌, 어쩐지……
유연
왜요? 뭔가 알아냈어요?
백기
아직 확실히 말하기는 어려워.
백기
지금 느끼기에는 능력이 사라졌다기보다…… 예전에 NW에서 특훈받을 때 겪었던 Evol 억제 훈련과 비슷해.
백기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백기
아무튼 우선 사격장 안에 다른 단서가 없는지 찾아보자.
나는 백기의 곁을 따라다니며 1층부터 사격장 곳곳을 꼼꼼히 살폈다.
복도 하나를 돌아 나올 때였다.
문득 벽 모퉁이에 쌓인 잡동사니가 드리운 그림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잡동사니를 확인했다.
그런데 눈을 깜빡이는 사이, 바닥에 납작하게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기묘한 곡선을 그리며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를 향해 덮쳐 왔다.
백기
——!
백기는 재빨리 나를 잡아당겨 피하게 하고, 몸을 돌려 그림자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마치 블랙홀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그림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백기의 팔 전체가 검은 그림자 속에 잠겼다.
그의 얼굴빛이 변했다.
백기는 서둘러 팔을 빼냈지만, 방금 그림자에 잠겼던 부위의 피부는 다른 곳보다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유연
선배, 괜찮아요……?!
백기
괜찮아—— 조심해!
백기가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거의 동시에 바닥에 드리워진 모든 그림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빛에 의해 생겨난 그림자들이 마치 유령처럼 우리를 에워쌌다.
백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내 손을 잡아끌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백기
뛰어!
조명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사물들이 드리운 그림자는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변해, 앞다투어 우리를 향해 덮쳐 왔다.
백기는 나를 이끌고 집요하게 달라붙는 그림자들을 날렵하게 피하며 계단을 뛰어올랐다.
계단 모퉁이를 막 돌아선 순간, 갑자기 그림자 한 줄기가 내 손목을 휘감았다.
차갑고 미끈거리는 뱀의 비늘이 피부에 닿은 것 같았다.
음산한 전류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유연
……!
나는 황급히 손을 빼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백기와 마찬가지로 피부에 잿빛 흔적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유연
대체 이 그림자들은 뭐죠?
백기
무슨 괴상한 것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닿지 않게 조심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를 악물며 백기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달렸다.
2층 앞쪽에도 그림자가 빽빽하게 몰려 있었다.
그런데 어지럽게 일렁이는 그림자들 사이에 한 군데 빈틈이 보였다.
바로 불이 꺼진 방이었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도 생긴다.
그렇다면 빛이 없는 곳에서는?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한번 걸어 보기로 했다.
유연
선배, 저기 불 꺼진 방으로 가요!
백기는 창고 쪽을 한번 바라보더니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방향을 틀었다.
우리가 안으로 뛰어드는 순간, 그는 거침없이 문을 걷어차 닫고 잠금장치를 단단히 걸었다.
문이 닫히자 방 안은 손을 뻗어도 손가락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해졌다.
나는 백기의 가슴팍에 꼭 안긴 채 우리의 거친 숨소리와 쿵쾅거리는 내 심장 소리만 듣고 있었다.
혹시 내 짐작이 틀렸을까 봐 온몸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1분, 2분……
하지만 더는 그 음산하고 차가운 감각이 덮쳐 오지 않았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어둠 속에서 백기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백기
판단이 빨랐어.
특파팀에 와서 특수작전 지휘를 보조해도 되겠는데?
유연
진짜 지휘관 앞에서 제가 감히 아는 척을 할 수 있나요.
나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익숙한 온기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곰곰이 생각했다.
유연
이것도 설마 CORE를 노리고 만든 함정일까요?
백기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야.
나를 노린 걸 수도 있어.
백기
사실 요즘 GR을 추적하는 건 특파팀뿐만이 아니야.
NW도 은밀하게 GR 사람들을 처리하고 있어.
NW의 동향을 듣지 못한 지 꽤 오래됐기에 나는 잠시 놀랐다.
유연
NW가 왜 GR을 처리하는 거죠?
두문은 이미 그 사람들한테……
백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어.
하지만 샤오위에가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아.
백기
17년 전에도,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 사람은 NW에 상당히 중요한 인물인 모양이야.
그래서 샤오위에보다 먼저 찾아내려고 해.
백기가 샤오위에와 누가 먼저 그 사람을 찾느냐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유연
그 사람이 GR의 고위 간부인가요?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해 줄 수 있어요?
어쩌면 제가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백기
나도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 다만……
백기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유연
왜요?
백기
잠깐만. 뭔가 발견한 것 같아.
백기는 내 손을 잡고 발소리를 죽이며 방 반대편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 가고 나서야 정면의 어둠 속에 작은 초록색 불빛이 깜빡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떤 기계의 표시등처럼 보였다.
백기
……역시 그랬군.
백기
내가 Evol을 쓰지 못했던 건 이 억제 장치가 사격장 전체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야.
유연
잘됐네요!
그럼 이 기계만 끄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예요?
백기
내 기억이 맞는다면, 예전에 NW에서는 내 Evol을 완전히 억제하려면 이런 장치가 최대 출력으로 두 대나 필요했어.
백기
지금이라면 적어도 네 대는 있어야 할 거야.
유연
그럼 사격장 전체에 이런 억제 장치가 세 대 더 있다는 뜻이에요?
백기
응. 오늘 정비 신청이 들어온 사격장이 1번, 7번, 10번이었던 걸로 기억해.
놈들이 손을 썼다면 그 세 곳일 가능성이 높아.
백기
유연아, 그러니까 넌 먼저……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마주 꼭 잡았다.
유연
다른 방법은 없어요.
저도 선배랑 같이 갈게요.
백기가 가볍게 웃었다.
그는 총을 꺼내 들더니 거의 망설임 없이 어둠 속의 한 지점을 정확하게 겨눠 발사했다.
탕!
총성과 함께 억제 장치의 초록색 표시등이 꺼졌다.
곧바로 보이지 않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거센 바람이 문을 부수고 나가는 동시에, 나와 백기도 바람을 타고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밖에 있던 검은 그림자들은 갑자기 몰아친 바람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림자들이 다시 모여들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왔다.
백기
바짝 따라와.
백기는 1번 사격장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막 계단을 내려선 순간, 뜨거운 열기가 정면에서 밀려왔다.
작열하는 불빛에 눈이 따끔거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거센 바람이 나를 더욱 강하게 뒤로 끌어당겼다.
백기
물러서!
탕!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41-13 잿더미로 향하는 길 (烬头的路)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백기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눈앞에서 잔상이 번쩍였다.
백기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내 뒤에 있던 그림자를 정확히 걷어찼다.
찰나의 순간, 무언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더니 옆에 있던 소화전의 유리를 산산조각 냈다.
주변 사격장은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가 멀지 않은 그림자 속에서 손 하나가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방금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간 게…… 총알이었다고?!
기습에 실패한 것을 깨달은 상대는 곧바로 그림자 속으로 숨어 버렸다.
백기
누군가 그림자 속에 숨어 있어.
유연
선배는 방금 어떻게 알아차렸어요?
백기
직감.
나는 주변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을 경계하며 살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사람보다 백기가 더 걱정됐다.
예전에 특파팀에서 잠입한 첩자를 처리할 때, 백기는 한때 불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내고 상대를 제압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유연
선배, 제가 곁에 있어요.
백기가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보았다.
불빛이 그의 옆얼굴을 붉은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서 빛나는 빛은 불꽃보다도 밝았다.
그곳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백기
알아. 걱정하지 마.
이제는 무섭지 않아.
그 짧은 순간에 깨달았다.
과거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백기는 이미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불길을 배경으로 사방의 검은 그림자들이 뒤틀린 모습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런데 어디로 달려가든 불빛은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붙었다.
유연
아까 그 사람이 이 공간을 만든 사람일까요?
백기
그럴 수도 있어!
어느 그림자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조심해.
백기는 내 손을 잡고 재빨리 몸을 틀어 복도를 돌아 나갔다.
그때 갑자기 무언가를 감지한 듯 얼굴빛이 변했다.
그는 곧바로 총을 들어 그림자 하나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고통을 참는 듯한 작은 신음이 들렸다.
그림자 속의 사람을 맞힌 모양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사라졌다.
동시에 우리 주변으로 바람이 일어났다.
백기는 손에 들고 있던 총을 몰래 내 손에 쥐여 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기
여기에 총알이 네 발 남아 있어.
놈이 다시 나타나면 내가 끌어낼 테니까, 넌 남은 장치들을 파괴해.
백기
앞으로 가서 4층으로 올라가면 7번과 10번 사격장이 있어.
하나는 남쪽, 하나는 북쪽이야.
유연
알겠어요……
나 역시 지금은 흩어져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은 적을 상대하고, 다른 한 사람은 기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하지만 백기의 Evol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적과 정면으로 맞붙어도 정말 괜찮을까?
내 걱정을 알아차린 듯 백기가 입꼬리를 올렸다.
백기
이런 훈련은 예전에 NW에서 지겹도록 해 봤어.
억제 장치가 두 대 더 늘어난다고 해도 겁날 건 없어.
그의 단호한 눈빛에는 걱정이나 망설임이 조금도 없었다.
그 안에서 반짝이는 눈부신 빛을 보며 나는 그가 말하지 않은 뜻까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네게 등을 맡길 테니, 너도 안심하고 내게 등을 맡겨.
한 줄기 거센 바람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바람은 불빛 아래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들을 흩뜨리며 내가 지나갈 길을 열어 주었다.
백기
지금이야!
백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몸을 돌리며 그림자 하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그림자 속에서 사람 하나를 끌어내더니 바닥에 짓눌렀다.
나는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망설임마저 사라졌다.
곧바로 몸을 돌려 계단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스쳐 지나갈 때 백기가 몰래 건네준 총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북소리처럼 빠르게 뛰었다.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해 준 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 등을 돌린 채 각자의 길로 나아갔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백기는 반드시 그 사람을 이겨 낼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백기가 안심하고 싸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소녀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백기는 자신이 목을 움켜쥐고 바닥에 제압한 남자를 날카롭게 내려다보았다.
불빛 속에서 그 얼굴을 똑똑히 본 순간, 어딘지 모르게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서 본 얼굴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백기
너, GR 소속이야?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꼬리에 싸늘한 미소를 걸더니 손날을 세워 백기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백기는 이미 경계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펼친 역제압 기술에는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동작은 백기에게 매우 익숙했다.
NW 대원이라면 누구나 배우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백기는 자신이 NW에서 이 남자를 본 적이 없다고 확신했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백기의 움직임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상대를 제압하는 데 실패하자 그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아직 자세를 바로잡지 못한 남자의 오른쪽 발목을 재빠르게 공격했다
남자는 몸을 뒤집으며 공격을 피했다.
그 민첩한 움직임을 보고 백기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이 남자는 분명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
넌 그 사람과 많이 닮았군.
남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가에는 세월이 남긴 주름 몇 줄이 새겨져 있었고,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과 깊은 이목구비에는 음울하면서도 잔혹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어째서인지 백기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다시는 만날 수 없고, 영원히 마음속에서 떨쳐 낼 수도 없는 사람.
???
너도 그 사람처럼 '최강의 병기'가 반드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백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상대를 날카롭게 살폈다.
백기
넌 대체 누구지?
NW에 관한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
나는 그 사람을 제외하면 '최강의 병기'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백기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곧 남자가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불빛조차 눈동자 깊숙이 서린 냉기를 녹일 수 없을 만큼 차가운 표정이었다.
백기
……너, 백혼을 아는군.
남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꿈틀거리는 검은 그림자들을 조종해 백기를 겹겹이 에워쌌다.
백기가 일으킨 바람이 눈앞의 그림자들을 흩어 버렸다.
그는 바람의 칼날을 두른 채 불길 사이를 가로질러 남자에게 돌진했다.
남자는 자신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검은 바람의 칼날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기괴한 냉소를 지었다.
백기의 동공이 순간 수축했다.
눈앞의 남자가 어느새 새까만 그림자로 변해 있었다.
미처 물러서기도 전에 사납게 휘몰아치는 검은 그림자들이 그를 집어삼켰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가 팔다리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시야마저 짙은 어둠에 물들었다.
칠흑 같은 정적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
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라.
이것이 바로 백혼이 계산해 낸, '최강의 병기'가 존재하는 미래다.
포효하는 바람이 검은 그림자를 찢어발겼다.
백기는 그 틈을 뚫고 나오려다가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불똥에 눈을 찔린 듯한 통증을 느꼈다.
불길은 여전히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는 더 이상 사격장의 복도가 아니었다.
눈앞에는 불에 타 버린 건물의 잔해와 허물어진 벽들이 펼쳐져 있었다.
사납게 타오르는 불길은 멀리까지 번져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이곳은 백기가 누구보다 잘 아는 장소였다.
연모시.
거센 불길이 내 발걸음을 따라 계단을 타고 번져 올라왔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백기가 알려 준 장소를 향해 달렸다.
계단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불길이 정면으로 덮쳐 왔다.
미처 피하지 못한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팔 전체에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큰일 났다!
나는 황급히 바닥에 몸을 굴렸다.
그런데 다시 일어났을 때, 옷소매는 조금도 타지 않은 채 멀쩡했다.
팔에도 화상을 입은 흔적은 전혀 없었다.
유연
어……?
주변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퍼져 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달릴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불길 한가운데 있는데도 산소가 부족해서 숨이 막히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백기와 헤어진 뒤로는 주변에 나타나는 그림자도 줄어든 것 같았다.
움직이는 속도 역시 전보다 훨씬 느려졌다.
유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미처 붙잡지는 못했다.
하지만 방해가 줄어든 덕분에 예상외로 수월하게 남아 있던 억제 장치 세 대를 모두 파괴할 수 있었다.
나는 복도에 나타난 검은 그림자들을 민첩하게 피해 백기를 찾으러 돌아갔다.
그런데 계단 입구에 도착하자 아래쪽이 이미 검은 그림자들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다.
유연
설마 선배가 저 안에 있는 건가?!
나는 서둘러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백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를 악물고 아래로 뛰어들었다.
검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순간, 절망감과 무력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마치 몸속의 생명력이 한 올 한 올 뽑혀 나가는 것 같았다.
두 다리는 한없이 무거워졌다.
더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선배가 이 안에 있다면……
나는 이를 악물고 물러서지 않으려 애썼다.
기분 탓이었을까.
백기를 떠올리자 마음속에서 작은 온기와 용기가 솟아났다.
덕분에 온몸을 파고들던 한기가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그림자를 뚫고 나오자 시야가 갑자기 탁 트였다.
하지만 이곳은 더 이상 사격장이 아니었다.
거대한 도시 하나가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고 있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건물들이 불길에 물들어 있었다.
익숙한 거리에는 폐허가 가득했다.
건물과 도로는 불길에 삼켜지며 서서히 원래의 모습을 잃어 가고 있었다.
유연
여긴…… 연모시?
선배는 어디 있지?!
나는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타는 폐허 한가운데에서 수많은 그림자에 휘감긴 백기를 발견했다.
검은 바람의 칼날과 그림자들이 공중에서 뒤엉키며 서로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Evol이 충돌하며 일으킨 보이지 않는 충격파에 공간 전체가 뒤흔들렸다.
검은 그림자들은 모든 틈새에 몸을 숨긴 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어디 있지?
나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때 시야 한쪽에 백기의 사각지대에서 천천히 '일어서는' 검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림자의 윤곽이 점점 선명해졌다.
마침내 총을 든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새까만 총구가 백기의 등을 겨누고 있었다.
그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유연
선배!!
나는 온 힘을 다해 백기를 향해 몸을 던졌다.
뜨거운 열기가 우리를 집어삼킬 듯 밀려왔다.
바로 그 순간, 무언가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깨에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며 권총을 장전했다.
방금 남은 억제 장치 세 대를 파괴하는 데 총알 세 발을 사용했다.
이제 남은 건 단 한 발뿐이었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이번 한 발은 반드시 명중시켜야 했다.
주변의 모든 풍경이 느려지는 듯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안정시키고 백기가 가르쳐 준 말을 떠올렸다.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부터 총구가 정확히 목표를 향하도록 했다.
불과 몇 밀리초의 차이로도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표적을 정확히 겨눈 순간,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남자가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곧이어 단단한 두 팔이 나를 안정적으로 받아 안았다.
나는 아직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백기의 동공이 크게 수축해 있었다.
그제야 어깨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리는 통증이 선명해졌다.
백기의 시선이 내 어깨에 번진 선명한 핏자국에 닿았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그런 백기의 모습을 보자 심장이 또 한 번 덜컥 내려앉았다.
문득 얼마 전 지하철역에서도 그가 이처럼 낯선 표정을 지었던 것이 떠올랐다.
분명 익숙한 얼굴인데, 어쩐지 내가 알던 백기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를 중심으로 거센 바람이 폭발하듯 퍼져 나갔다.
떨어지는 돌덩이들이 바람의 칼날에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그 칼날들이 곧장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저대로라면 남자는 틀림없이 갈기갈기 찢겨 버릴 것이다!
유연
선배!! 멈춰요!!!
검은 바람의 칼날이 남자의 눈앞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잘게 나뉜 바람의 칼날들 역시 무너져 가는 검은 그림자들에 간신히 가로막혔다.
백기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의 눈에 서렸던 살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가득 찬 감정이 금방이라도 떨려 나올 듯했다.
백기
유연아……
나는 그에게 대답하는 대신 힘껏 끌어안았다.
???
이것이 바로 '최강의 병기'가 탄생한 뒤에 일어날 것으로 예측된 미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백기를 향하는 듯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눈빛에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
???
NW 계획은 존재해서는 안 됐다.
그리고 너는—— 더더욱 존재해서는 안 돼!!
???
그는 분명 이런 세상이 오리라는 걸 계산해 놓고도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어.
설마 저런 세상이야말로 자신이 끝까지 관철해야 할 '정의'라고 생각했던 건가?!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분노의 외침이 거대한 바위처럼 백기의 마음을 강타했다.
나는 그의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리는 것을 느꼈다.
계산으로 예측된 세계……
그게 지금 불타고 있는 이 연모시라는 걸까?
겹겹이 쌓인 검은 그림자들이 남자를 엄호하듯 우리 쪽으로 몰려왔다.
하지만 수많은 바람의 칼날이 그림자들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남자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검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백기
거기 서!
그러나 불길 속에서 남자의 모습은 이미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그때 주변의 진동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공간 곳곳에 갑자기 수많은 균열이 생겨났다.
41-15 바람의 뒷모습 (风的背影)
무언가가 연달아 깨지는 소리와 함께 우리 주변에 생긴 균열이 점점 늘어났다.
유연
선배, 장치는 전부 파괴했어요.
그런데 여긴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백기
그냥 환각일 뿐이야.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조금 전 사람을 태우지 않던 불길을 떠올리고, 이곳에 있을 리 없는 풍경을 다시 한번 둘러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백기
무서워하지 마. 내가 데리고 나갈게.
그는 눈을 내리깔며 모든 피로를 눈동자 깊숙이 가라앉혔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 눈앞까지 들어 올렸다.
피부에 남은 핏자국들이 유난히 선명했다.
백기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내 손가락 사이로 끼워 넣고 부드럽게 맞잡았다.
백기
유연아, 나한테 힘을 좀 줘.
나는 그의 손을 더욱 꼭 움켜쥐었다.
오직 그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에서부터 끊임없이 가슴으로 전해졌다.
우리를 에워싼 바람이 다시 한번 거센 파도처럼 솟구쳤다.
휘몰아치는 폭풍이 점점 넓게 퍼져 나가자 주변 공간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백기의 에너지장이 한층 강해지면서 마침내 공간이 그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거대한 Evol 바람의 장이 공간을 뚫고 나갔다.
환각으로 만들어진 세계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공중에서 흩날리다 사라졌다.
주변은 다시 사격장의 어두컴컴한 복도로 돌아왔다.
폐허가 된 연모시도, 불에 탄 흔적도 어디에도 없었다.
유연
선배, 괜찮아요?!
나는 다급하게 백기의 팔을 붙잡고 그의 몸을 위아래로 살폈다.
큰 부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 일을 물어볼 생각이 났다.
유연
그런데 선배는 아까 그게 환각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차렸어요?
백기
정말 불길이 있었다면 우릴 태워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상대는 굳이 그림자로 공격했잖아.
그건 불길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유연
하지만 파괴된 장치의 잔해는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렇다면 기계와 총알은 진짜였다는 거네요.
백기
내 Evol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도 놈이 조종하던 환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놈이 다치면서 능력에도 영향이 생긴 거지.
나는 바닥에 흩어진 기계 잔해를 생각에 잠긴 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유연
그런데 아까는 왜 제 힘이 필요했던 거예요?
저는 능력을 사용했다는 느낌도 없었는데요.
백기는 미소 지으며 내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백기
내게 필요했던 건 여기에서 나오는 힘이야.
백기
놈이 만든 검은 그림자는 두려움을 먹고 강해져.
마지막에 그놈이 보여 준 광경에는…… 솔직히 나도 조금 흔들렸거든.
그 말을 듣자 문득 백기와 헤어진 뒤 움직임이 둔해졌던 그림자들이 떠올랐다.
그때 그림자들이 약해진 건 아마 백기가 내게 용기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그림자들은 마음속 두려움에서 생겨난 걸까?
나는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불타던 연모시를 떠올렸다.
유연
그런데 아까 그 연모시는 대체—— 아야!
몸을 움직이다가 어깨의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백기는 내 팔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상처를 살펴보더니 조심스럽게 내 허리를 감싸 안아 들어 올렸다.
백기
병원 가자.
유연
저기, 선배…… 다친 건 어깨지, 뼈가 부러진 건 아닌데요……
하지만 나를 안은 백기의 팔은 부드러우면서도 거절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단호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사격장을 빠져나왔다.
주변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백기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밤하늘이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더 이상 어색해하지 않고 온몸의 힘을 풀어 그의 품에 편안하게 기댔다.
백기
피곤하면 좀 자.
차가운 바람은 눈치라도 있는 듯 우리를 피해 '돌아갔다'.
늦겨울 밤하늘에 춥지 않은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백기의 뜨겁고 힘찬 심장 박동을 느끼고 있으니 몸도 마음도 완전히 편안해졌다.
그러자 조금씩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하지만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다.
깊은 잠에 빠져들기 직전, 머리 위에서 희미하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백기
임무 완료.
의식이 흐려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무전용 이어폰을 착용하지 않은 그의 귀와, 담담하면서도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백기가 병원에 데려다준 뒤 나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반듯한 모습의 사람이 보였다.
나른한 햇살이 그의 머리카락 끝에 흐릿한 빛무리를 만들고 있었다.
정수리에는 장난스럽게 뻗친 머리카락 한 가닥이 삐죽 솟아 있었다.
백기
일어났어? 상처는 안 아파?
그는 한쪽 팔을 뻗어 내 상처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몸을 일으켜 앉혀 주었다.
그의 눈에 잠깐 스친 자책감을 보고 나는 미소 지었다.
유연
조금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선배를 지켜 줬다는 증거인걸요!
백기의 눈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는 이마를 살며시 내 이마에 맞댔다.
서로의 숨결이 다정하게 뒤섞였다.
바로 눈앞에 있는 호박색 눈동자에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반짝이는 듯했다.
유연
선배, 어제 제가 그 기계들을 파괴하지 못했거나 중간에 검은 그림자에 갇혔다면 어쩌려고 했어요?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백기
생각했어. 하지만 널 믿으니까 걱정하지 않았어.
난 안심하고 너한테 등을 맡길 수 있고, 너를 지킬 자신도 있으니까.
백기
그러니까 넌 마음껏 앞으로 나아가면 돼.
어제 내게 총을 건네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말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백기
게다가 넌 이미 여러 번 날 지켜 줬잖아.
나지막한 한마디가 가볍게 마음속에 내려앉았다.
그 여운이 물결처럼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나는 눈앞의 이불을 움켜쥐고 손끝에 살짝 힘을 주었다.
아직 부족해.
나는 선배를 조금 더 지켜 줄 수 있어.
불길 속에서 그 남자가 떠나기 전 백기를 바라보던 잔혹한 눈빛을 떠올리자 여전히 등골이 서늘했다.
병실 안은 무척 조용했다.
복도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는 문밖에 가로막혀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중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들이 햇살을 받아 금빛 가루처럼 반짝였다.
나는 살짝 눈을 들었다.
그러자 조금 전부터 한순간도 내게서 떠난 적 없는 시선과 마주쳤다.
유연
선배.
백기
유연아.
우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동시에 멈칫했다.
그의 눈빛을 보니 어쩌면 같은 이야기를 꺼내려던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먼저 말하라는 뜻으로 눈짓했다.
백기
어제 우리를 공격한 놈은 아마 나를 노렸던 것 같아.
그러니까 당분간은 너한테 손대지 않을 거야.
유연
그 사람이 어제 선배가 말했던 그 사람인가요?
샤오위에와 선배가 모두 찾고 있다는 사람요.
백기
그럴 가능성이 커.
지금도 계속 조사하고 있어. 그래서……
백기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눈에 반드시 해내겠다는 결의가 스쳤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고 눈을 깜빡였다.
유연
이제 떠날 거예요?
백기
응. 최대한 빨리 그 사람을 찾아낼 거야.
유연아, 며칠 동안은 특히 조심해야 해.
백기는 어제 보았던 불타는 연모시에 대해서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광경에 숨겨진 진실을 반드시 직접 찾아낼 것이다.
유연
걱정하지 마요.
선배가 직접 가르쳐 준 사격 실력이 제 곁에서 저를 지켜 줄 테니까요.
백기가 웃었다.
그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햇살이 부드러운 빛으로 녹아들었다.
백기
고진한테도 미리 이야기해 뒀어.
그동안 무슨 일 생기면 고진을 찾아가.
백기
그리고 내 걱정도 하지 마.
나도 내 몸은 잘 지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