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백기 생일 프롤로그
유연
……응, 20분 31초쯤에 나오는 성운 입자 특수효과는 조금 더 손봐야 할 것 같아. 지금은 아직 자연스럽지 않아.
유연
질감을 조금 더 거칠게 표현하고, 광원 효과의 채도도 너무 높이지 않는 게 좋겠어.
유연
그리고 옥에 티가 몇 군데 더 있는데,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놨어요. 후반 작업팀에 다시 한번 확인해 달라고 해주세요.
나연 언니와의 통화를 마친 나는 방금 확인했던 영상 파일을 다시 열어 재생했다. 은하수의 전경이 화면 속에서 서서히 펼쳐졌다——
한창 화면 속 장면에 빠져 있던 그때, 현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노트북을 덮고 슬리퍼를 끌며 뛰어나갔다.
유연
왔어요!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나를 향해 활짝 벌어진 백기의 품에 정확히 뛰어들었다.
그의 몸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머금은 열기가 아직 남아 있었고, 콧잔등에도 자잘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듯했다.
백기
후—— 밖에 진짜 덥다.
유연
그러게. 안아보니까 백 경관님 몸도 평소보다 조금 더 뜨거운걸.
귓가에 닿은 그의 가슴팍에서 나지막한 웃음의 진동이 전해졌다. 이내 그보다 더 뜨겁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 이마에 살며시 닿았다.
백기
맛있는 거 좀 사 왔어. 일단 ‘심부름값’부터 받을게.
그제야 백기가 무심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비닐봉지에서 냉기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봉지를 열어보니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유연
와! 이렇게 많이 샀어? 이번 주는 아이스크림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겠다!
백기
응.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서 전에 네가 먹고 맛있다고 했던 건 전부 사 왔어.
나는 그중 두 개를 골라 선배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마침 영화 채널에서는 하반기 개봉 예정작들의 예고편이 나오기 시작했다. 저마다 다른 분위기와 개성을 뽐내는 인상적인 장면들은 마치 곧 다가올 여름 극장가의 황금기를 차지하려 경쟁하는 듯했다.
백기
그러고 보니 우리, 같이 영화 보러 간 지 꽤 오래되지 않았어?
유연
그러게. 요즘 볼 만한 영화가 있으려나……
그렇게 말하던 중 화면이 갑자기 전환되더니, 우주선 한 대가 목성을 향해 날아가는 장면이 나타났다.
——바로 내가 최근까지 후반 작업을 서둘러 진행하고 있던 우주 영화의 티저 예고편이었다.
백기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도 잠시 움직임을 멈춘 채 화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30여 초의 예고편이 금세 끝나자 백기는 웃으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백기
이거 괜찮아 보이는데. 다만 개봉하려면 아직 석 달이나 기다려야 하네. 그때 같이 보러 가자.
유연
그럼, 당연히 같이 보러 가야지~
——사실 석 달이나 기다릴 필요는 없지만.
나는 그 비밀을 마음속에 고이 감춰둔 채 백기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유연
영화가 보고 싶으면 우리 시간 날 때 영화관에 갈까?
백기
며칠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특파팀에서 앞으로 사흘 동안 외부 훈련을 가거든.
백기
그래도 29일 전에는 꼭 제시간에 돌아올게.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그의 미소를 바라보며 나는 그의 손가락을 살며시 잡았다.
유연
기다리고 있을게~
안 그래도 어떻게 해야 백기 몰래 생일을 준비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대로라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았다.
이번 생일 계획으로 백기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 생일 외전
## 01 붙잡을 수 없는 바람
“하나, 둘, 셋, 넷——!”
우렁차고 절도 있는 구호가 드넓은 산길에 울려 퍼졌다.
한여름의 무더위는 해가 저물 무렵에도 조금도 누그러질 기미가 없었다. 땀방울 하나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 눈으로 들어갔다. 백기는 고개를 툭 털었지만 달리던 발걸음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따라붙어! 뒤처지는 놈들은 이따가 추가로 뛴다!”
귓가로 분대장의 다소 쉰 외침이 들려왔다. 백기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바싹 말라 따끔거리는 목을 쥐어짜 대열과 함께 힘껏 구호를 외쳤다.
“명령에 복종한다! 용감하게 전진한다!”
마침내 경찰학교 정문이 시야에 들어오자, 지칠 대로 지쳤던 모두의 발걸음에 다시 힘이 실렸다. 그렇게 오후 훈련은 20킬로미터 군장 달리기를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기진맥진한 신입생들은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짜 식당으로 달려갔다.
백기는 무리 지어 움직이는 사람들을 피해 혼자 식당으로 들어갔다. 땀에 젖어 옷이 흠뻑 달라붙어 있었지만,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 바람을 맞으니 오히려 조금 시원했다.
그는 찐빵 두 개와 반찬 두 가지를 받아 구석진 자리에 틀어박혔다.
피망고기볶음에는 피망이 좀 많았지만, 닭다리는 살이 푸짐했다. 백기는 크게 두 입을 베어 물어 양 볼이 빵빵해질 만큼 입안을 가득 채웠다.
“오늘 저녁엔 반 회의도 없는데, 농구하러 갈래?”
“좋지. 샤오가오까지 끼면 한 명 더 필요한데——”
귓가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백기, 저녁에 같이 농구할래?”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백기는 옆을 한 번 흘끗 바라봤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마지막 찐빵 한 입을 삼키고 식판을 반납대에 올려놓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식당 출구로 향했다.
“려엽, 쟤를 왜 신경 써? Evol 하나 제대로 제어하지도 못하면서 빽으로 들어온 낙하산이잖아. 바쁘신 몸이겠지.”
“너 입 좀 다물어.”
“왜, 말도 못 해? 엊그제 훈련 때도 쟤 Evol 때문에 장비 거치대가 통째로 날아갔잖아. 하마터면 동기들 몇 명 다칠 뻔했다고.”
백기는 등 뒤에서 쏟아지는 비아냥을 발밑에 짓밟듯, 조금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줄곧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경찰학교 부지 안쪽, 산림 깊숙한 곳까지 들어서고 나서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불안하게 요동치는 밤바람이 무심히 대지를 훑고 지나갔다. 그러더니 마치 높은 곳에서 그를 굽어보듯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백기는 두 팔을 벌리고 그 힘을 따라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려 했다.
발끝이 바람을 따라 막 지면에서 떨어진 순간, Evol이 갑작스럽게 균형을 잃었다.
거센 바람이 그의 몸을 옆으로 거칠게 내던졌다. 백기는 나무줄기에 세게 부딪힌 뒤 낙엽 더미 속으로 처박혔다.
“쿵——!”
이런 결과에는 이미 무감각해질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통증조차 마음속에서 들끓는 초조함과 무력감을 덮지는 못했다.
백기는 주먹으로 땅을 세게 내리쳤다.
몸속에서 사납게 날뛰는 바람마저 차갑게 그를 비웃는 듯했다.
이건 그의 기억 속에 있던 그 다정한 바람이 아니었다.
늦가을, 자신을 끌어안아 주었던 그 바람도 아니었다.
석양의 마지막 잔광이 눈부신 불꽃처럼 눈동자 깊숙이 새겨졌다.
백기는 숨을 길게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새로운 돌풍을 끌어모았다.
# 생일 외전
## 02 뒤늦게 찾아온 선물
오른손 손가락 관절에 부딪힌 충격이 아프게 전해졌지만, 백기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주먹을 더욱 세게 움켜쥐고 눈앞에 있는 남자의 광대뼈를 힘껏 내리쳤다.
피와 함께 새하얀 이 하나가 튀어나왔다. 얻어맞은 남자는 잠깐 얼빠진 얼굴로 멈춰 있다가 사납게 백기에게 달려들었다.
“야, 백씨! 이 개XX야!”
덩굴에 휘감긴 왼쪽 발목에서 극심한 통증이 치솟았다.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그대로 몸 전체가 뒤로 잡아당겨졌지만, 백기는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이마로 눈앞에 있는 남자의 콧대를 세게 들이받았다.
“그만 싸워!”
정면에서 강한 반발력이 밀려와 백기를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누군가 그 틈을 타 양옆에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백기가 눈을 들자 굳은 얼굴의 분대장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너희 정말 끝까지 이럴 거야? 하류, 체력 훈련 중에 Evol을 써서 동료를 도발했으니 이번 성적은 무효다. 백기, 넌 교내에서 싸움을 벌였고. 둘 다 반성문 써 와!”
백기는 자신에게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싸늘하게 한 번 바라보고는, 자신을 붙잡은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백기, 너 발목 탈구됐어. 의무실에 가보는 게 좋겠어.”
백기는 극심한 통증이 이는 발목을 끌며 붕대를 들고 있던 려엽을 그대로 밀치고 지나가, 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딜 가나 똑같았다.
신경을 긁던 소란도 마침내 귓가에서 멀어졌다.
백기는 구석진 곳을 찾아 팔다리를 대자로 뻗은 채 바닥에 드러누웠다. 뼛속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머릿속까지 번졌지만, 신경 쓰기도 귀찮았다.
그래도 여기 있는 녀석들은 학교에 있던 놈들보다는 싸움을 좀 하네.
그는 멍하니 생각했다.
습하고 뜨거운 공기 속에서 한 줄기 산들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살짝 흔들었다.
조금 졸린 것 같았다.
귓가에 한여름의 매미 소리와 등나무 의자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백기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바람이 부드럽게 그의 곁을 흘러갔다.
몽롱한 채 고개를 숙이자, 한 글자도 쓰지 않은 국어 문제집이 여전히 배 위에 엎어진 채 놓여 있었다.
그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곁에 앉은 여인의 다정한 옆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두 손바닥을 가볍게 비비자 하늘색 대나무 잠자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엄마?”
“우리 샤오치, 깼어?”
주황빛과 분홍빛으로 물든 노을 아래, 어머니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왜 멍하니 있어? 무서운 꿈이라도 꿨어?”
모든 것이 한없이 포근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그 길고도 숨 막히던 시간들이 전부 그저 아주 긴 꿈이었던 것만 같았다.
백기는 눈을 비볐다.
“기억 안 나…… 그냥 조금 아팠던 것 같아.”
“아이구, 쓰담쓰담. 무서워하지 마.”
어머니의 다정한 손이 그의 머리 위에 내려앉아 살살 쓰다듬었다.
“무서워하지 말고, 이것 봐.”
대나무 잠자리가 천천히 두 사람 앞으로 내려왔다.
백기가 그것을 받아 작은 손으로 힘껏 비비자, 대나무 잠자리는 쌩하고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또다시 떨어지려는 순간 어머니가 손을 들어 올리자, 산들바람이 잠자리의 날개를 받쳐 다시 하늘로 밀어 올렸다.
“나도 언제쯤 엄마처럼 바람으로 대나무 잠자리를 날릴 수 있어?”
“우리 샤오치가 날린 대나무 잠자리도 벌써 아주 높이 날고 있잖아.”
“그렇지만…… 다른 애들이 그러는데, 우리한테 있는 건 전부 아빠랑 엄마가 준 선물이래. Evol도 그중 하나인 거지? 난 그 선물을 못 받은 게…… 아직 내가 좋은 아이가 아니라서 그런 거야?”
손가락 하나가 살며시 뺨을 콕 찔렀다.
백기가 눈을 깜빡이자 어머니가 눈을 곱게 휘며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우리 아들은 눈이 이렇게 예쁜걸. 저녁노을보다도 예뻐.”
“게다가 우리 아들은 며칠 전에도 엄마를 지켜주겠다고 자기보다 훨씬 큰 무서운 개를 용감하게 쫓아냈잖아.”
따스한 품이 그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가장 단단한 작은 세계처럼.
“우리 샤오치, 네 예쁜 눈도, 네 강인함도, 정직함도, 용감한 마음도 전부 아빠와 엄마가 너에게 준 선물이야.”
“그러니까 절대로 너 자신을 의심하지 마.”
다정한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백기는 몽롱하게 눈을 떴다.
푸른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이 말없이 그와 마주 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모래밭에 누워 있었고, 저녁의 산들바람이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듯 스쳐 지나갔다.
시야 한구석에는 붕대 한 뭉치가 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황급히 다녀가며 무심코 그곳에 떨어뜨리고 간 것처럼.
몸은 꿈속에서처럼 가벼웠다.
백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묻어 있던 흙과 모래도, 관절에 남아 있던 상처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온기만이 그의 손안에 남아 있었다.
# 생일 외전
## 03 오래된 바람
“매일 밤 10시부터는 소등하고 통행이 금지되는 시간이다. 지금은 새벽 1시인데, 넌 왜 아직도 밖에 있지?”
눈앞의 군복 차림 남자가 법랑 찻잔을 든 채 싱글벙글 웃으며 백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기는 등을 꼿꼿이 편 채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이 티베탄 마스티프 같은 치와와는 왜 한밤중에 잠도 안 자는 거야.
백기는 짜증스럽게 생각했다.
역시 좀 더 조심했어야 했다.
아무리 말해도 꿈쩍하지 않을 듯한 백기의 태도에 류 교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백기야, 열심히 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몸도 좀 챙겨야지.”
“특별 대우는 필요 없습니다.”
“대식당을 일주일 동안 청소하면 되는 거죠? 오늘부터 하겠습니다.”
다음 날 훈련이 끝나자, 취사병 한 명이 이미 식당 입구 계단에 앉아 백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기가 다가오자 그는 입을 벌리고 씩 웃었다.
“네가 일 도와주러 온 애냐?”
“바닥은 전부 걸레질하고, 창문이랑 테이블도 한 번씩 닦아야 해. 주방 쓰레기통도 비워야 하고. 청소 도구는 저쪽에 있어. 너희 상관이 나한테는 절대 도와주지 말라고 명령했거든.”
백기는 취사병이 가리킨 수납장을 열어 청소 도구를 꺼냈다. 세제를 묻혀 행주를 빨고는 화풀이라도 하듯 테이블에 묻은 얼룩을 힘껏 문질렀다.
“이제야 좀 편하게 쉬겠네.”
오랫동안 말동무가 없었던 탓일까. 취사병은 하품을 하더니 혼잣말하듯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 새로 들어온 신입이지? 듣자 하니 얼마 전에 체력 평가하다가 누가 싸웠다던데?”
백기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고 담배를 꺼냈다.
손끝에서 불빛이 번쩍하더니 담배 끝에 불이 붙었다.
갑자기 피어오른 불꽃이 시야에 들어오자 백기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려 취사병을 바라봤다.
“Evol도 제대로 제어 못 하는 신입이 다른 녀석을 아주 심하게 두들겨 팼다던데? 그거 진짜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갑자기 활활 타올랐다.
백기는 취사병이 황급히 불붙은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밟아 끄는 모습을 지켜봤다.
취사병은 다리를 절뚝이며 식당 안 테이블로 가서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아이고—— 좀 편하게 해보려 했더니, 그것도 안 되네.”
백기의 시선을 느낀 취사병이 그를 흘끗 바라보더니 라이터로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왜? 말 안 듣는 Evol은 처음 봐?”
“본 적 있어요.”
백기는 시선을 돌렸다.
“바꿔볼 생각은 안 해봤어요?”
“뭘 바꿔? 원래부터 손가락을 튕기거나 휘파람을 부는 법을 끝내 못 배우는 사람도 있잖아. 나한테 이런 힘이 있다는 것과 그 힘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완벽하게 다루는 건 전부 다른 문제야.”
“게다가 아주 못 쓰는 것도 아니거든. 한번은 이 힘이 없었으면 나랑 동료들이 벌집이 됐을 뻔한 적도 있었어.”
테이블을 닦던 백기의 손이 순간 멈췄다.
그의 시선이 취사병의 조금 불편해 보이는 다리로 재빨리 향했다.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결국 남에게 짐이나 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될 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취사병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목소리에도 조금 진지한 기색이 묻어났다.
“이봐, 젊은 친구. 그런 곳에선 절대로 혼자가 아니야.”
“우리 등 뒤에는 언제나 전우들이 있어. 모두를 지킬 수는 없더라도, 분명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는 법이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온 말들이 백기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에게는 낯선 생각들이었다.
백기는 드물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많은 순간을 혼자였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은 반드시 스스로 해내야만 했다.
“이것 봐. 벌받는 건 너지만 덕분에 난 이렇게 두 손 놓고 쉴 수 있잖아~”
취사병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봐, 동생! 이름이 뭐야? 오늘부터 너도 내 훌륭한 전우다!”
# 생일 외전
## 04 절망 속에서 움트다
7월도 가장 무더운 시기에 접어들었지만, 백기는 여전히 자신만의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지 못하고 있었다.
7월 하순, 모든 신입생이 교관의 인솔 아래 산림 깊숙한 곳에 있는 폐창고로 향했다.
“이곳에서 15시간을 버티면 통과다. 도중에 포기하면 평가에서 탈락한 것으로 간주하고 일반 경찰학교로 전출시킬 거다.”
교관이 떠난 뒤, 백기는 창고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뭐야, 정전됐어?”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이상했다.
기억하기로 창고 문은 꽤 낡아 있었다. 바깥에는 햇빛이 쨍쨍했으니 틈새로 조금이라도 빛이 들어와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어둠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 듯 완벽하게 새까맸다.
백기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여덟 걸음째에 이르러서야 손바닥에 칠이 벗겨진 낡은 벽이 닿았다.
시간이 일 분, 일 초 흐를수록 주변은 점점 초조해졌다. 사방에서 들려오던 숨소리가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그 초조함은 탁한 공기를 타고 그의 사지로 스며들었다.
다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변의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낡은 창고 특유의 곰팡내마저 서서히 사라졌다.
백기는 통증이라도 느껴보려고 혀끝을 세게 깨물었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정말 혀를 깨물기는 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두려움과 막막함이 마음속에서 서서히 배어 나와 팔다리로 퍼져갔다.
시간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길었던가?
“지금의 너에겐 아직 네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킬 자격이 없다.”
머릿속에 문득 한 남자의 경멸 어린 냉혹한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은 과거의 불바다와 함께 끝없는 어둠 속에서 그를 향해 다가왔다.
“이게 네가 보여주겠다는 증명이냐?”
백기는 고함을 지르며 옆에 있는 벽으로 몸을 내던졌다.
고통으로라도 정신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통증도, 소리도 그의 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이 정도면 제법 잘했다. 역시 내 아들이군.”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백기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남자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언제나 차갑기만 하던 얼굴에는 낯설게도 희미한 인정의 기색마저 떠올라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됐다고?
백기는 자신의 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그때 아주 먼 곳에서 또 하나의 다정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우리 샤오치——”
그는 본능적으로 그 목소리를 따라 기억을 더듬었다.
희미하고 얼룩진 풍경 속에서 어린 자신이 강가에 서 있었다.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어머니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으로 어린 그의 머리를 가볍게 콕 찔렀다.
따스한 바람이 천천히 그를 감싸 안고 젖은 옷을 말려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흐르던 물소리가 유려한 피아노 선율로 바뀌었다.
아직 풋풋한 콧노래가 그 선율을 따라 흘러나왔다.
옥상에 누워 있던 자신이 눈을 뜨더니 무심히 종이비행기 하나를 날렸다.
종이비행기는 피아노 선율을 따라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갔다.
두근—— 두근——
백기는 자신의 심장박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그의 심장은 유난히 힘차게 뛰곤 했다.
한 번, 또 한 번.
가슴속에서 단단하고 힘차게 고동쳤다.
기묘하고 어지러운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고등학교 시절, 어느 오후의 도서관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소녀가 손에 든 책을 진지하게 읽고 있었다.
그는 졸린 듯 하품을 하더니 서툰 손길로 책장을 한 장 넘겼다.
“머리 위에 어떤 하늘이 펼쳐져 있든, 나는 그 어떤 폭풍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다.”
눈앞에는 여전히 남자의 손이 내밀어져 있었다.
그러나 백기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를 향해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
“꺼져!”
피아노 소리가 사라졌다.
백기는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짜 눈을 떴다.
그때 그의 귀에 들려온 것은 단 한마디였다.
“시험에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 생일 외전
## 05 소중한 힘
그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단 12명뿐이었다.
그날 이후, 그들에게는 이전보다 훨씬 혹독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백기는 보급품과 낙하산 장비를 몸에 단단히 고정하고 수송기에 올라탔다.
한동안 모의 훈련을 거친 끝에 마침내 첫 실전 낙하 훈련을 앞두게 되자, 백기도 드물게 긴장감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가 지정된 고도에 도달했다.
열린 기내 문으로 거센 기류가 휘몰아쳐 들어왔다. 까마득히 멀어 바닥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지상을 내려다보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분대장의 강하 명령이 떨어지자, 백기는 순간적으로 밀려온 두려움을 억누르고 몸을 날렸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입과 코로 거세게 밀려들었다.
백기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등에 멘 낙하산이 서서히 펼쳐졌고, 마침내 기류가 그의 몸을 안정적으로 떠받쳤다.
백기는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 눈을 떴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산맥이 소리 없는 장엄한 악장처럼 그의 가슴을 세차게 울렸다.
그 속에서 자신은 푸른 하늘 아래 떠다니는 하루살이처럼 작고도 자유로운 존재였다.
“으아아악—— 살려줘!!”
갑자기 위쪽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낯익은 동료 하나가 백기의 눈앞을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상대의 낙하산이 자동으로 펼쳐지지 않았을 가능성을 알아차린 백기는 즉시 소리쳤다.
“왕삭! 예비 낙하산 줄을 당겨!”
하지만 목소리는 급격히 하강하는 기류에 휩쓸려 흩어졌다.
동료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본 순간, 머릿속에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백기는 이미 자신의 낙하산을 분리하고 그를 향해 뛰어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무중력감이 온몸을 덮쳤다.
Evol이 일으킨 바람이 몸 주위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백기는 공중에서 비틀거리며 동료에게 다가갔다.
바람으로 상대를 떠받치려 했지만, 그 힘은 마치 백기의 뜻을 거스르기라도 하듯 동료를 높이 밀어 올렸다가 다시 균형을 잃었다.
바람 속에서 끝없이 오르내리는 동료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손끝에 닿을 듯하다가도 번번이 빠져나갔다.
조금만 더!
백기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만은 분명했다.
——눈앞의 사람이 이렇게 추락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광풍과 중력이 두 사람의 몸을 아래로 거칠게 잡아당겼다.
백기는 고집스럽게 손을 뻗은 채 마음속으로 그 힘을 향해 포효했다.
——저 녀석을 내 곁으로 밀어줘!!
마침내 손바닥에 무언가가 붙잡혔다.
그와 함께 묵직한 무게도 손안으로 전해졌다.
백기는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예비 낙하산을 펼쳤다.
장갑 너머로 동료의 제복이 확실히 움켜쥐어지는 감촉에 그제야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나 꽉 잡아!”
그러나 통제되지 않는 바람이 두 사람을 공중에서 끊임없이 회전시켰다.
예비 낙하산의 줄이 몇 겹이고 휘감기더니 점차 한데 뒤틀리기 시작했다.
낙하산은 서서히 균형을 잃었고, 곧 다시 추락하는 감각이 엄습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시야 속에서 돌풍이 칼날처럼 얼굴을 할퀴었다.
백기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
그 와중에도 몸은 겁에 질려 정신을 잃다시피 한 동료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손을 더듬어 잠금장치를 찾아내자마자 예비 낙하산을 분리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동료의 예비 낙하산 줄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바람은 두 사람을 더욱 먼 곳으로 휩쓸고 갔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백기는 빠르게 가까워지는 지상을 바라보지 않았다.
오직 몸속의 에너지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백기! Evol 쓰지 마!! 충격에 대비하는 자세를 취해!”
교관이 거듭 외치는 고함이 바람 사이로 끊어질 듯 들려왔다.
거의 본능적으로 백기는 즉시 동료를 끌어안고 충격에 대비하는 자세를 취했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의 몸이 숲속으로 거칠게 떨어졌다.
주변의 나뭇가지들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내 거대하고 푹신한 무언가가 두 사람을 안정적으로 받아냈고, 그 반동으로 몸이 다시 한번 튀어 올랐다.
백기는 등을 대고 누운 채 숲 사이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한 손으로는 자신들을 받아낸 몸 아래의 ‘그물’을 움켜쥐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그물은 두 사람을 단단히 떠받치고 있었다.
“이 바람 때문에 아주 먼 곳까지 날아와 버렸군…… 여긴 자기장 때문에 통신 신호도 방해받는 곳이야. 곧 어두워질 테고 지형도 험하니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구조를 기다리자.”
평소에는 온화하던 교관도 지금은 온몸이 엉망이었다.
그는 벌벌 떨며 흐느끼는 왕삭의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가면 의무실에 가서 심리 상담부터 받아라.”
귓가에 들려오는 교관의 목소리와 죽을 고비를 넘긴 동료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백기의 감각도 서서히 몸으로 돌아왔다.
그는 천천히 두어 걸음을 걸었다.
그제야 발이 땅에 닿아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하늘에서 추락하던 그 순간, 심장은 거의 멎을 뻔했다.
어째서 교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그 말에 따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백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목숨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때 생수 한 병과 함께 류 교관의 얼굴이 백기 앞에 불쑥 나타났다.
“이 녀석아, 한번 눈 돌아가면 목숨도 안 아깝냐? 그래도 처음 대처는 괜찮았어. 그 뒤에 사고만 안 쳤으면 말이지.”
백기는 아무 말 없이 생수병을 받아 들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벌써 7월 말이네. 너희 신입들도 들어온 지 곧 한 달이 다 되어가는군.”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옆에 털썩 앉는 모습을 바라보며, 백기는 어쩐지 그의 미소에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넌 앞으로 분명 누군가에게 아주 든든한 동료가 될 거야.”
뜬금없이 들려온 그 말에 백기는 저도 모르게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류 교관이 빈 생수병으로 그의 머리를 툭 내리쳤다.
“이 망할 녀석아! 칭찬을 해도 싫어하고, 혼을 내도 듣질 않으니!”
# 생일 외전
## 06 구름 속 너른 하늘
달이 희미한 빛을 두른 채 하늘가에 걸려 있었다.
백기는 아무리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몸속의 에너지가 마치 깨어난 것처럼 피부 아래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어머니의 바람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이었다.
어쩐지 자신의 Evol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백기는 곤히 잠든 교관과 왕삭을 한 번 바라보고는 소리 없이 예비 낙하산을 챙겼다.
지평선 너머 동쪽 하늘 끝자락이 여명에 분홍빛과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는 절벽 끝에 멈춰 서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산속을 지나온 밤바람이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채 그의 곁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백기는 눈을 감고 어제 높은 하늘에서 추락하던 순간의 감각을 떠올렸다——
그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세차게 솟구쳐 올랐다.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힘이었다.
마치 거칠게 몰아치던 파도가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로 바뀐 듯했다.
또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그를 부르고, 초대하는 것만 같았다.
백기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여 절벽 아래로 몸을 맡겼다——
거센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바람에 맡겼다.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귓가에서 거칠게 울리던 기류도 어느새 부드러워져, 보이지 않지만 힘 있는 팔로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이 그를 살며시 붙잡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듯했다.
백기는 한 마리 새처럼 가볍게 날아올랐다.
몸이 허공으로 솟구친 순간, 동쪽 하늘을 가르며 나타난 첫 햇살이 새벽의 뿌연 물안개를 뚫고 곧장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빛은 희미한 무지갯빛 테두리를 남겼다.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
백기는 눈을 크게 떴다.
햇빛을 머금은 산봉우리들은 온통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기나긴 밤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천지에 드리워져 있던 온갖 탁한 기운을 말끔히 씻어낸 모습이었다.
수많은 강줄기가 쉼 없이 굽이쳐 흘렀고, 울창한 초록빛이 산과 들을 가득 물들이고 있었다.
산과 바다는 고요하고 장엄했다.
그 묵직한 풍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줄곧 가슴속에 쌓여 있던 무거운 것들마저 바람 속으로 훌훌 날려 보낸 것 같았다.
세상이 이렇게나 넓었구나.
도시도, 대지도, 산맥도 모두 넓게 펼쳐진 색채의 조각들이 되었다.
어둡고 답답했던 것들은 그저 조그만 검은 점으로 변했다.
좁고 막막하기만 했던 앞길은 이제 끝없이 먼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가벼운 바람이 그의 몸 주위를 감돌며 위로 솟아올라 구름 사이를 지나갔다.
백기가 팔을 휘젓자 솜처럼 뭉게뭉게 피어난 구름이 커다란 ‘종이비행기’ 모양으로 모여들었다.
구름으로 만들어진 종이비행기는 힘차게 날아오를 준비를 마친 바람을 타고 앞으로 날아갔다.
백기는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온몸에서 힘을 빼고, 경계 없는 드넓은 세상이 눈앞에 마음껏 펼쳐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 이제—— 날 수 있다——!”
이제 그 무엇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시원하고 자유분방한 웃음소리가 높은 하늘에 울려 퍼졌다.
손안의 바람은 그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거침없이 날아올랐다.
때로는 그 무엇보다 날카로운 칼날이 될 수도 있었고, 때로는 그 무엇보다 든든한 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아주 오래전 어느 오후가 떠올랐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까지 Evol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힘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네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자 축복이기도 했다.
형체조차 없는 이 한 줄기 바람을,
마침내 지금 이 순간,
그는 온전히 자신의 손안에 붙잡았다.
새벽빛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리고 백기는 자신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 2023 백기 생일
## 생일 축하 모먼트
### 생일 케이크 촛불
“난 평소에 욕심을 잘 부리지 않지만, 그동안 아껴둔 욕심은 전부 너에게 부리고 싶어.”
“내 소원이 좀 많아서, 아무래도 장기전으로 가야겠네.”
### 생일 케이크
백기
조금 더 가까이 와줘. 더 또렷하게 듣고 싶어.
유연
짜잔—— 오늘의 생일 주인공만을 위한 특별 요리 나왔습니다!
나는 먹기 딱 좋은 온도로 준비한 장수국수를 가져와 백기 앞에 내려놓았다.
유연
저 유연이가 단독 제작한 선배 생일 특제 장수국수, 올해 한정판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내가 국수를 들고 나왔을 때부터 백기의 시선은 줄곧 내 손에 들린 그릇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백기
냄새 좋다.
그는 젓가락을 집어 들고도 좀처럼 국수에 손을 대지 않았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유연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백기
응. 아주 큰 문제가 있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자 나도 덩달아 긴장되었다.
백기
너무 예쁘게 만들어서…… 먹기가 아까워.
유연
푸핫—— 안 먹는 게 오히려 음식에 대한 가장 큰 실례예요!
유연
게다가 저도 이걸 만든 대가로 받고 싶은 게 있거든요.
유연
바로 우리 생일 주인공이 행복하게 국수를 먹는 모습을 보는 거예요.
나는 손가락으로 백기의 말랑한 볼을 살짝 콕 찔렀다.
백기
알았어.
나는 턱을 괴고 백기가 고개를 숙인 채 맛있게 국수를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을 보니 식욕이 제대로 돋은 게 분명했다.
유연
어때요? 백 경관님의 국숫집 순위에서 내 요리 솜씨는 몇 등쯤 할 것 같아?
백기
당연히 1등이지.
백기
국수에 라탸오를 넣으니까 맛있네. 앞으로는 다른 매운 간식도 곁들여 먹을 수 있게 신청해도 될까?
유연
글쎄~ 그건 앞으로 백 경관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죠.
백기
그럼 매번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도록 노력해야겠네.
잠시 방 안에는 백기가 국수를 먹는 소리만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릇을 들어 올려 국물까지 남김없이 마셨다.
백기
아, 든든하다.
유연
헤헤, 내 축복의 힘이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백기
분명 그럴 거야.
백기
이렇게 정성이 가득 담긴 국수를 먹었으니까, 나쁜 일은 하나도 찾아오지 않을 거야.
그가 나지막이 웃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유연
이 국수가 앞으로 일 년 동안 선배가 건강하고 무탈하게, 하는 일마다 순조롭게 지낼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어.
유연
너무 평범한 소원인가요?
백기
평범한 거면 충분해. 평범한 게 제일 좋거든.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백기는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자신의 코끝을 내 코끝에 맞댔다.
백기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앞으로도 이렇게 마음 편히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뿐이야.
백기
그리고 앞으로 맞이할 수많은, 정말 수많은 생일에도 네가 여기서 내 곁을 지켜주는 거.
백기
우리의 하루하루가 언제나 지금 같기를—— 그게 온 우주에서 가장 멋진 축복이야.
푸른 은하수의 영상이 방 안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백기의 속눈썹 끝에도 자잘한 별빛이 내려앉아 반짝였다.
나는 그와 맞잡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유연
어때요? 완전히 달라졌죠? 선배 방인데도 못 알아보겠지?
유연
다행히 선배 집에 비어 있는 방이 있어서 내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어요.
백기
평소에는 이 방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는데, 오늘은 이 방 덕분에 은하수 속으로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네.
유연
그래도 진짜 은하수는 너무 멀리 있으니까, 오늘은 내가 대신 우리 생일 주인공의 소원을 들어주고 지켜봐 줄게요.
나는 백기를 이끌고 방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그는 깍지 낀 우리의 손을 자신의 가슴 앞에 가져다 댔다.
백기
괜찮아. 내 소원은 네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백기
다만 조금 길어질 것 같아.
유연
소원이 많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지. 적어도 지난번에 선배가 제출한 임무 보고서보다는 길어야 해요.
백기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이마를 내 이마에 살며시 맞댔다.
# 穹宇之约 — 하늘 데이트
2023 백기 생일 데이트
## 1장
안내 음성
곧 달의 중력 영향권에 진입합니다. 2단 엔진의 재점화를 실시합니다.
대형 스크린에 시스템 안내 문구가 깜빡이며 이번 여정이 곧 끝나간다는 것을 알렸다.
나는 모의 우주선의 창가에 바짝 붙어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우주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유연
이 홀로그램 화면, 화질이 정말 좋네요. 여기서 보는 별들이 망원경으로 볼 때보다 더 밝게 느껴져요.
백기
화면 효과 때문만은 아니야. 대기권을 벗어나면 원래 은하수의 빛을 훨씬 선명하게 볼 수 있거든.
익숙한 온기가 등 뒤로 포근하게 전해졌다.
어느새 두 팔이 내 양옆의 창가를 느긋하게 짚으며 나를 품 안에 가두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이 천천히 회전하더니 회백색 천체 하나가 시야 속에서 점점 커졌다.
유연
저기 봐요, 달에 거의 다 왔어요!
안내 음성
우주선이 10초 후 달에 착륙합니다. 착륙에 대비해 주십시오. 10, 9……
유연
준비됐어요?
나는 고개를 들어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백기
물론이지.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가벼운 진동과 함께 우주선이 안정적으로 '착륙'했다.
선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울퉁불퉁한 회백색 달 표면을 본 순간, 내 눈이 반짝였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선실 밖으로 뛰어나가 백기를 향해 몸을 돌리고 손을 내밀었다.
유연
우리의 우주 여행 첫 번째 목적지, 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백기는 내 손을 잡고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는 작은 우주선을 돌아보더니 신발 끝으로 발밑의 회백색 모래와 자갈을 톡톡 건드려 보았다.
백기
이 모의 우주선, 실제로 타보니까 꽤 괜찮네.
백기
처음에는 천문학 지식을 소개하는 체험관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실감 나게 만들어 놨을 줄은 몰랐어.
유연
당연하죠, 평범한 천문관이면 재미없잖아요.
유연
여긴 몰입형 체험이 특징이라서 선배랑 꼭 한번 와보고 싶었어요.
백기
아까 안내문을 보니까 유연이네 회사도 이곳의 공동 건립에 참여했다고 하던데?
유연
예전부터 관장님과 아는 사이라서 조금 후원했어요. 더 많은 사람이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기도 했고요.
유연
내일 정식 개관하기 전까지는 우리 같은 '관계자'들한테만 개방하거든요.
유연
그러니까 오늘은——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는 말씀!
백기
나도 전에 여기 입장권을 예매하려고 했었어. 그런데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한 달 치 표가 순식간에 매진됐더라고.
백기
'빽'이 있어서 다행이네.
멀지 않은 곳에서 지구 모형이 투영한 빛이 그의 미소 띤 얼굴을 연한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나는 백기의 손을 잡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유연
자, 그럼—— 백 경관님의 우주 생일 여행, 지금부터 정식으로 시작합니다!
## 2장
체험관 안에는 크고 작은 행성 모형들이 높은 천장에서 아래로 늘어져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는 광활한 체험관을 천천히 거닐며 물안개로 구현한 성운 사이를 지나갔다. 유리 바닥 아래로는 조명과 영상이 어우러져 한층 더 깊고 아득한 우주를 펼쳐 보였다.
뒤돌아보니 조금 전 지나왔던 거대한 '태양'이 어느새 아주 작아져 있었다.
유연
우리 벌써 태양계를 벗어난 거예요?
백기
응. 지금 머리 위에 있는 건 아마 백조자리일 거야.
백기
바로 위에 있는 별이 천진사, 그러니까 데네브야. 백조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이지.
유연
그건 나도 알아요! 전에 선배가 별 보러 데려갔을 때 봤잖아. 여름철 대삼각형을 이루는 별 중 하나죠?
백기
맞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많은 별 사이에서 백조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백기
여기서 보면 더 쉽게 알아볼 수 있어. 가장 밝은 천진사가 꼬리 깃털이야.
백기
거기서 위쪽으로 따라가면 천진일이 있고, 백조자리의 목을 이루는 HDE 226868도 있어. 바로 저 푸른색 초거성 말이야.
백기
그 옆에 검게 보이는 부분 있지? 저게 블랙홀이야.
백기는 몸을 살짝 낮추고 한 손으로 내 이마 옆을 부드럽게 짚으며 위쪽을 바라보도록 이끌었다.
그 순간, 다정한 숨결이 뺨을 스치자 나도 모르게 호흡이 한 박자 흐트러졌다.
나는 살짝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백기는 오로지 별을 가리켜 알려주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호박색 눈동자에는 다른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고, 신이 난 듯 눈썹 끝마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웃으며 우리 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시야 끝에 들어오자 얼굴이 조금씩 달아올랐다.
그런데도 귓가의 설명은 멈추지 않았다. 정작 나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자신의 행동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백기
……그리고 양옆으로 날개를 이루는 별이 천진구, 천진팔, 천진이야.
백기
그래서 백조자리는 천문학 역사상 블랙홀과 항성으로 이루어진 쌍성계가 처음 발견된 별자리이기도 해.
설명을 마친 백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반짝이는 웃음기가 어려 있자 귀 언저리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매달린 행성들을 구경하는 척했다.
유연
그럼 밤하늘에서도 이 '백조'를 볼 수 있는 거예요?
백기
물론이지. 날씨 맑은 날에 내가 데려가 줄게.
체험관은 무척 넓었다.
우리가 은하계의 전시 구역 대부분을 둘러보고 나니 어느새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걷느라 조금 지친 나는 백기에게 온몸을 기대고 휴대전화에 띄워 놓은 안내 지도를 살펴봤다.
유연
우리가 은하계 전시 구역은 거의 다 돌아봤으니까…… 조금 더 가면 놀이 체험 구역인가 봐요.
백기
입장할 때 안내받기로는 거기에 꼭 해봐야 할 체험이 몇 가지 있다고 했어. 가서 구경해 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백기와 함께 복도를 지나갔다.
놀이 체험 구역에는 조금 전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사방에서 알록달록한 빛이 어지럽게 반짝여 눈이 다 어지러울 정도였다.
유연
선배, '광란의 행성'부터 해볼래? 아니면 '중력 나선 거울'?
고개를 들어보니 백기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목소리를 듣고서야 시선을 거두었다.
백기
아직 시간 많으니까 추천하는 건 전부 해보자. 지도에 나온 순서대로 갈까?
나는 그가 조금 전까지 바라보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동심을 자극하는 '은하 미니 비행선'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행성들 사이를 구불구불 오르내리며 지나가는 레일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곳에서는 이따금 비명과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연
안내 지도를 보니까 이거 작은 롤러코스터 같은데…… 백 경관님, 관심 있으세요?
백기
아니, 그냥 소리가 들려서 좀 궁금했던 거야.
살짝 다문 그의 입가를 바라보던 나는 눈을 깜빡이고는 발길을 돌려 미니 비행선 쪽으로 향했다.
유연
기왕 온 김에 타봐요. 이것도 꼭 해봐야 할 체험 목록에 있었잖아요.
백기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내 손을 더욱 꼭 마주 잡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우리는 줄 맨 뒤에 섰다.
대기 줄에는 대부분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있었다. 앞에 서 있던 남자아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고개를 들어 우리 어른 두 사람을 바라봤다.
나는 발끝을 살짝 들어 백기의 귓가에 다가가 소곤거렸다.
유연
우리 꼭 어린애들 사이에 잠입한 비밀 요원 같지 않아요?
백기
잘못 봤어. 우리도 어린애들이잖아.
백기는 눈을 휘며 웃었다. 말투는 더없이 당당했다.
백기
제일 좋아하는 사람 곁에서는 어린애가 되어도 되는 거야.
작은 비행선은 통로 안을 빠르게 달리다가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사방의 어둠 속에서는 자그마한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때때로 화려하고 거대한 은하 사이를 통과했고, 빠르게 질주하는 '혜성'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비행선의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멀지 않은 앞쪽에서 다른 아이들의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어린이용 놀이기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앞에 펼쳐진 새까만 어둠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백기의 손바닥을 살짝 움켜쥐었다.
유연
여기 갑자기 뭐가 튀어나오는 장치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
백기
그럴지도.
백기의 말에 나는 더욱 긴장했다.
하지만 그는 눈을 깜빡이더니 웃으며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사방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작은 비행선이 속도를 높여 아래로 급강하했고, 순식간에 온몸을 무중력감이 휩쓸었다.
유연
꺄아——!
나는 숨을 헉 들이켰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떨어지는 느낌보다 더 무서운 건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갑자기 곁에 있던 사람이 내 손목을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귓가에 시원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에는 한껏 신이 난 듯한 웃음기마저 묻어 있었다.
백기
무서워하지 마. 내가 널 데리고 날고 있다고 생각해.
높이 들어 올린 내 손을 그가 든든하게 붙잡아 주었다.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마저 우리를 호위해 주는 듯해, 놀라움과 두려움도 차츰 가라앉았다.
잠시 후, 작은 비행선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둠 속을 벗어나지 못했다.
기묘한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귓가를 맴돌았다.
백기
이 소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 항공우주국 홈페이지에 공개됐던 블랙홀 소리야.
유연
설마…… 우리 지금 '블랙홀' 안에 있는 거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손목의 맥박 위로 전해지는 따뜻한 손가락의 감촉을 느끼자 세차게 뛰던 심장이 마침내 조금씩 진정되었다.
남자아이
엄마, 여기 너무 깜깜해. 우리 블랙홀에 빨려 들어온 거야?
앞쪽 어둠 속에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아이를 다정하게 달래는 목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
그때 문득, 곁에 있던 따뜻한 몸이 내 쪽으로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유연
왜 그래? 이쪽 '어린이'도 무서워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맞잡은 손끝에 살짝 힘이 들어가더니, 이내 귓불에 따뜻하고 촉촉한 무언가가 닿았다.
낮고 살짝 잠긴 목소리가 숨결과 함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뜨거운 숨결에 귓가부터 가슴속까지 간질거렸다.
백기
무서워 죽겠어.
백기
그러니까 조금만 더 꼭 안아줘.
# 穹宇之约 — 하늘 데이트
2023 백기 생일 데이트
## 3장
한 바퀴 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니 비행선에서 내린 뒤에도 백기가 아직 아쉬움이 남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자, 나는 웃으며 그의 곁에 바짝 다가갔다——
유연
블랙홀 안이 그렇게 깜깜할 줄은 몰랐어요. 어린애들한테는 확실히 조금 짜릿했겠네요.
백기
응. 그래도 다 큰 어린이들한테는 딱 좋았어.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백기
다음엔 어디로 갈까?
나는 휴대전화에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미리 준비해 둔 것들이 모두 제자리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백기의 손을 잡아 옆쪽의 별빛 회랑으로 향했다.
유연
비밀이에요~ 도착하면 알게 될 거예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길게 이어진 별빛 회랑 끝에는 행성 모양의 방 하나가 있었다.
방 안에는 보기만 해도 푹신해 보이는 소파와 작은 탁자가 놓여 있었고, 간식도 몇 가지 준비되어 있었다.
유연
이쪽에 있는 행성 모양 방들은 전부 소규모 개인 영화관이에요. 아직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았는데, 제가 미리 예약해 뒀어요.
유연
선배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거든요.
나는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백기를 푹신한 의자로 이끌었다.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프로젝터가 앞쪽 벽에 선명한 로고 하나를 비추었다.
사방의 스피커에서 주제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화면 속 은하수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어느 행성을 향해 뻗어 나갔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백기를 살펴보았다.
역시나 그는 눈을 살짝 크게 뜬 채 화면에서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화면의 감독 이름에 내 이름이 나타나자 백기의 눈이 반짝였다.
백기
이거 전에 너희 회사에서 예고편 공개했던 우주 영화 아니야? 아직 개봉 안 했잖아. 내가 봐도 되는 거야?
유연
당연하죠. 선배는 제 '특별 관계자'잖아요. 그리고…… 이 영화를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이 선배였으면 했어요.
유연
생일 선물 중 하나인데, 우리 생일 주인공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그 뒤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영화 속 음악과 대사만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백기는 온 정신을 집중해 스크린을 바라봤다. 주인공이 위기에 빠지는 장면에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기까지 했다.
평소 함께 영화를 볼 때면 가끔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가 이렇게까지 몰입하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영화는 계속되었다.
다음 장면은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곁에 앉은 백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여주인공
알고 있나요? 우리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은 우주가 탄생한 빅뱅 이후 수억 년 동안 우주를 떠돌아온 것들이에요.
나는 타이밍을 가늠하고 있었다.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의 손목을 붙잡는 순간, 나는 백기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유연
“어쩌면 그때부터 난 선배를 만날 운명이었는지도 몰라요.”
그 순간, 스크린에서도 똑같은 대사가 흘러나왔다.
백기는 잠시 멍해진 듯했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부드러운 별빛이 스크린의 빛을 타고 그의 온몸에 내려앉아 눈동자를 환하게 밝혔다.
바로 다음 순간, 허리가 갑자기 단단히 감싸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 호박색 눈동자가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마치 하늘 끝에서 날아드는 불타는 유성처럼, 뜨거운 빛을 품고 오직 하나뿐인 목적지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스크린 속 연인들은 무너져 가는 행성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았고, 나 역시 백기의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백기
나…… 잘 못 들었어. 다시 한번 말해줘.
그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그 안에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묵직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아득히 먼 시간까지 한꺼번에 품에 끌어안은 듯했다.
나는 다정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이마까지 살며시 맞댔다.
유연
우주가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난 선배를 만나게 될 운명이었어요.
백기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팔에 살짝 힘을 주어 우리 사이의 거리를 더욱 좁혔다.
백기
우주까지 날 도와주다니, 고맙네.
아득히 멀리서 바라보던 은하수가 이제 품 안에 있었고, 꿈꾸던 것들도 하나둘 손안에 들어오고 있었다.
우연이자 기적 같았던 그 순간들부터, 백기는 자신의 인생도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고 느꼈다.
이것이 운명일까?
아니면 우주가 무심코 만들어 낸 어느 한순간의 우연일까?
백기는 그 답을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무척이나 행운아라고 느꼈다.
마치 그녀와 함께 우주보다도 더 먼 곳에 다다른 것만 같았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곡과 함께 올라가던 크레디트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백기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유연
영화 어땠어요? 마음에 들어요?
백기
응, 정말 좋았어! 이야기도 재미있고 영상도 정교한 데다 고증까지 잘되어 있더라.
백기
그래도 난 중간에 나왔던 몰입형 4D 체험이 제일 좋았어.
유연
헤헤, 그건 오늘 생일 주인공만을 위한 특별 서비스예요. 다른 관객들은 경험할 수 없는 거라고요.
유연
그런데 그 바람에 영화에서 제일 멋진 장면을 놓쳐버린 건 좀 아쉽네요.
백기
개봉하고 나면 다시 볼 기회가 있잖아. 하지만 난 그래도 우리만의 '특별한 장면'이 훨씬 더 멋졌다고 생각해.
백기는 나지막이 웃으며 내 손바닥을 몇 번이고 살살 주물렀다.
백기
그런데 영화 속 CG가 내가 지금까지 봤던 우주 영화들보다 훨씬 실제에 가깝더라. 특별한 기술이라도 쓴 거야?
유연
그 장면들이 전부 CG인 건 아니에요. 실제 우주에서 촬영한 영상을 후반 작업으로 가공한 거거든요.
백기
실제 촬영이라고?
백기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짓자, 나는 의기양양하게 휴대전화를 꺼내 영화 속 주요 장면들의 홍보 이미지를 몇 장 보여주었다.
유연
화강전자에서 전에 위성 하나 발사했었잖아요. 마침 이 천문관 관장님이 그 회사의 대주주 중 한 분이시거든요.
유연
그래서 이곳에 투영되는 풍경도 상당수가 그 위성으로 촬영한 영상을 사용한 거예요.
유연
그 인연으로 저도 화강전자와 계약을 맺어서 위성이 촬영한 우주 영상의 사용권을 확보했어요.
백기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백기
어쩐지. 그런데 갑자기 천문학 분야까지 진출할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뭐야?
유연
예전에 선배가 별 보러 데려가 줬을 때부터 조금씩 생각해 뒀거든요.
유연
그리고—— 저한테도 작은 꿈이 하나 있었어요.
나는 백기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그의 품에 기대었다.
유연
제가 좋아하는 남자아이는 별이 가득한 하늘을 좋아하거든요.
유연
그래서 그 사람 생일에는 꼭 별들을 보러 데려가 주고 싶었어요.
# 穹宇之约 — 하늘 데이트
2023 백기 생일 데이트
## 4장
우리가 영화관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천문관이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백기는 행성처럼 생긴 천문관 건물을 다시 한번 돌아보더니 내 손을 잡았다.
백기
다음엔 어디로 갈까?
나는 아직 아쉬움이 남아 있는 듯한 그의 표정을 눈에 담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유연
이번에는—— 선배를 나 혼자 독차지할 수 있는 곳으로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백기를 이끌고 미리 꾸며놓은 방 앞에 섰다.
유연
흠흠, 오늘의 생일 주인공께서는 생일 파티의 메인 장소에 입장할 준비가 되셨나요?
백기
아까 천문관에서 보낸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성대했는데, 그게 메인이 아니었다고?
유연
메인 장소는 당연히 우리 둘만의 비밀스러운 작은 세상이어야죠!
나는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고 함께 문을 열었다.
크고 작은 행성들이 천장 곳곳에 떠 있었고, 프로젝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과 보랏빛이 방 안을 물들이고 있었다.
은하수는 잘게 부서진 빛을 반짝이며 마치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구름처럼 벽면을 따라 펼쳐져 있었다.
백기는 천천히 방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마치 광활한 우주의 중심에 들어와 있는 듯한 방 안을 둘러보는 그의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유연
짜잔—— 은하수를 집으로 가져왔어요. 이렇게라도 우주에서 생일을 보내게 해준 셈이죠!
나는 아침부터 준비해 둔 케이크를 가져와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촛불을 붙였다.
일렁이는 촛불이 곁에 놓인 행성 조명과 어우러졌다.
호박색 눈동자에 자잘하고 눈부신 빛이 어려 있었고, 그 모습은 내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다.
유연
자, 소원 빌어요!
백기
그럼 앞으로도 매년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 생일을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어야겠다.
유연
그게 다예요?
백기
응, 그게 다야.
백기는 눈을 감고 내 두 손을 자신의 가슴 앞에 꼭 모아 쥔 채 진지하게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잠시 후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어와 촛불을 살며시 꺼뜨렸다.
그는 나를 품에 안고 옆에 놓인 의자에 앉더니, 손을 뻗어 내 뺨에 흘러내린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살짝 다물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나는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작게 일렁이는 감정을 엿본 것 같았다.
마치 가을 호수에 번지는 잔물결처럼, 그 감정이 온몸으로 부드럽게 퍼져 나왔다.
유연
일 년에 딱 한 번뿐인 기회인데, 좀 더 이루기 어려운 소원을 빌어도 되잖아요.
백기
매년 이렇게 새로운 생일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잖아.
백기
게다가 요즘 동시에 진행하는 프로젝트도 여러 개 있는 걸로 아는데, 이런 것까지 준비하느라 많이 힘들지 않았어?
유연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힘들 리가 있나요? 오히려 행복하고 뿌듯하죠.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올라간 그의 입꼬리를 부드럽게 누르며 진지하게 말했다.
유연
선배가 언제나 제게 가장 좋은 것들을 주는 것처럼, 저도 선배를 위해 무언가 해주는 과정 자체가 즐거워요.
서로에게 마음과 정성을 쏟고, 함께 누리는 기쁨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바로 그런 일이니까.
백기는 눈을 살짝 들어 내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잔잔한 굳은살이 박인 손끝으로 내 목덜미를 가볍게 주물렀다.
백기
그럼 내가 더 많이 행복해해야겠네. 그래야 너한테도 더 큰 기쁨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케이크를 다 먹고 난 뒤, 나는 백기의 손을 잡고 발코니로 향했다.
유리문을 열자마자 여름밤 특유의 기운을 머금은 따뜻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발코니로 나서던 백기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시선은 곧바로 발코니에 세워진 천체망원경으로 향했다.
백기
이건…… 천안 α의 300배율 망원경?
유연
네, 생일 주인공을 위한 두 번째 선물이에요. 앞으로는 언제든 이 망원경으로 은하수의 풍경을 가까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백기는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허리를 숙여 내 목덜미에 얼굴을 기댄 그의 뜨거운 숨결이 쇄골 위로 내려앉았다.
백기
고마워, 유연아…… 정말 기뻐.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가더니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놀라서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백기는 나를 번쩍 안아 들고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고개를 숙이자 맑고 환한 그의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에는 은하수와 그의 두 눈 중 어느 쪽이 더 찬란한지 구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백기
하루 종일 영상이랑 홀로그램만 봤으니까, 이번엔 진짜 별을 볼 수 있겠네.
백기는 망원경을 조정한 뒤 나를 품에 안았다.
접안렌즈를 들여다보자 수 광년 너머의 세상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나는 전에 배웠던 천문학 지식을 열심히 떠올리며 하늘에 떠 있는 별들과 비교해 보았다.
유연
선배, 이거 사자자리 맞아요?
백기
맞아. 그중 가장 밝은 별이 헌원십사, 레굴루스라고도 하는 사자자리 알파성이야. 바로 아래쪽에는 오리온자리가 있고.
유연
그럼 지금 하늘 한가운데에 있는 건 뭐예요?
백기
궁수자리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망원경 너머로 가까워진 별들을 바라보았다.
백기
지구가 자전하면서 하늘의 별자리도 시시각각 달라져.
백기
같은 시간이라도 태어난 장소가 다르면 머리 위에 떠 있는 별들도 달라지고.
백기
누군가는 우리 모두가 우주의 지켜봄 속에서 태어난다고 하더라.
나는 고개를 들어 백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맑고 투명한 눈빛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우주의 끝까지 바라보려는 듯했다.
유연
인간을 이루는 원소들도 우주에서 일어난 빅뱅의 산물이라고 들었어요. 우리 역시 우주의 일부인 거죠.
유연
그래서 많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우주를 동경하는 건지도 몰라요. 선배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 있어요?
백기는 자세를 조금 고쳐 나를 더욱 꼭 끌어안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백기
처음 천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밤하늘이 예뻐서였어. 기회가 된다면 꼭 가까이 가서 보고 싶었거든.
백기
그런데 나중에 하늘을 날 수 있게 되고 나서도 별들은 여전히 멀리 있는 것 같더라. 지평선도 아무리 바라봐도 끝이 보이지 않았고.
백기
모든 게 아주 작아졌는데, 세상만은 한없이 넓었어. 마치 끝이 없는 것처럼.
백기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그 어디도 내가 속한 곳은 아니었지.
내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 백기가 손을 들어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백기
그런데 오늘 누군가가 나한테 우주 하나를 선물해 줄 줄은 정말 몰랐어.
백기
이 우주에서는 언제든 마음껏 어리광을 부려도 되고, 어디로 가든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도 있어.
백기
그리고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길을 잃지 않고 돌아올 곳이 있지.
백기
이 우주의 보살핌과 축복을 받는 나는 언제나 가장 행복한 별이야.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나는 그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유연
앞으로는 더 많은 기쁨과 행복이 찾아올 거예요. 제가 약속할게요.
우리 주위를 감돌던 밤바람에 한층 더 뜨거운 온기가 스며들었다.
달빛이 내려앉은 이 작은 공간에도 애틋하고 다정한 분위기가 짙어졌다.
너무나 익숙한 숨결이 점점 가까워졌다.
입술 끝에 가볍게 닿았던 온기가 서서히 깊고 애틋한 입맞춤으로 이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은하수가 내 마음 깊은 곳의 소원을 들어주기를 바랐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더 높고, 더 자유로운 곳으로 날아가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볼 수 있기를.
이 세상의 모든 바람과 자유가 그 사람의 것이기를.
유연
선배, 생일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