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창밖의 밤은 더 깊어져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집어 들고, 몇 번째인지도 모를 정도로 백기와의 채팅 기록을 다시 들여다봤다.
백기:
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임무도 순조로워. 아마 곧 철수할 수 있을 거야.
시간 맞춰서 최대한 빨리 돌아가서 같이 명절 보낼게.
설날도 채 지나기 전, 백기에게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고, 떠난 지 벌써 보름이 넘었다.
며칠 전에서야 겨우 그에게서 메시지를 받았었다.
유연:
명절 못 보내도 괜찮아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선배가 무사한 거니까요. 꼭 조심해요. 정말 조심해야 해요!
당연히 내 답장에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 몇 줄 안 되는 메시지들을 나는 며칠째 수도 없이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마음속으론 계속 백기가 무사하길 바라면서도, 그가 한 말을 절대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휴대폰 화면의 숫자가 00:00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또다시 기대를 안고 몸을 뒤척였다.
유연:
선배, 언제 돌아오는 거야……
작게 중얼거리며 백기의 프로필 사진을 톡 하고 눌렀다. 마치 그러면 정말로 그가 내 말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백기를 톡 하고 찔렀다.’
유연:
……!
무의식적으로 벌떡 일어나서는 재빨리 메시지를 삭제했다.
채팅창은 여전히 조용했다. 방금의 작은 행동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듯이.
방 안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고, 창밖으로는 희미하게 차량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백기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설레는 마음을 조금은 억누르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
자동차 소리와는 전혀 다른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운 엔진음이 점점 가까워지며 고요한 밤을 찢고, 내 심장도 덩달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맨발로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베란다로 달려나갔다.
검은색 오토바이 한 대가 거침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거리가 꽤 있는데도, 나는 단번에 그 실루엣을 알아봤다.
나는 웃으며 몸을 반쯤 내밀고, 그가 보든 말든 발끝을 세우고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오토바이의 방향지시등이 깜빡이며 내 인사에 답했다.
그리고는 속도를 더 높여, 아파트 아래에 도착하자 날렵하게 드리프트를 하며 원을 그리듯 멈춰 섰다.
백기가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걸 보고, 나는 곧장 현관문 쪽으로 달려가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해, 부드러운 바람이 다시 나를 베란다로 밀어냈고—
그다음 순간, 가장 익숙하고 그리운 체온이 나를 품에 안았다.
유연:
또 문으로 안 들어오고.
백기:
이쪽이 더 빨라. 너를 더 기다리게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는 나를 꼭 안았다. 마치 그동안 미뤄둔 포옹을 한꺼번에 해주려는 것처럼.
백기:
도로 상황이 생각보다 안 좋았어. 몇 분 늦었지.
다음엔 더 정확히 맞춰서 올게.
그는 고개를 숙여 내 입가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마치 조금 늦은 것에 대한 보상처럼.
백기:
나 왔어.
유연:
어서 와요—
나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그 존재를 만끽했고, 이내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좌우로 꼼꼼히 살폈다.
유연:
괜찮은 거지? 다친 데는 없어요? 선배, 좀 살이 빠진 것 같은데……
백기:
괜찮아. 가벼운 부상은 있었지만, 다 치료했어. 식사는 잘 챙겼어. 네가 해준 게 더 맛있긴 했지만.
그는 대답하면서도 내 손이 이곳저곳을 만지려 하자 피하며, 나를 번쩍 안아 들어 올렸다.
백기:
밖은 좀 추워. 제대로 검사하려면 안에서 하자.
그는 나를 품에 안고 방 안으로 들어오며, 발로 베란다 문을 닫았다.
백기:
그리고 네가, ‘톡 찌르기’도 편하게 하라고.
2장
백기의 몸에는 정말로 잔상뿐이었고, 많은 상처는 이미 아물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상처 주변 피부를 스치자 그는 내 손을 잡고, 입술에 살짝 댔다.
백기:
안 속여. 며칠만 더 쉬면 괜찮아질 거야.
유연:
알았어요.
나는 웃으며 다시 그의 옷을 덮어줬다.
유연:
계속 달려오느라 피곤했죠? 바로 쉬는 게 어때요? 아니면 내가 뭐 좀 간단히 해줄까요?
백기는 잠시 말이 없었다.
백기:
나, 다시 특파팀에 들러야 해.
유연:
지금요?
백기:
뒤처리할 문서 작업이 좀 있어.
내가 오토바이 타고 먼저 왔거든. 다른 사람들보다 한 30분쯤 일찍 도착했지.
시간차 좀 이용했어. 먼저 너 보러 온 거니까 규정 위반까진 아니야.
그가 메시지에서 말했던 “최대한 빨리 갈게”라는 문장이 떠오르고,
그가 약간 눈꼬리를 구부리며 웃는 걸 보니, 어쩐지 은근한 자부심까지 느껴졌다.
유연:
그럼 언제 나가야 해요?
백기:
계산해 보면…… 걔네가 특파팀 도착하려면 15분쯤 남았고, 하차 후 집합까지 2분……
신호 안 기다리고 바로 날아가면, 도로 상황 좀만 빠르게 잡아도 8분 뒤에 나가면 돼.
그의 끝을 알 수 없는 계산법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진지한 눈썹을 매만졌다.
유연:
백 경관님, 혹시 말인데요, 그 8분을 그냥 좀 여유롭게 쓰는 건 가능하지 않아요?
백기:
불가능해.
그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며, 나를 품에 다시 꼭 안아왔다.
더 단단하고 깊숙하게.
8분이 지나자, 백기는 정확히 시간을 맞춰 특파팀으로 향했다.
일 마치고 곧 돌아오겠다고 했고, 나는 먼저 자라고 말했지만——
이미 그의 귀환 덕에 졸음 따위는 저 멀리 날아가 버린 뒤였다.
나는 아예 컴퓨터를 켜고, 작은 메모장을 꺼내 다가오는 발렌타인데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유연:
이 식당 괜찮아 보이네, 적어놔야지.
응? 중앙대로에서 시청 주관 발렌타인데이 이벤트도 한다고……?
정보들을 스크롤하며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유연:
발렌타인데이에 가볼 만한 데 좀 찾아봤어요.
올해는 행사도 많고, 가게나 거리마다 분위기도 다르니까 잘 정해야……
무심결에 대답하고 나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유연:
어……어라?

고개를 들자, 맑은 호박빛 눈동자에 시선이 꽂혔다.
백기가 창가에 한 손을 짚고, 내 메모장을 흥미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콧끝은 희미하게 붉었고, 내뱉는 숨결이 창문에 얇은 물안개를 만들고 있었다.
방금까지 뛰어온 듯, 숨도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유연:
선배, 어떻게 다시 왔어?
창문을 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한 발 물러나 하늘을 가리켰다.
백기:
눈이 오네.
그제야 나도 눈치챘다.
언제부터인지, 연모시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가늘고 조용한 눈송이가 도시를 덮고 있었다.
백기의 어깨와 머리칼에도 눈이 앉아, 그의 선이 밤공기 속에 더욱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그 단단한 눈매도 한층 유해져 있었다.
그 눈빛은 도시의 불빛보다도 더 찬란했고, 눈꽃이 그림처럼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유연:
……진짜 예쁘다.
내가 눈만 보고 있진 않다는 걸 알기라도 한 듯, 백기는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백기:
나가자.
그는 살짝 힘을 줘 나를 이끌었고, 우리는 함께 눈 내리는 밤으로 빠져들었다.
주황빛 가로등 아래, 눈송이는 조용히 내려앉았고 하늘에서 은하수가 흩날리는 듯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는 봄눈 속을 천천히 걸었다.
도시의 불빛은 희미했고, 대신 그 불빛은 우리의 앞길을 조용히 밝혀줬다.
유연:
문서 작업, 그렇게 빨리 끝낸 거에요?
백기:
……고진이 큰 명절인데 굳이 나까지 있을 필요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냥 나 쫓아냈어.
순간 내 머릿속에, 고진과 특파팀 팀원들이 그를 못 나가게 막다가 결국 짐 싸서 문 밖으로 밀어내는 장면이 그려졌다.
백기:
그리고 앞으로 며칠은 넌 나를 꼭 붙잡고 있게 하랬어.
또 누가 돌아가고 싶겠어.
백기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줄곧 번져 있었다.
유연:
백기 동지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저는 조직에서 내린 명령을 성실히 이행할 겁니다.
당신을 잘 쉬게 하고, 잘 즐기게 해드리죠.
백기:
그럼 유연 장관님, 앞으로의 작전 계획은 어떻게 되시죠?
메모장에 이것저것 써둔 것 같던데.
유연:
그게…… 발렌타인데이가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라서
대부분의 일정은 낮이나 해 질 녘에 잡혀 있어요.
유연:
그래서……
말할수록 목소리가 작아졌고, 민망하게 웃고 말았다.
하지만 백기는 이미 뭔가 생각한 듯, 내 손을 꼭 잡았다.
백기:
그럼 지금 가자.
유연:
……가자고요? 어딜?
대답 대신, 그는 나를 이끌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블랙이에 올라탔다.
나무 가지마다 장식등이 걸려 있고, 중앙대로의 상점들은 꽃과 네온으로 쇼윈도를 꾸며놓았다.
인도엔 알록달록한 간판이 걸린 작은 노점들도 늘어서 있었지만, 거리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다.
마치 이 모든 낭만이 오직 우리를 위해 준비된 듯했다.
백기:
아까 돌아오는 길에 이쪽 장식 보다가, 딱 네 생각나더라.
백기:
같이 보고 싶었어.
유연:
헤헤, 사실 나도 오늘 저녁쯤 여기 선배랑 같이 오려고 했는데.
그때는 길가 수공예 노점도 열릴 거고, 우리도 뭔가 같이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유연:
예를 들면…… 솜사탕 만들기! 나 진짜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어요.
봐, 저기 있는 저거야!
나는 솜사탕 기계가 놓인 작은 노점을 가리키며, 그를 이끌고 달려갔다.
지금은 조용히 잠들어 있는 노점.
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백기는 조용히 솜사탕 기계의 사용 설명서를 들춰보고 있었다.
백기:
……“직원 없이도, 자유롭게 사용 가능.”
백기:
이해했어.
그는 얇은 안내서를 금세 끝까지 넘긴 뒤, 기계 쪽으로 가서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건지 몰라도, 나도 함께 다가갔다.
백기:
해볼래?
유연:
당연하죠!
유연:
우리가 오늘 저녁에 하려던 거잖아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기가 버튼을 눌렀다.
솜사탕 기계가 가볍게 윙 하는 소리를 내며 작동을 시작했고, 옆의 장식등도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유연:
잠깐, 이래도 되는 거에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자——
백기:
원래 행인이 직접 작동할 수 있게 만든 거잖아.
조금 일찍 쓴다고 문제 될 건 없어.
끝나고 깨끗이 정리만 하면 돼.
그는 설탕 한 스푼을 퍼서 기계 안에 넣고 기계 입구에서 피어오른 새하얀 실을 대나무 꼬치에 돌돌 감기 시작했다.
유연:
진짜 괜찮은 거에요? 불법은 아니겠죠?
백기:
겁나?
그가 내 쪽을 힐긋 보며, 끝을 살짝 올려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
유연:
누가 겁났다고 그래!
나는 백기 옆에 바짝 붙어, 솜사탕이 점점 모양을 갖춰가는 걸 지켜봤다.
유연:
오, 제법인데요?
유연:
왠지 선배, 나 때문에 은근히 기술 스킬트릭 늘어난 것 같아요.
이젠 솜사탕 제조까지 마스터하는 거예요?
백기:
그렇지.
그는 한 손으로 솜사탕을 만들며 한쪽으론 자연스럽게 내 말에 응답했다.
백기:
널 사랑하니까.
유연:
……지금 그걸 자랑이라도……
농담하려다, 그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 깨닫자 내 얼굴이 먼저 반응했다.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라, 붉게 타오르듯 열이 올랐다.
솜사탕 기계 위에서 돌던 꼬치도 그 순간 멈춰 섰다.
백기는 멍하니 손에 들린 솜사탕을 바라봤다.
본인도 자기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놀란 듯했다.
흩날리는 흰 실이 여기저기 붙으며 기형적으로 변했고 완성되기 전 솜사탕은 엉뚱한 모양이 되어버렸다.
이윽고 그는 정신을 차리고 내게 솜사탕을 건네며 새로운 꼬치를 꺼냈다.
백기:
잠깐 멈췄더니 좀 못생겼네.
이건 네가 먹어. 내가 다시 만들어줄게.
유연:
……응, 알았어요.
나는 멍하니 그 삐뚤빼뚤한 솜사탕을 받아들고, 조심스레 한 입 베어 물었다.
말은 더듬였고, 백기의 목소리에도 평소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우린 그동안 여러 방식으로 서로의 마음을 나눈 적이 있었고,
“좋아해”란 말도 직접적이고 단호하게 해온 사이였다.
하지만 오늘 들은 “사랑해”란 말은——
익숙한 표현 속에서도 전혀 다른 떨림을 만들어냈다.
마음속에 이미 만개해 있던 꽃밭에서 새로운 새싹이 돋아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3장
노점마다 불이 밝혀지고, 기계는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단둘만의 수공예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유연:
음…… 다음 조각은 파란색이 예쁠까요, 흰색이 나을까요?
모자이크 조명 만드는 노점 앞에서 나는 양손에 색색의 유리 조각을 들고 비교하면서도, 시선은 자꾸 백기 쪽으로 흘렀다.
그가 방금 했던 그 말—— “사랑해.”
그 한 마디가 마치 잔잔히 흐르던 연못에 갑작스레 강물이 쏟아져 들어온 것처럼,
감정이 넘쳐흘렀다. 어디로 흘러야 할지 모를 정도로.
나도 그에게 대답해야 하나 싶었다.
‘나도 사랑해.’
혹은, 그저 자연스럽게 나온 말일 뿐일지도 모른다. 괜히 호들갑 떨 필요 없이.
나는 그의 습관도, 성격도, 말투도 잘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모든 행동과 말이, 왠지 새롭게 들렸다.
어느새 나는 그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시선 하나까지 의미를 새기듯 되짚으며—— 마치 아주 오래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백기:
파란색이 좋겠다.
네가 고르던 색도 챙겨봤어, 여기.
그의 손에서 유리 조각을 받으려는 순간,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고, 그가 아주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몸을 살짝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고——
우리 사이의 공기 속으로 그의 호흡이 흐르고, 그 호흡이 내 숨결을 타고 혈관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백기:
무슨 생각해? 계속 딴 데 정신 팔렸던데.
그리고 너, 아까부터 계속 나 훔쳐보고 있었지.
보고 싶으면, 대놓고 봐도 돼.
백기:
난 네 거잖아.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유연:
그, 그게…… 아까 그 말 생각나서……
백기:
“사랑해” 그 말 때문이야?
그가 정통으로 직구를 던지자 머리가 하얘졌다.
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백기:
얼굴 붉어졌네. 맞구나.
마음에 들었다면, 몇 번 더 말해줄 수도 있어.
유연:
잠깐만! 한 번만으로도 이미 정신없어요.
몇 번 더 하면 내 심장 감당 못 해요!
백기:
그럼, 싫다는 거야?
유연:
아니, 당연히 좋아하죠……!
백기:
그럼 말하지. 난——
나는 급히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유연:
그, 그만! 잠깐만!
유연: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단 말이야!
그는 입을 가려 말은 못 하지만, 눈썹을 살짝 치켜들며 말하고 있었다.
‘그걸 준비까지 해야 해?’
유연:
너무 갑작스러워 그래요……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랑해’란 말은——
영화 속에서 절정에 이르렀을 때야 나올 법한 대사 같달까.
사람들은 종종 그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고 돌려 말하거나, 눈빛에 담거나, 짙은 침묵 속에 담아두기도 한다.
그런데 그 말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 다가온 순간——
기쁨과 당황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도리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은 안도감과 그 모든 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기쁨.
그걸 표현할 말이, 정말 없었다.
유연:
아아, 나도 잘 모르겠어요!
유연:
차라리 나도 선배한테 한 번 말할게요.
그러면 지금 내 심정—— 기쁘면서도 정신없는 이 느낌,
선배도 직접 느껴봐요!
나는 생각나는 대로, 머릿속에 있는 말을 모조리 쏟아냈다.
논리도, 구조도, 상관없었다.
백기:
좋아. 말해봐.
백기:
나, 제대로 들을게.
그는 내 손을 자기 가슴팍 위에 올리고,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나를 테이블 사이로 가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조차 조심히 젖히고——그 어떤 방해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유연:
나……
백기는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장난기 어린 눈빛과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용기를 쥐어짜 내었다.
유연:
나, 사랑……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입까지 올라온 말은, 호흡에 막혀 다시 목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유연:
……
유연:
사랑……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오르는 얼굴을 백기의 가슴에 묻어버렸다.
유연:
계속 그렇게 빤히 보면……
분위기도 안 깔리고…… 말할 수가 없잖아요!
나도 나름 마음의 준비란 게 필요하다고요!
내 말은 점점 작아졌고, 목소리는 이미 작아질 대로 작아져 그의 가슴에서 작게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만이 들렸다.
유연:
기회를 좀 줘요, 백 경관님.
나도 아까 네 기분을 몰입형으로 체험하게 해줘야죠.
백기:
좋아. 기회 줄게.
백기:
나는, 네가 말 한마디에 얼굴 붉히고 가슴 뛰는 그 순간 기다릴게.
유연:
풍선 체크, 사진 준비 완료, 전구도 문제없고……
나는 손에 쥔 분위기 아이템들을 하나씩 점검했고,
이제 완벽하다는 확신이 들자 백기를 데리고 광장 한가운데의 ‘사랑나무’ 앞으로 갔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그 나무엔 소원을 담은 붉은 쪽지와 반짝이는 조명이 가득 걸려 있었다.
우리가 함께 만든 풍선을 곁에 놓고, 사진을 전구줄에 연결해, 나뭇가지 낮은 곳에 조심스레 걸었다.
반짝이는 조명, 맑고 선명한 밤——이 연인들을 위해 꾸며진 거리엔 낭만이 넘쳐흘렀다.
나는 백기 앞에 서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유연:
백기, 나——
“파직——”
그 순간, 광장의 장식등이 모조리 꺼졌다.
유연:
……
백기:
……
깜깜한 어둠 속에서, 우리 둘만 서로를 멍하니 바라봤다.
로맨틱한 분위기는 증발했고 남은 건 어색함과 말 없는 정적뿐이었다.
나는 축 빠진 풍선처럼 풀이 죽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유연:
하……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닌가 봐요……
유연:
다음엔 제대로 성공해서, 네가 내 말 한마디에 얼굴 붉히고
심장 쿵쾅거리게 만들게요.
다시 연애 버블 속에 푹 빠지게 해줄거라고요……
백기:
근데, 나는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아.
백기는 내 손을 더 꼭 쥐었고 그 힘에 이끌려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겨울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며 겨울꽃과 눈송이를 함께 데리고 와, 우리 주위를 감쌌다.
눈은 가로등 빛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고 어스름한 조도는 오히려 이 공간에 은근한 설렘을 더했다.
중앙대로의 조명이 하나둘 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의 모든 감각은 오직 백기에게만 집중되고 있었다.
그의 잔잔한 앞머리가 이마에 드리워지고, 숨결은 하얀 김이 되어 퍼졌다.
그는 아주 가까이 다가와 거의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고개를 살짝 돌려 내 귀에 속삭였다.
백기:
지금 분위기도, 나쁘지 않잖아.
나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목선을 따라 손끝을 움직였다.
그의 목젖을 스치고, 턱끝까지 닿았으며 손가락은 그의 귓불을 지나 마침내 그의 입술 앞에서 멈췄다.
백기는 모든 걸 이해한 듯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고 내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내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나는 살짝 발을 들었고——
막 입술을 맞추려던 찰나, 고개를 숙여 그의 목젖에 살짝 입을 맞췄다.
백기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숨조차 잠깐 멎은 듯했다.
유연:
백 경관님,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나는 그에게서 조금 떨어지며,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백기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내 손끝에 혀끝을 살짝 스치며 말했다.
백기:
……다음엔 안 봐줄거야.
4장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에 온몸이 잠식당하고 고층 건물들이 빠르게 뒤로 밀려나 흐릿한 벽처럼 이어졌다.
유연:
그래서——왜 갑자기 이렇게 오토바이 몰고 달리는 거에요——!?
백기:
스트레스 해소.
그의 목소리가 바람을 가르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백기는 핸들을 갑자기 꺾으며, 날렵하게 드리프트해 좁은 길로 진입했다.
유연:
뭐야? 백 경관님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요?
장난 반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그는 예상 외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백기:
사실 나도 긴장했거든.
오늘은 평소보다 속도도 빠르고, 커브도 더 깊게 눌러 돌고 있었다.
백기:
말은 아무렇지 않게 나왔지만, 그 뒤로 계속 마음이 걸렸어.
그냥 흘려보내기엔 아쉬운 일이니까. 나름대로 많이 고민했지.
유연:
근데 선밴 보기엔 엄청 여유 있어 보였는데요?
오히려 여러 번 말해줄 수도 있다며——
백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그건 이미 내 마음이 정해졌으니까.
백기:
그리고 너는……
가만히 있다가 멍해지고, 갑자기 수줍어지고, 그러다 긴장하고——툭 건드리면 얼굴 확 붉어지고.
백기:
……엄청 귀여웠어.
유연:
뭐야, 선배! 일부러 그러는 거죠!
백기:
좋아하는 걸 보면 원래 사람은 멈출 수 없는 거야.
어쩔 수 없어.
백기:
유연아.
——사랑해.
유연:
이건 반칙이야!
백기는 웃으며 방향을 바꿔 연모시 외곽 쪽으로 향했다.
속도 제한과 안전 범위 안에서, 은근히 실력을 과시하듯 블랙이를 몰았다.
유연:
그럼 언제 그렇게 마음 정한 거예요?
백기:
널 보고 있으면 알겠더라.
유연: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지 말고 좀 더 얘기 좀 해봐요.
나는 그의 옆구리를 꼬집듯이 집었다.
유연:
선배는 원래도 말 열 개 중에 세 개는 숨기고,
내가 기를 쓰고 캐내도 나오는 건 하나나 두 개뿐이거든요?
요즘 들어 조금씩 “진실한 태도”를 보이긴 하는데——
습관은 여전한 거 같아요?
백기:
너무 서두르지 마.
네 지도를 헛되이 하지 않게 차차 보여줄게.
점점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고 동쪽 하늘에는 어슴푸레 빛이 들기 시작했다.
기울어진 커브를 마지막으로 지나자 시야가 가장 확 트인 곳에 도착했고 백기는 그곳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발아래 펼쳐진 도시는 점점 밝아졌고 수많은 고층 빌딩과 멀리 보이는 다리 위로 갓 떠오른 햇살이 은은하게 내려앉았다.
밤새 내리던 눈도 어느새 멎어 있었다.
백기:
유연아, 내 주변엔 항상 확실하지 않은 일들뿐이야.
그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고 입김이 서린 공기가 새벽빛 속에서 서서히 흩어졌다.
백기:
예전엔 항상 무언가를 말하려면 충분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백기:
근데 막상 말하고 나니까——
그게 생각보다 더 자연스럽더라.
숨 쉬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나왔어.
백기:
오히려 내 인생에서 제일 확실한 말이더라고.
그의 눈동자에 희미한 아침 햇살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숨조차 잊은 채 멍해져 있었다.
백기:
나도 결국, 분위기랑 심리적 준비가 좀 필요했던 거지.

해가 지평선 위로 솟구쳤고 하늘은 형형색색의 아침놀로 물들었다.
갓 내린 눈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도시는 잠에서 깨어났으며 우리를 감싸는 하늘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산등성이를 넘어 불어온 바람이 멀리까지 흘러갔다.
이건 분명, 백기다운 방식의 로맨스였다.
그는 내 허리를 끌어안아, 나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백기:
처음엔 그냥 말해버렸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제대로 말하고 싶었어. 좀 더 정식으로.
백기:
다시 할게.
그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고, 다시 눈을 떴을 땐 그 안엔 따뜻함과 함께 망설임 없는 확신이 빛나고 있었다.
백기:
유연아——
사랑해.
그의 말은 진지했지만, 결코 무겁지 않았다.
마음속의 감정이 마치 바람에 흔들린 물처럼 소용돌이치며 넘쳐흘러, 다른 연못으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키스는 뜨겁고도 솔직했다.
숨결이 섞이고, 체온이 스며들고——
살짝의 닿음만으로도, 마치 나라는 존재가 그와 하나로 녹아드는 듯했다.
마치 머릿속에서 폭죽이 연이어 터지며 눈부신 빛을 내뿜는 듯했다.
가슴이 미칠 듯 뛰었고 백기의 심장 박동 역시 내 몸에 그대로 전해졌다.
말로는 부족한 감정을 작고도 깊은 입맞춤으로 주고받으며 우리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했다.
유연:
백기……
무심결에 그의 이름을 부르자 내 목소리는 예상 못한 떨림으로 울렸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다시 입술을 맞췄고, 내게 더 많은 사랑을, 더 많은 숨결을 끌어내려 했다.
그의 체온은 뜨겁게 달아올라
내 피부 곳곳으로 번졌고——그 온기가 너무 뜨거워 타버릴 것 같았지만 그가 없이는 식을 수 없는 열기이기도 했다.
상반된 감각 속에서 나는 점점 더 그를 원하게 되었고,
나의 모든 작은 반응은 백기의 강렬한 응답으로 돌아왔다.
누가 내뱉었는지도 모를 숨 섞인 탄식이 우리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다시 이어진 입맞춤은 더욱 깊고도 격렬하게 서로의 마음을 담아냈다.
나는 눈을 감고 온몸으로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내 마음도 고스란히 그의 품에 안겼다.
모든 게 전날과 다르지 않은 듯했지만——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멀리 빌딩의 전광판은 커다란 하트 모양을 비추며 오늘이 사랑의 날임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오토바이에 기대어 앉아 백기와 함께 도시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유연:
뭔가 오늘 하루가 이미 꽉 찬 발렌타인 같아요……
근데 아직 시작도 안 한 거였네요.
백기:
네가 원한다면 앞으로 매일을 그렇게 만들어줄 수 있어.
백기:
하지만 우선은 네 메모장에 적어둔 계획부터 전부 실현시켜야겠지.
하나하나 다 설레는 거니까.
유연:
당연하죠.
나는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유연:
왜냐면
나도 백기, 선배를 사랑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