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신반의하며 고진을 따라 요양원에 도착한 나는 백기의 모습을 발견하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나와 고진을 본 백기는 곧바로 고진의 꿍꿍이를 알아차리고 반격에 나섰다.
01장
고진
도착했다.
고진이 차를 세우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차에서 내렸다.
높이가 제각각인 건물 여러 채가 눈앞에 펼쳐졌다. 멀리 밀려오는 파도는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에 잠겨 있었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들은 곳곳에 반짝이는 빛의 흔적을 남겼다.
바닷바람을 타고 짙은 바다 내음이 밀려왔다. 싱그럽게 우거진 초목의 향기와 어우러진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유연
여기 환경이 정말 좋네요.
고진
당연하죠. 여기 예약하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고진
그런데 이런 ‘복지 혜택’도 아무 대원이나 받을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고진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입을 삐죽 내밀더니, 능숙하게 트렁크에서 내 짐을 꺼냈다.
유연
그런데 선배가 정말 여기 있어요?
고진
제가 유연 씨를 속여서 뭐 하겠어요. 걔는 임무 끝내고도 할 일이 산더미였어요. 보고서 올려야지, 회의해야지.
고진
오늘 아침에야 연모시로 돌아와서는…… 상관도 만나고. 맞다, 마침 그 상관도 이쪽에 올 일이 있어서 같이 온 거예요.
고진
여긴 사실상 우리 쪽 사람들만 이용하는 요양원이라 좀 특수하거든요. 그래서 유연 씨한테 직접 전화하기가 어려워서 저더러 데리러 가라고 한 거죠.
듣고 보니 앞뒤가 맞는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백기가 임무를 마친 뒤 곧바로 내게 전화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아직도 백기의 휴대전화가 연결되지 않는 상태라는 점을 생각하면…… 고진이 설마 나를 속이기야 하겠어. 결국 나는 고진을 따라 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고진
황 선생님, 아침에 나가기 전에 예약했던 거요. 백기 가족분이요.
고진은 익숙한 듯 내 입소 수속을 대신 처리해 주었다. 하지만 객실 카드키를 받고도 바로 방으로 안내하지 않고, 오히려 어느 홀을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떠들썩한 대화 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모퉁이를 돌기 직전, 고진은 비밀이라도 있는 듯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벽 모퉁이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손가락을 까딱이며 나에게 고개를 내밀어 보라고 했다.
멀지 않은 곳에 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이 있었다. 나이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한데 모여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인파 사이로 낯익은 얼굴 하나가 보였다.
며칠 만에 보는 백기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피로를 애써 감추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지친 기색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면서도 절제된 태도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눈썹 사이로는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조금씩 드러났다.
남자 A
자네가 바로 백기라는 친구구먼!
청년
저희 대장님한테 선배님 활약상은 진작부터 들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훈련하신 겁니까?
여자 A
전에 우리 팀에 지원 나왔을 땐 못 만났는데, 이번에야 드디어 얼굴을 보네요.
남자 B
누구, 누구라고? 네가 백기란 녀석이야? 아이고, 정말 훌륭하게 컸네! 장 형 기억하나? 그 친구한테 자네 얘기를 얼마나 들었는지 몰라.
여자 B
백 대장님, 특수행동팀에서는 아직 의무병 모집 안 하나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꽤 괜찮은 인재가 있는데요.
백기
……여러분이 말씀하시는 것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그건 여기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니까요.
아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서로 낯선 사이지만 같은 전장에서 싸워 온 동료들이기에, 백기도 이들 앞에서는 차갑게 굴기가 어려운 듯했다.
백기
그럼 저는 이만……
여자 A
백 대장님, 다음 달에 시간 있으세요? 저희 국에 오셔서 강연 한 번 해 주세요. 경험담만 들려주셔도 좋으니까요!
백기
제가 특별히 말씀드릴 만한 건 없는데……
백기
……정말 필요하시다면 나중에 본부에서 적임자가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백기
그럼 저는 먼저……
청년
백 대장님! ‘11·6 대형 사건’ 얘기 좀 해 주시면 안 됩니까? 그때 사건을 풀어 가신 방식이 정말 기발하던데요!
백기
……그건 우선 사건 관련 자료를 읽어 보시면 됩니다. 거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요. 저는 이만……
여자 B
백 대장님!
고진이 웃음을 참는 동안, 백기가 자리를 뜨려 할 때마다 사람들의 열띤 질문이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백기의 미간은 점점 더 깊이 구겨졌다.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나자,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얼굴에 역력해졌다.
백기
일단 여자 친구한테 전화부터 한 통 하게 해 주시면 안 됩니까? 돌아온 뒤로 아직 연락도 못 했습니다!
백기
걱정하고 있을 거라고요!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급하게 자리를 벗어나려던 백기의 발걸음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백기
……! 유연이 네가 어떻게……!
그는 눈을 크게 뜨더니 다급하게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내 앞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 놀라움도 잠시, 고진이 모습을 드러내자 백기의 얼굴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
고진은 그런 반응을 못 본 척하며, 친한 친구답게 백기의 어깨에 팔을 척 걸쳤다.
고진
진정한 친구가 뭔지 알아? 칼산이든 불바다든 함께 가는 거야. 요양원에 들어가더라도 당! 연! 히! 같이 가야지!
고진
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주냐. 여자친구 분까지 친히 모셔 왔는데.
백기
내가 보기엔 너 혼자 ‘감옥살이’ 하기 싫었던 것 같은데.
백기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고진의 팔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고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이제 ‘탈옥’할 생각은 접어라.
고진
네가 한 번도 안 오고 멀쩡한 복지 혜택을 안 누리니까 류 부장님이 직접 나선 거잖아! 원망하려면 널 원망해!
백기
말은 꼭 너는 와 본 것처럼 한다? 그리고 류 부장님이 사람 협박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이냐? 넌 그걸 진짜 믿었어?
고진
이번엔 뭐라고 하셨는지 들어나 봤어?
고진
이번에도 와서 안 쉬면 앞으로 휴가는 일절 승인 안 해 준대. 그냥 죽을 때까지 일만 하라고!
두 사람은 말다툼을 하다가 급기야 서로 붙잡고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웃음을 터뜨리며 그제야 이 소동의 전말을 대강 이해했다.
아마 특파팀의 고급 복지 혜택에는 매년 요양원에서 쉴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그 혜택을 받을 자격이 생긴 뒤로도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고, 결국 류 부장이 직접 명령을 내린 듯했다.
고진은 앞으로도 휴가를 쓰기 위해 결국 굴복한 것이다. 하지만 혼자만 굴복하기는 싫었는지 백기까지 끌어들였다.
무슨 수로 백기를 이곳에 오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까지 함께 ‘납치’해 왔으니 일단 그의 계획은 성공한 셈이었다.
고진
따지고 보면 이게 서로 좋은 거 아니냐? 우리 둘 다 여기 안 오면 앞으로 휴가를 어떻게 쓰겠어. 안 그래?
그 말을 들은 백기가 갑자기 웃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진의 팔을 밀어내던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오히려 자신의 팔로 고진의 목을 단단히 휘감았다.
백기
하나만 알려 주지. 네 휴가는 류 부장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야.
백기
내가 결정하지.
백기
이번에 푹 쉬어 둬. 앞으로는 죽을 때까지 일하게 해 줄 테니까.
*
백기와 함께 방으로 돌아와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나눈 뒤, 그는 내 말을 듣고 이곳에 남아 요양하기로 했다. 백기가 요양원 곳곳을 소개해 주면서 우리의 일상은 한결 단순하고 여유로워졌다. 앞으로 며칠 동안은 이렇게 평온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던 때, 누군가 우리 방문을 두드렸다.
02장
백기
다음부터 누가 널 찾아오든 상대하지 마. 아예 문도 열어 주지 않는 게 좋겠어.
주변이 온통 시끌벅적한 가운데, 백기는 고진과 더 말다툼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넨 뒤 내 손을 잡고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갑작스럽게 뜨거운 품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두 발이 거의 허공에 뜰 정도였다.
길고도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안정된 심장 박동이 느릿느릿 전해져 왔다.
백기
일부러 전화 안 한 건 아니야.
백기
일을 다 끝내고 나니까 한밤중이더라고. 그래서 아침에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어.
어깨에 얼굴을 묻은 탓에 그의 목소리는 조금 먹먹하게 들렸다. 하지만 이를 악무는 듯한 분함은 여전히 감추지 못했다.
백기
그런데 그 녀석들이 미리 짜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돌아오는 길에 내가 잠든 틈을 타서 여기로 데려다 놓은 거야.
백기
잠에서 깨서 차에서 내렸더니 원장님이 벌써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시더라. 붙잡고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시는데……
백기
그다음엔 또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백기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집에도 못 가고.
나는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덩달아 마음까지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유연
선배도 참 바보예요. 전 선배가 오늘 돌아오는 줄도 몰랐는데.
유연
뭘 그렇게 서두른 거예요?
백기
네가 날 조금이라도 빨리 볼 수 있게 해 주려고.
그가 고개를 들고 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내 입술 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백기
나도 널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었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입술 가까이에서 흘러나왔다.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그는 참지 못하고 몇 번이고 다시 입을 맞췄다. 그리움이 가득 담긴 숨결이 서로 뒤섞였다. 마치 서로의 숨결이 있어야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는 것 같았다.
유연
그래도 다들 좋은 마음으로 그랬다는 건 선배도 알잖아요.
유연
여기 환경도 꽤 좋은데, 이참에 좀 쉬어 가는 것도 괜찮지 않아요?
백기
난 멀쩡하거든.
백기
누가 스무 살도 한참 넘은 나이에 요양원에 들어가냐.
그가 코웃음을 치더니,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조금 으스대며 두 팔을 벌렸다.
백기
봐. 이번 임무에서는 하나도 안 다쳤어.
유연
그럼 우리 특수경찰님, 정말 훌륭하시네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늘 하던 대로 그의 몸에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한 뒤 다시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유연
여기 풍경도 정말 좋잖아요.
유연
저도 얼마 전까지 야근하느라 엄청 피곤했거든요.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지휘관님 덕 좀 보게 해 주세요.
나는 알고 있었다. 백기는 자신이 하는 일이 이런 특별한 복지 혜택을 받을 만큼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기회가 생긴 만큼, 나도 내심 그가 조금이라도 더 편히 쉬고 즐겼으면 했다.
백기가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너무도 짙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고, 이윽고 그 모든 것이 나지막한 한숨으로 모였다.
백기
네 말대로 할게.
유연
그럼 제가 여기 안 왔어도, 전화로 여기 남아서 쉬라고 하면 말을 들었을 거예요?
백기
그건 못 듣지.
그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반항기 어린 웃음을 당당하게 지었다.
백기
네가 전화하기도 전에 ‘탈옥’해서 집으로 돌아갔을 테니까.
유연
정말, 선배도 참.
나는 웃으며 그의 코를 살짝 꼬집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역과 연령대가 다양한 투숙객들을 고려한 것인지, 방은 산뜻하면서도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다. 어딘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멀리 펼쳐진 푸른 바다는 창문을 가장 아름다운 장식 창처럼 만들어 주었다. 벽 한쪽에는 싱글 침대가 놓여 있었고, 침대 옆 협탁 위의 하얀 장식 꽃은 바람을 따라 살랑거렸다.
나는 손에 든 객실 카드키를 내려다보았다. 내 방은 마침 백기의 바로 맞은편이었다.
그도 제대로 쉬지 못했을 테니, 나는 일단 여행 가방을 끌어당겼다.
유연
선배는 먼저 푹 자요. 저는 가서 짐부터 정리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이 갑자기 앞으로 당겨졌다. 다음 순간, 나는 푹신한 침대 위로 넘어졌다.
비좁은 싱글 침대에서는 서로 빈틈없이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 옆으로 누운 나는 백기의 품에 단단히 안긴 채 등을 벽에 대고 있었다.
백기
너무 졸려. 같이 좀 자자.
뜨거운 숨결이 후텁지근한 공기와 뒤섞여 목덜미에 닿았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지만, 그럴수록 나를 감싼 팔은 더욱 단단해졌다.
밀착된 피부 때문에 후끈한 공간의 온도는 계속 올라갔다. 얇은 옷자락 너머로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고, 벽에 닿은 등에서 느껴지던 서늘함마저 서서히 열기로 물들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뜨거운 숨결이 가슴 깊이 스며들자 마치 피까지 달아오르는 듯했다.
유연
……이러면 선배 잠도 제대로 못 자잖아요.
백기
이래야 잘 자지.
그가 느긋하게 웃었다. 가벼운 입맞춤이 눈가를 따라 입술 끝까지 이어지더니, 이내 애틋하게 내 입술을 어루만지듯 맞닿았다.
백기
네가 옆에 있어야 좋은 꿈을 꿀 수 있으니까.
나는 그의 입맞춤을 받으며 저절로 미소 지었다. 그가 푹 잘 수 있도록 일단 잠들 때까지 곁에 있다가, 나중에 살며시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입술 사이를 맴돌던 입맞춤은 부드러운 애무를 따라 점점 깊어졌다.
조금 더 가까워질 때마다, 그는 또 한 걸음 더 다가오려 했다.
뜨거운 손바닥이 내 뒤통수와 벽 사이를 받치고 있었다. 나는 더는 물러날 곳도 없이 그가 마음껏 나를 파고들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귓가에서는 파도 소리가 넘실거렸다. 땀에 젖은 옷자락 때문에 살짝 스치는 마찰마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예민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찔할 정도로 그의 체온 속에 녹아드는 것 같았다. 아니면 오히려 그를 녹여 내 몸의 일부로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유연
……졸리다면서요. 자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백기
내가 잠들면 몰래 빠져나갈 생각이었지?
그윽한 눈동자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욕망이 가득했다. 내가 순간 멈칫하자 그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백기는 더욱 가까이 다가와 내가 미처 꺼내지 못한 변명과 목구멍에서 새어 나온 가쁜 숨결까지 삼켜 버렸다.
우리는 함께 밀려드는 파도 속으로 빠져들었다.
백기
잠이 안 오면 내가 도와줄게.
유연
선배, 여기 식당 밥은 특파팀 식당보다 맛있어요?
백기
좀 너무 싱거워.
유연
여긴 요양원이잖아요. 설마 고추를 열 개씩 넣어 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전문 특수경찰들을 위한 요양원답게 시설은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정해진 하루 세 끼 식사 외에도 재활 훈련을 위한 전문 시설과 운동 기구가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매일 오후에는 의료 전문가들의 강의와 교육도 진행되었다.
둘째 날 아침, 우리는 규정에 따라 먼저 각자 건강검진을 받은 뒤 요양원 곳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는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쳤다. 누군가는 걸음이 불편했고, 누군가는 부드럽고 친근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에게는 공통으로 느껴지는 꼿꼿한 기품이 있었다.
백기
이런 요양원은 전국 여러 도시에 있어. 어느 곳이든 신청할 수 있고.
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눈치챈 듯 백기가 웃으며 설명했다.
백기
그래서 다른 도시에서 온 사람들도 꽤 많이 볼 수 있어.
유연
그러니 이렇게 북적북적하군요. 그런데 그러고 보니 고진 씨는 왜 안 보이지?
백기
경고 문자 보냈어.
백기
앞으로도 휴가를 쓰고 싶으면 내 휴식은 방해하지 말라고.
여름이 자유로운 바닷바람에 실려 우리의 맞잡은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 빛은 보석처럼 찬란했다.
우리는 밀려오는 파도 위를 밟으며 걸었다. 눈부신 빛의 조각들이 가볍게 춤추듯 세상의 눈동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빛은 하늘 끝까지 잘게 부서져 나가며 굽이치는 황금빛 물결을 이루었다.
온몸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 같다가도, 한편으로는 바닷바람에 섞여 날아갈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손을 맞잡은 채 시간이 느긋하게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고, 햇살 사이에 숨어 입을 맞췄다.
이토록 평온하고 다정한 시간은 잔잔한 바다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백기에게 쌓인 피로를 달래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없이 기쁘게 했다.
그가 푹 쉴 수만 있다면,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날 아침, 오늘은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우려던 참이었다. 그때 백기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
백 대장님, 실례하겠습니다. 맹 주임님께서 사무실로 한번 와 달라고 하십니다.
청년은 잠시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청년
가족분이 계시다면 꼭 함께 와 주시기 바랍니다.
*
안내에 따라 맹 주임의 사무실을 찾은 우리는 백기의 몸 상태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그동안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숨겨진 부상들.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나는 백기가 너무나 안쓰러워 가슴이 아팠다……
03장
안내받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방 안에는 인자한 인상의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맹 주임
안녕하세요, 백 대장. 아가씨도 들어와서 함께 앉아요.
그녀는 눈을 가늘게 휘며 웃더니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친근한 미소 덕분에 알 수 없이 긴장되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녀는 우리 두 사람을 부드러운 눈길로 살핀 뒤 책상 위의 A4 용지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맹 주임
오늘 두 분을 부른 건 간단히 이야기를 좀 나누기 위해서예요——
맹 주임
백 대장, 본인의 몸 상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백기는 잠시 멈칫하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눈을 빠르게 몇 번 깜빡인 뒤 조심스럽고 망설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백기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맹 주임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백기를 바라보았다.
백기
……괜찮은 편 아닌가요?
맹 주임
네, 괜찮은 편이긴 하죠.
우리 둘 다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순간, 맹 주임이 A4 용지를 들어 올리며 안경을 고쳐 썼다.
맹 주임
다만 아킬레스건에 상당히 심한 만성 손상이 있어요. 급성 아킬레스건염으로 이어질 위험이 매우 높고요.
맹 주임
그리고 예전에 무릎 인대가 심하게 늘어난 적이 있죠? 이미 퇴행성 변화가 진행되고 있어요.
맹 주임
전신 여러 부위에 근육 손상도 있고요. 전에 갈비뼈가 부러진 적도 있죠?
맹 주임
갈비뼈 골절로 늑간 신경이 손상되고 자극을 받아서 일반인보다 늑간 신경통이 발생하기 쉬운 상태예요.
맹 주임
또 어깨 관절에 강한 외부 충격을 받은 적도 있네요. 그때 근육과 인대 같은 연부 조직이 손상됐는데, 제대로 회복되지 않으면 습관성 탈구로 이어질 수 있어요.
맹 주임
장기간의 과도한 훈련 때문에 팔꿈치 관절에도 피로성 손상이 생겼어요. 충분히 쉬면서 회복하지 않으면 더 심각한 골관절염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아주 높고요.
맹 주임
이게 바로 백 대장이 말한, ‘괜찮은 편’인 몸 상태예요.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귀를 찌르는 잡음만 남은 것 같았다.
또렷하고 단호한 설명이 갑자기 아득히 멀어져, 끊어질 듯 말 듯 귓가에 흘러들었다.
맹 주임이 안경을 벗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나는 그 어렵고 낯선 의학 용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백기의 몸에는 눈에 띄는 상처 외에도 격렬한 활동을 거듭하며 쌓인 수많은 손상이 있었다.
그 손상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조금씩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느새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나는 굳어 버린 몸을 억지로 움직여, 나만큼이나 넋이 나간 백기를 바라보았다.
백기
어딘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백기
저는 몸 상태가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도 신경 쓰고 있고, 다친 곳도 없는데요.
맹 주임
몸은 꼭 상처가 나야만 다쳤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게 아니에요.
맹 주임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에는 온기가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기의 뒤로 다가갔다. 오른손으로 그의 등 윗부분 한 곳을 누르면서, 왼손으로는 그의 팔을 일정한 각도로 비틀었다.
백기
윽!
백기는 거의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순식간에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맹 주임
아파요? 그럼 아직 치료할 여지는 있겠네요.
백기
누구라도 어깨를 그렇게 비틀면 아플 겁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것처럼, 백기는 어깨를 감싸 쥐고 반박했다.
하지만 맹 주임은 그의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곧장 내 뒤로 다가와 같은 부위를 누르는 듯하더니 내 팔도 들어 올렸다.
은은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백기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아파했던 것과 달리, 내게는 그저 약간 뻐근하고 당기는 느낌이 전부였다.
맹 주임
사무실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긴 편이죠? 평소에 운동을 좀 더 해 보세요.
맹 주임의 차분한 말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나는 무심코 백기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백기가 당황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동공이 순간적으로 수축하더니, 반사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충격, 의심, 혼란, 분노…… 그리고 자책.
너무나 많은 감정이 짙은 먹물처럼 흘러나와, 세상을 숨 막히는 침묵으로 가득 채웠다.
맹 주임
백 대장, 지금 몸 상태를 고려해서 앞으로의 일정을 짜 두었어요.
맹 주임
물리치료와 재활 운동을 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시간도 모두 적혀 있어요. 주의하거나 삼가야 할 사항은 담당 재활치료사가 알려 줄 거예요.
맹 주임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할게요. 앞으로 당분간은 Evol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해요. 백 대장의 능력은 몸에 상당한 부담을 주니까요.
맹 주임
물론 이 일정은 강제 사항이 아니에요. 원한다면 지금까지 하던 방식대로 계속 지내도 되고요.
맹 주임이 서류철 하나를 우리 쪽으로 밀어 주었다. 그제야 나는 그 온화한 얼굴 아래 감춰져 있던 분노와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녀는 백기와 같은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 왔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지키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돌보는 데는 서툰 사람들.
백기는 옆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나는 두툼하게 쌓인 서류를 바라보며, 밀물처럼 밀려오는 막막함과 슬픔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동안 서류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 맹 주임을 바라보았다.
유연
선배가 이 일정대로 치료받기로 하면, 저도 옆에 있어도 될까요?
맹 주임
물론이죠.
곁눈으로 보니 내 말에 백기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하지만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백기
괜찮아, 유연아.
백기
나 치료받을게.
사무실을 나온 뒤, 백기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초조하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정작 하려던 말은 좀처럼 꺼내지 못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나온 것은 그저 짧고 힘없는 한마디였다.
백기
나 치료받을게.
그런 백기를 바라보자 가슴이 더욱 아프게 조여 왔다.
그는 우리 사이의 약속을 잘 지키고 있었다. 다치지 않으려고 꾸준히 노력해 왔다.
다만 백기에게는 눈에 보이는 상처가 없다는 것이 곧 아무 문제 없이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나조차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아픈 사람은 백기였고, 자책하고 미안해하는 사람도…… 여전히 백기였다.
뜨거운 무언가가 목을 타고 자꾸만 치밀어 올랐다. 눈시울이 달아오르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하지만 나는 힘껏 숨을 들이마셔 속상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그의 손을 꼭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유연
선배, 너무 긴장하지 마요. 화난 거 아니니까.
유연
선배는 지금까지 충분히 잘해 왔어요. 게다가 그건 다 일하면서 쌓인 손상이잖아요. 저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이고요.
유연
그러니까 이제 선배가 해야 할 일은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는 거예요.
백기
알았어.
유연
‘시간표’대로 수업도 꼬박꼬박 듣고, 절대 ‘땡땡이’치면 안 돼요.
백기
알았어.
유연
그리고 밤에도 선배랑 한 침대에 끼어 자지 않을 거예요. 선배는 푹 쉬고 잠도 잘 자야 하니까요.
백기
알았어…… 아니, 잠깐!
그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단호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백기
장관님, 이 부분은 좀 협상할 수 있지 않을까?
유연
협상은 없어요.
백기
그건 별로 영향 없잖아.
유연
안——돼——요.
백기
조금도 안 돼? 하루는? 사흘은? 사흘 정도는 괜찮잖아?
유연
하루도 안——돼——요.
모처럼 경쾌하게 이어지는 우리의 실랑이가 바닷바람을 타고 길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담아 둔 말 없는 기도도 그 바람에 함께 실어 보냈다.
바람이 그의 몸에 깃든 모든 고통을 데려가고, 그에게 자유를 안겨 주기를.
*
백기는 정해진 일정에 따라 물리치료와 재활 운동을 받았다. 치료를 통해 그의 몸이 점차 회복되는 모습을 볼수록, 나는 그동안 백기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홀로 견뎌 왔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밤이 찾아왔을 때, 나는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백기가 내 앞에 나타났다……
04장
그날 이후 백기는 모든 일정을 철저히 지키며 물리치료와 재활 운동을 받았다.
치료사
매일 아침 물리치료실에 와서 20분 동안 적외선 치료를 받으세요. 2주 뒤에 회복 상태를 다시 확인할게요.
치료사
지금 느끼는 정도의 통증은 몸과 뇌가 이미 익숙해진 상태예요. 하지만 사실 그건 몸이 보내는 경고 신호거든요.
치료사
조금 아플 수도 있어요. 참기 힘들면 바로 말씀하세요. 절대 억지로 버티지 마시고요.
치료사
힘을 너무 주지 말고 평소처럼 편안하게 계세요…… 힘주지 말라니까요! 긴장 풀어요!
치료사
이 자세는 손상된 근육을 스트레칭하는 데 도움이 돼요. 오늘은 모두 다섯 세트 진행할 거예요.
치료사
기구를 그렇게 힘껏 들어 올릴 필요 없어요. 힘 빼세요! 근육을 올바르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부터 배우셔야 해요.
치료사
오늘 전기 치료가 끝나면 침 치료 40분을 추가해 뒀어요. 우 선생님 시간이 비었으니 그분께 받으시면 돼요.
치료사
평소 운동량은 유지하셔도 괜찮아요. 첸 선생님이 저희 전담 트레이너인데, 운동을 계속하면서도 예전 부상이 악화되지 않도록 도와주실 거예요.
치료사
축구나 농구처럼 몸에 부담이 크고 격렬한 운동은 피하세요. 대신 수영은 괜찮아요. 트레이너가 수중 훈련도 도와드릴 거예요. 물의 부력 덕분에 관절에 가해지는 부담이 줄어들거든요.
백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치료 과정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불평하거나 거부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물론 힘을 조절하고 몸의 긴장을 푸는 법을 배우는 데는 여전히 서툴렀다. 의사가 다급하게 제지할 때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손을 거두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느리더라도 진지하게 자신의 몸을 알아 가고 있었다.
나 역시 의사가 쉬는 틈을 이용해 마사지 요령과 스트레칭 방법을 적극적으로 물어보았다.
백기가 물리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각종 강의에 참석해 관련 지식을 쌓았다——
그렇게 더 깊이 알아 갈수록, 나는 백기의 몸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있는지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
때로는 내가 백기보다 더 바쁘게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런 것들뿐이었다.
하루하루가 빼곡한 일정으로 채워졌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할 틈이 없도록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머릿속을 더 중요한 것들로 가득 채우려고 애썼다.
치료사
오늘은 몸이 좀 어떠세요?
백기
……몸이 굉장히 가벼워진 느낌입니다.
치료사
전에는 온몸에 20킬로그램이 넘는 납덩이를 매달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이제야 조금씩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오고 있는 거죠.
백기
……그런 겁니까?
치료사
마지막으로 몸이 이렇게 가볍다고 느꼈던 게 언제였어요?
백기
모르겠습니다.
치료사
……통증에 익숙해지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에요. 그러다 보면 통증을 판단하는 감각이 점점 무뎌지거든요.
치료사
자, 이제 엎드리세요.
유연
……
나는 조용히 한쪽에 서 있었다. 손끝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었다. 눈시울이 조금씩 뜨거워졌다.
백기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자, 나도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물리치료실을 나왔다.
그 뒤로는 강의 내용이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신기하다는 듯 팔을 움직이고,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어 보며 몸의 변화를 느끼던 백기의 모습만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억지로 강의에 집중했다.
저녁 산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평소처럼 백기의 내일 일정과 내가 들을 강의를 확인했다.
재활 훈련 계획표에 하나둘 체크 표시가 늘어나는 것을 바라보다가 창가에 마련된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낮 동안 배운 마사지 방법과 관련 지식을 복습하기 시작했다.
유연
손상되기 쉬운 근육의 스트레칭…… 허벅지 대퇴사두근, 햄스트링, 내전근, 종아리의 하퇴삼두근……
유연
근육이 뻗은 방향을 따라서…… 만성기에는 근육을 밀어 주는 방법으로 회복을 촉진할 수 있고……
유연
대퇴사두근 손상 검사…… 손을 종아리에 대고…… 무릎을 펴는 동작……
나는 내 몸을 이용해 동작을 하나하나 따라 해 보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눈앞에 또다시 백기의 놀란 눈동자가 떠올랐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랬을까. 그는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극심한 압박 속에서 온몸을 긴장시키고, 자신의 모든 것을 조금씩 소모해 온 걸까.
빼곡하게 적힌 시간표와 필기 내용이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방 안에는 오직 달빛만이 나와 함께하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백기가 이 길을 선택한 뒤 얼마나 많은 고통을 마주해야 했는지.
하지만 그 고통이 실제로 글자로 적혀 눈앞에 펼쳐지자, 보이지 않던 상처들이 이토록 선명하고 끔찍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들어 보았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의 승리와 눈부신 활약을 찬양했다.
하지만 그 영광스러운 기념비는 대체 얼마나 많은 상처가 쌓여 만들어진 것일까.
그는 자신의 몸이 그렇게 가벼워질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마지막으로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던 때가 언제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백기를 매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백기 앞에서는 차마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그는 요 며칠 동안 내가 걱정할까 봐 자주 조마조마해했다. 내가 울기까지 한다면, 정작 아픈 사람인 백기가 오히려 더 미안해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슬퍼졌다.
유연
……울지 않기로 했잖아.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왔다. 몇 번이고 닦아 냈지만 도무지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애써 깊이 숨을 들이마시려 했다. 그러다 고개를 든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부드러운 달빛을 두른 백기가 창밖에 떠 있었다. 그 역시 놀란 듯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시간이 그대로 멎어 버린 것 같았다. 눈물을 닦던 손도 뺨 위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유연
선배! 의사 선생님이 Evol 쓰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러나 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창문을 넘어 들어와 내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창문으로 간간이 들어오는 밤바람이 아직 마르지 않은 뺨의 눈물을 일깨웠다.
나는 그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깨닫고 황급히 입술을 삐죽 내밀며 시치미를 뗐다.
유연
대답해 봐요. 몰래 Evol 쓰다가 저한테 딱 걸린 거죠?
백기
네가 울었어.
유연
……제가 왜 울어요! 아까 자료 보다가 너무 졸려서 하품한 거예요.
백기
울었잖아.
유연
하품했다니까요.
백기
울었잖아.
유연
그냥 하품한 걸로 넘어가 주면 안 돼요?
그의 확고한 태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결국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를 슬픔을 어떻게든 감추려는 부질없는 몸부림이었다.
백기
안 돼.
백기는 자신의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댔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눈앞의 그가 유난히 흐릿하게 보였다.
그의 모습이 달빛과 어우러져 희미하게 빛나는 듯했다. 그 눈물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걱정, 안쓰러움, 두려움……
그리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수많은 사랑과 분노.
나도 그가 나를 지켜 주는 것처럼 그를 지켜 주고 싶었다. 모든 고난과 병고가 그에게서 멀리 떠나가게 해 주고 싶었다.
유연
제가 선배한테 뭘 바라서 이러는 건 아니에요.
백기
알아.
그가 안쓰러움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더없이 부드러운 입맞춤이 뺨에 내려앉아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유연
선배가 하던 일을 그만두길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정말로.
백기
응, 알아.
그는 나를 감싼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내 눈가에 입을 맞췄다.
유연
정말 별생각 없었어요. 그냥 선배가 조금 걱정됐을 뿐이에요.
백기
그것도 알아.
유연
그러니까 자책하지도 말고, 미안해하지도 말아요. 저는……
그가 고개를 숙여 미처 꺼내지 못한 내 말을 입맞춤으로 막았다.
그 입맞춤은 너무나 다정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든 마음을 대신해 내 영혼을 감싸 안는 듯했다.
나는 그와 같은 온기에 휩싸였다. 더는 아무것도 감추지 못한 채, 그가 내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백기
말해 줘…… 나한테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었어?
백기
전부 다 말해 줘.
그의 눈빛은 깊고 그윽했으며,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나는 그의 빠른 심장 박동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애틋함과 갈망이 뒤섞여 있었다.
백기
혼자 숨지 마.
백기
내가 볼 수 없는 곳에 숨지 마.
간청에 가까운 그의 잠긴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유연
……선배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그 순간 백기의 온몸이 팽팽하게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에도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눈물에 흐려진 세상 속에서 그의 얼굴은 희미해졌지만,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눈부시게 보였다.
유연
선배가……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한 걸음씩 걸어와 지금의 자리에 섰을지 자꾸 생각하게 돼요.
그 혼란스럽고 탁한 어둠을 어떻게 헤쳐 나왔을지. 선배가 입은 상처와 선배의 자부심을 생각했다.
유연
선배가……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철들지도…… 용감하지도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백기
이런 내가 널 아프게만 하는 거야?
유연
차라리 가슴만 아프면 좋겠어요.
나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유연
선배를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려서 어쩔 줄 모르겠어요.
유연
"내가…… 이미 이렇게나 선배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유연
……그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그가 바라던 대로 나는 내 마음을 활짝 열어 보였다. 그 안에 담긴 모든 그리움과 사랑을 그에게 남김없이 보여 주었다.
호박빛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바다처럼 일렁였다. 백기는 나를 자신의 몸속에 새겨 넣기라도 할 듯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더없이 애틋하고 열렬한 입맞춤이 그의 대답을 대신했다.
*
백기는 재활 훈련에 점점 더 열심히 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그는 나를 몰래 바닷가의 작은 오두막으로 데려가 자신이 꾸며 놓은 공간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오후 내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강한 자외선이 신경 쓰인 나는 백기 앞에서 선크림을 꺼냈다……
05장
그날 밤 이후, 백기는 모든 재활 훈련에 더욱 진지하게 임했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면 대개 재활치료사 곁에서 실습 방법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있었다.
심지어는 내 옆에 앉아 턱을 괴고 나와 함께 강의를 듣기도 했다.
저녁 복습 시간에도 기어코 끼어들어, 서로 문제를 내고 마사지 동작을 연습했다.
비록 그는 여전히 많은 일을 자기 자신보다 앞세웠지만, 이제는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이 걸어가는 길을 더 오래 이어 갈 수 있는지.
나와 함께.
유연
선배, 정말 테니스 쳐도 괜찮아요?
백기
첸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어. 저쪽에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달려와서 혼낼 거야.
백기
상대가 너라면 크게 무리도 없고.
유연
왜 그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죠?
나는 튀어 오른 테니스공을 힘껏 네트 너머로 쳐냈다. 맞은편의 백기는 여유롭게 라켓을 휘둘러 공을 받아 냈다. 발을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다.
유연
선배, 저 무시하면 안 돼요! 저도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엄청난 기술들을 본 사람이거든요!
백기
안 무시해. 네가 제일 대단하지.
백기는 웃으며 공을 가볍게 넘겨주었다. 공은 마치 말을 잘 듣기라도 하듯 내 라켓이 닿는 범위 안으로 떨어졌다. 덕분에 굳이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않아도 받아칠 수 있었다.
유연
선배, 요 며칠 몸은 좀 어때요?
백기
굳이 표현하자면, 지금까지 느껴 본 적 없을 만큼 좋아.
백기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기운이 넘쳐. 몸에 힘이 끝없이 솟아나는 것 같아.
백기
밤에 네가 없어도 잠은 그럭저럭 잘 자고 있고. 그러니까 수면의 질을 더 높이려면 네가 맞은편 방에서 내 방으로 옮겨 와야 한다고 생각해.
유연
그 틈에 또 슬쩍 사심 채우려 들지 말아요.
백기
이건 분명 합리적인 요구잖아.
한 번 떠보았다가 실패하면 다음 기회를 노린다. 백 경관님의 사전에는 언제나 ‘포기’라는 두 글자가 없었다.
백기
그런데 그것 말고도 뭔가 새롭고…… 마음이 더 든든해진 느낌이 있어.
유연
응? 좀 더 자세히 말해 봐요.
백기는 고개를 들고 튀어 오른 테니스공을 능숙하게 손으로 받아 냈다. 그러고는 라켓을 턱에 괸 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백기
나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유연
괜찮아요. 천천히 음미해 보세요. 그러다 보면 뭔가 특별한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유연
가요. 기구실에 물건 반납해야죠. 첸 선생님이 스트레칭도 도와주셔야 하고, 조금 쉬면 점심 먹을 시간이에요.
유연
오늘 오후에는 일정이 비어 있는 것 같던데, 저랑 강의 들으러 갈래요? 아니면 황 선생님 따라다니면서 배울 거예요?
백기
둘 다 안 갈래.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바람이 이마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자 반짝이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백기
나랑 같이 ‘땡땡이’ 한번 치자.
나뭇잎이 사각거렸다. 무성한 녹음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내려 땅 위에 잘게 부서진 빛과 그림자를 흩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잔잔하게 일렁이는 바닷물 위로 빛의 점들이 떠다녔다. 그 빛이 눈에 들어와 온통 찬란한 금빛으로 번졌다.
백기는 내 손을 잡고 숲속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유난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한 작은 오두막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절묘하게 숨어 있으면서도 바다를 따라 지어진 건물이었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고, 작은 휴게실처럼 보였다.
나는 이곳이 백기가 준비한 깜짝 선물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갔다.
푹신한 소파가 창문을 향해 놓여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짙고 옅은 푸른빛이 겹겹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작고 연푸른 풍경이 바닷바람을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그 맑은 소리는 한여름의 소리를 담아, 넘실거리는 하얀 파도 속으로 달콤하게 숨어들었다.
유연
이런 곳도 있었다니……
백기의 눈에 어린 웃음이 한층 깊어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안고 소파에 앉아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백기
네가 마음에 든다면 우리 숙소도 이쪽으로 옮기자.
유연
여기로 옮긴다고요?
백기
응.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에 감춰진 작은 뿌듯함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유연
여기…… 설마 선배가 꾸민 거예요?
백기
며칠 전에 너랑 산책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어. 아무것도 없는 빈 오두막이더라고.
백기
그다음에 원장님이랑 이야기해 봤지. 시간 날 때마다 들러서 조금씩 정리한 것뿐이야.
그는 정말 지나가는 길에 잠깐 손을 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백기
네가 좋아할 것 같았거든.
백기
그리고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나도 마음에 들어.
그는 유난히 기쁜 듯 입꼬리를 올리며 친근하게 머리를 기대 왔다.
유연
저도 정말 마음에 들어요.
백기가 여전히 내 기분을 살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는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고, 그가 건네준 마음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유연
그런데 선배는 평소에 물리치료도 받고 재활 훈련도 해야 하잖아요. 저랑 강의도 듣고, 황 선생님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배우기도 하고요.
유연
그 와중에 어떻게 시간을 내서 여길 꾸몄대요?
유연
설마 한밤중에 몰래 잠 안 자고 꾸민 건 아니죠?
백기
내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장관님.
백기
너한테 뭔가 해 주고 싶은 일이라면 어떻게든 시간은 나더라고.
유연
그럼 제가 구석구석 구경해 봐야겠네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정성껏 놓아둔 장식품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백기가 어떤 표정으로 웃으며 이 물건들을 이 자리에 놓았을지 상상해 보았다.
돛을 활짝 펼친 작은 범선은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마치 손을 뻗으면 온 세상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두막 밖에는 작은 의자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느긋하게 쉴 수 있는 해먹 위에는 세심하게 베개와 얇은 담요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유연
우리 백 경관님, 갈수록 대단해지시네요.
백기
제법 괜찮지?
백기
그래도 내가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이 해먹이야.
내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는 나를 안고 해먹에 누웠다. 해먹이 가볍게 흔들리는 바람에 나는 그대로 그의 가슴 위에 엎드리게 되었다. 주변이 끊임없이 흔들렸지만, 백기의 자신만만한 목소리만큼은 또렷했다.
백기
여러 번 보강했어. 이 해먹에는 두 사람이 같이 누워도 충분해.
백기
엄청 튼튼해. 아무리 움직여도 무너지지 않을 거야.
백기
오늘 오후는 여기서 같이 놀면 돼.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자랑'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를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유연
그런데 두 사람이 눕기엔 좀 좁지 않아요?
백기
좁지. 그래도 난 지금이 더 좋아.
그는 나를 자기 몸 위에 완전히 엎드리게 하더니 고개를 살짝 들어 내 입술 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백기
딱 좋잖아.
나는 손끝으로 그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장난치느라 이마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 몇 가닥도 살짝 정리해 주었다.
잘게 부서진 햇살도 함께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때때로 그 깊은 눈동자에 빛이 스며들어 한층 더 밝게 반짝였다.
유연
……잠깐만요!
나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나 그의 몸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해먹이 살짝 흔들리며 균형을 잃을 뻔했지만,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자외선 차단용 겉옷 주머니에서 ‘여름철 필수 휴대품’ 두 병을 꺼냈다.
유연
오후 내내 여기 있을 거라면 선크림을 꼼꼼하게 발라야죠.
백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온몸에서 거부하는 기색이 뚝뚝 묻어났다.
백기
지금 나무 그늘 아래 있잖아. 굳이 바를 필요 없지 않아?
유연
그늘에도 자외선은 있어요. 자외선은 투과력이 엄청 강하거든요! 어디든 파고든다고요!
유연
어디에 서 있든 소용없어요!
유연
요즘 선배는 몸 안팎으로 관리를 잘하고 있잖아요. 피부 관리도 소홀히 하면 안 되죠!
백기
……그렇게까지 심각한 건 아니잖아.
유연
자외선 차단은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피부를 보호하고, 피부 노화를 예방하고, 염증이 생기는 것도 막아 준다고요!
백기
……
그는 순간 움찔했다.
평소 시원시원하던 이목구비가 잔뜩 일그러졌다. 한참 동안 마음속으로 갈등하던 끝에, 그는 난처한 얼굴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백기
알았어. 그럼 내가…… 직접 바를게.
유연
선배가 직접 바르면 분명 대충 쓱 바르고 말걸요.
유연
얌전히 누워 있어요!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나는 곧장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앉았다.
내 아래에 있던 몸이 순간 움찔했다. 백기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난처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백기
대충 안 바르겠다고 약속할게……
유연
선배.
나는 담담하게 그를 불렀다.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한 그는 결국 한참 만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 말 없이 얌전히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먼저 얼굴용 선크림을 짜서 몸을 숙인 뒤 그의 얼굴에 부드럽게 발랐다.
손끝으로 피부가 팽팽하게 긴장된 감촉이 또렷하게 전해졌다. 그는 숨을 참은 듯했고, 눈동자도 눈에 띄게 작아졌다.
유연
선배, 긴장하지 말고 힘 빼요.
허리를 굽힌 자세가 제법 힘들어 나는 아예 몸을 조금 더 앞으로 옮겨 그 위에 엎드렸다.
귓가에 낮고 잠긴 신음이 들려왔다. 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여름의 열기가 그 눈동자 속에서 점점 뜨거워졌다. 목덜미에 맥박이 소리 없이 빨라지고 있었다.
목까지 선크림을 다 바르고 나서 나는 그의 어깨를 짚고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백기의 목에서 억눌린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턱만 무의식적으로 조금 들어 올린 채 시선을 줄곧 내게 고정하고 있었다.
유연
왼손 주세요.
유연
오른손도요.
그는 명령을 정확하게 수행하는 군인처럼 내가 말할 때마다 즉시 따랐다.
나는 유난히 팽팽해진 피부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조금씩 배어 나오는 땀과 내 손길이 닿을수록 뜨거워지는 그의 몸이 느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점점 깊어지고 어두워지는 그의 시선 속에서, 나는 저도 모르게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어졌다.
유연
배에도 발라야 해요.

나는 조금씩 떨리는 손끝을 애써 가누며 그의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흔들리는 나뭇잎 그림자 아래로 드러난 근육의 윤곽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빛깔이 어려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자세를 고쳐 앉고, 미세하게 움찔하는 그의 복근에 손바닥을 댔다.
선크림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백기의 몸에 습기가 짙어질수록 익숙한 그의 체취가 더욱 선명하게 오감을 파고들었다.
모든 것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뜨거웠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감각이 통제할 수 없는 감정으로 변해 그의 배 위로 번져 갔다.
귓가에서 시작된 붉은 기운이 점점 뚜렷해지며 뺨까지 올라왔다.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한 손을 들어 이마를 가렸다. 무언가를 감추려는 듯했다.
하지만 위아래로 움직이는 목울대와 무의식중에 내 손가락을 붙잡는 손길이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미끄러워진 손끝이 그의 옷깃 안쪽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더는 참지 않겠다는 듯한 힘이 갑자기 나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나는 짙은 욕망이 가득한 그의 품속으로 떨어졌다.
백기
아직도 안 끝났어?
잠긴 목소리가 입술을 스치고, 뜨거운 숨결이 파고들었다. 그의 손이 내 뒤통수를 받치고 있어 더는 물러날 곳도 없었다.
유연
아직 안 끝났는데……
백기
정말 아직도 안 돼?
촉촉해진 입술이 낮게 잠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따라 내 입술을 문질렀다. 그의 손바닥에 다시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나는 거세게 일렁이는 호박빛 눈동자 속에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조금 마른 입술을 적시려다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에 닿았다.
다음 순간, 그의 혀끝이 내 혀를 휘감았다. 하지만 그는 더 깊이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내가 조금 전까지 짓궂게 굴었던 것에 대한 답례처럼, 가볍게 건드리며 애태우기만 했다.
백기
이제 좀 봐줘.
부탁하는 말이면서도 마냥 부탁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는 분명 애써 참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조금도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 사람이었다.
유연
조금만 더 참으면 안 돼요?
백기
나 지금 너무 괴로워.
애틋하게 이어지는 입맞춤이 입술 끝을 맴돌았다. 숨길 생각조차 없는 욕망이 그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견디기 어려울 만큼 가벼운 마찰이 내 장난기와 이성을 조금씩 무너뜨렸다. 짜릿한 전류가 온몸의 피를 타고 흐르는 듯했고, 세상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백기
나 지금까지 정말 얌전히 있었잖아……
백기
그러니까 남은 시간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그의 두 손이 위아래에서 내 등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 나는 그와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몰라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마침내 거리낌 없이 주도권을 되찾았다. 서로 뒤엉킨 숨결 속으로 모든 갈망이 밀려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흐느낌과 신음은 모두 그의 숨결 속으로 삼켜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르는 바다처럼 나를 더욱 거센 물살 속으로 끊임없이 끌어당겼다.
눈부신 빛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려 했지만, 밀착된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백기
먼저 시작한 건 너잖아?
그는 내 부끄러움과 떨림을 헤치고 다시 강하게 다가왔다.
05 교차하는 마음
몇 번째 뒤척였는지도 모를 무렵, 백기는 아예 몸을 일으켜 앉더니 물을 몇 모금 벌컥벌컥 들이켰다.
싱글 침대가 이렇게나 넓을 수도 있었다니.
그는 초조한 듯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문손잡이에 손을 얹고도 한참 동안 누르지 못했다.
백기
……
세 시간 전에 그녀에게 푹 자겠다고 약속했으니, 대놓고 규칙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기
……답답해.
그때 창틀 사이로 바닷바람이 스며들어 커튼 자락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마치 소리 없는 암시 같았다.
백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단번에 창문을 열어젖혔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방 창밖에 '내려앉은' 순간, 백기의 마음속에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교실 뒤편 창문을 지나가며 우연인 척 슬쩍 안을 들여다보던 때 같기도 했다. 또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던 창가 밖, 아무도 모르게 은행나무 위에 머물렀던 순간 같기도 했다.
백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것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어딘가에는 변하지 않은 것도 있는 듯했다.
말을 잘 듣는 바람이 시야를 가로막던 얇은 커튼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마침내 시야가 트이자 유리창 너머로 잠든 그녀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편안하게 잠들지 못하는 듯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는 모습이 무언가 괴로운 감정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자신 때문이겠지.
백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애초에 그녀가 이런 걱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해 줄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사실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물리치료와 재활 훈련의 성과를 내야 한다.
그는 무의식중에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당장 돌아가 잠을 자라고 자신을 다그쳤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열린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너무도 본능적인 행동에 백기 자신도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그는 그 본능을 따랐다. 몸을 숙여 그녀의 코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달빛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림자는 마침 그녀의 몸을 감싸듯 드리워져 하나의 포옹처럼 보였다.
백기
잘 자.
백기
푹 자야 해.
한 번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매번 찾아오는 '밤의 방문'이 한층 익숙해졌다.
그녀의 방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펼쳐 놓은 필기 노트와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이 소리 없이 백기의 마음에 새겨졌다.
정해진 일정에 따라 재활 치료를 시작한 뒤로, 그녀는 하루하루 자신보다 더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기는 열심히 재활 훈련을 받고 적극적으로 치료에 협조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아무렇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주려고 애썼다.
그저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몰래 미간을 찌푸리는 일이, 자신이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백기는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 주는 그 얼굴에도, 자신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걱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그 마음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소리 없이 일어난 바람 한 줄기가 그녀의 방으로 살며시 스며들었다. 바다와 달빛의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그녀의 주위를 부드럽게 감쌌다.
백기는 몸을 돌려 떠났다. 자신을 대신해 바람이 계속 그녀의 곁을 지켜 주기를 바라면서.
성실하게 물리치료에 임한 덕분일까. 그는 몸이 정말로 한결 가벼워졌다고 느꼈다.
매일 밤 오가는 익숙한 길도 전날보다 조금씩 더 빨리 다녀올 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이렇게 번거롭게 다닐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갈색 머리카락 끝도 바람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몰래 Evol을 사용했다는 죄책감마저 그 덕분에 조금은 옅어진 듯했다.
며칠만 더. 정말 며칠만 더 지나면 그녀와 다시 평범하면서도 무엇보다 그리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욱 단단한 걸음으로, 미래로 이어지는 하루하루를 함께 걸어갈 수 있으리라.
*
짧은 재활 훈련 기간 동안 백기의 몸은 더욱 과학적이고 올바른 방법으로 점점 건강해졌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 깨달은 것을 내게 털어놓았다. 그의 진심을 들은 나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06장
눈 깜짝할 사이에 보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짧은 재활 훈련 기간 동안 백기의 몸 상태는 더욱 과학적이고 올바른 방법으로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점점 더 생기가 넘치는 그를 바라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유연
첸 선생님은 어디 계세요?
이틀에 한 번씩 하는 테니스 운동을 마치고 백기를 따라 기구실에 들어갔지만, 평소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재활치료사가 보이지 않았다.
백기
무슨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가셨나 봐.
백기
그래도 이제 혼자서 재활 운동을 할 수 있어.
유연
정말요? 그럼 제가 제대로 하는지 지켜봐야겠네요.
나는 거울이 붙은 벽 옆에 기대어 앉아 제법 근엄한 감독관 행세를 했다.
백기는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요가 매트를 펼치고 평소 하던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동작에는 거의 실수가 없었다. 힘을 주고 빼는 정도도 적절했고, 모든 동작을 정확하고 완벽하게 해냈다.
나는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재활치료사의 자잘한 잔소리와 수업을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내심을 발휘했는지 알고 있었다.
졸음이 밀려올 때조차 감히 잠들지 못했다는 것도. 물리치료를 받을 때마다 얼마나 많은 통증과 불편함을 아무 말 없이 삼켜 냈는지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는 여전히 몸을 혹사할 것이다. 매번 이렇게 운동할 시간을 낼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하게 믿을 수 있었다——
내가 앞에서 지켜보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는 앞으로도 틈이 날 때마다 성실하게 이 동작들을 반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등 스트레칭까지 마친 백기를 보며 나는 참지 못하고 손뼉을 쳤다.
유연
선배, 정말 잘했어요.
내 말을 들은 백기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 앞에 쪼그려 앉더니 손을 잡고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또 무언가 ‘백기식 사고’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웃으며 가만히 앉아 그가 마음껏 바라보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참 뒤, 백기가 살며시 웃었다.
백기
그때 말했던 새롭고 마음이 든든해지는 느낌이 뭔지 알아냈어.
나는 잠시 멍해졌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며칠 전 테니스장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 웃음이 났다.
그 질문 하나를 이렇게 오랫동안 머릿속에 품고 있었다니.
유연
뭔데요?
백기
살아 있다는 거야.
백기
이제야 내가 좀 더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창밖에서 쏟아지는 빛이 그의 등 뒤를 감싸며 찬란한 금빛 테두리를 둘렀다. 마치 생명이 눈부시게 피어나고 타오르는 듯했다.
백기
예전에는 다치지 않고, 매번 무사히 돌아와서 널 만날 수만 있다면……
백기
그걸로 너와 함께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어.
백기
그런데 나…… 이제는 좀 더 올바르고 좋은 방법을 찾은 것 같아.
백기
너와 더 먼 길을 함께 걷고 싶어.
백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네 눈에 비치는 모습으로 살아 있고 싶어.
그의 손끝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세상의 모든 찬란한 빛이 그 호박빛 눈동자 속에 스며든 것만 같았다.
백기
그런 생각을 하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너와 함께 걸어가서, 언젠가 삶의 끝에 다다랐을 때……
백기
내 인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백기
널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백기
이런 생각, 이상해?
유연
……이상할 리가요.
그는 너무나 진지하고 간절하게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내 앞에 내보이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를 힘껏 끌어안고, 참지 못하고 입을 맞췄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는 순간들이 알려 주고 있었다.
내가 눈앞의 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가 내 곁에 있기에 나 역시 이토록 든든하고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유연
저도 선배랑 이렇게 살아가고 싶어요.
끝없는 사랑이 애틋하게 맞닿은 입술 사이로 뒤얽혔다. 그는 너무나 따뜻했고, 그의 존재는 나를 온전하게 채워 주었다.
뜨거운 손바닥과 가벼운 입맞춤이 온몸을 따라 움직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더욱 꼭 끌어안고 그의 존재를 느끼고 싶었다.
공기는 계속 달아올랐다. 등 뒤의 거울마저 뜨겁게 달궈진 듯했고, 거울에 비친 모습은 거듭되는 입맞춤 속에서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나는 그의 체온에 깊이 빠져들었다. 마음속에는 오직 그의 모습만이 가득했다.
???
……백 대장님 요즘…… 검사 수치도 괜찮고……
문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온 목소리가 갑자기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전류가 흐른 것처럼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연
……선배, 누가 왔어요……!
당황스러운 마음에 달콤하고 은밀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자 백기가 낮게 신음했다.
그는 나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가쁜 숨을 목 안으로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백기
……움직이지 마.
발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그럴수록 상황은 더욱 견디기 어려워졌다.
다음 순간, 백기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키면서 나를 그대로 들어 올렸다——
내가 놀라 짧은 비명을 터뜨리는 사이, 그는 문 하나를 열었다.
???
응? 방금 무슨 소리 들린 것 같은데.
???
첸 형, 아까 백 대장님이 다녀가셨나 봐요. 30분 전에 형수님이랑 테니스 치는 거 봤거든요. 여기 요가 매트도 아직 안 치워져 있잖아요.

블라인드 틈새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나는 여전히 백기의 몸 위에 반쯤 걸터앉아 있었다. 달콤하면서도 괴로운 감각이 이성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유연
선……
백기
조용히 해.
끝맺지 못한 말이 뜨겁고 축축한 손바닥에 막혀 웅얼거리는 소리로 변했다.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뜻하지 않게 내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치아 끝을 스쳤다.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유연
……!
나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켜며 반사적으로 그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나를 감싸 안은 팔에 곧바로 힘이 들어갔다. 가슴 앞에 얼굴을 묻고 있던 백기가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의 몸이 오르내릴 때마다 땀방울이 내 가슴께로 떨어지는 듯했다.
축축한 감촉 때문에 가뜩이나 비좁은 공간이 더욱 후텁지근해졌다.
유연
……일부러…… 문 건 아니에요.
짧은 말 한마디조차 흐릿하고 끊어졌다. 내가 내쉰 뜨거운 숨이 그의 손바닥에 부딪혀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눈에서까지 땀이 나는 것 같았다.
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입안에 들어와 있던 손가락이 가만있지 않고 혀끝을 살짝 건드렸다. 마치 나에게 대답이라도 하듯이.
???
너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
아닌 것 같은데. 아마 창밖에서 새가 우는 소리겠지.
간간이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신경이 한순간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긴장한 나머지 다리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고, 그 때문에 더욱 참기 힘든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내 목덜미를 간질였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이마에서 배어 나온 땀방울이 눈가를 타고 흘러 잠시 시야를 흐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자연스레 위로 들린 가슴께에 한층 뜨거운 숨결이 내려앉았다. 내 몸에 밀착된 단단한 허리도 움직임에 따라 더욱 빠르게 오르내리는 것 같았다.
서로 엇갈리는 심장 박동이 귀가 먹먹할 만큼 크게 울렸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갑자기 허리 뒤를 받치던 지지점이 사라졌다. 나는 휘청거리며 몸에 힘을 주려 했지만, 오히려 그에게 더욱 세게 밀착되고 말았다.
백기
……!
창고 안에 걸려 있던 천이 피부를 스쳤다. 하지만 그 무엇도 지금 온몸에서 치솟는 열기를 식혀 주지는 못할 듯했다.
백기
정말 미치겠네.
온몸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작은 신음을 흘렸지만, 다음 순간 백기가 그 소리마저 입맞춤으로 삼켜 버렸다.
백기의 눈가에는 야릇한 붉은 기운이 가득 번졌다. 그의 오른손이 내 뒤통수로 미끄러져 올라갔다.
그가 몸을 위로 밀어 올리자 나는 그대로 뜨거운 품속에 완전히 감싸였다. 온 세상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듯했고, 어지러운 감각이 밀려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바깥이 조용해진 것 같았다.
백기는 잠시 더 기다렸다가 문을 살짝 밀어 열었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확인한 뒤에야 나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의 품에 완전히 늘어져 있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철컥'.
선명하게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멍하니 눈을 떴다. 백기가 나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있었다.
백기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는 것 같아.
그는 내 위에 몸을 지탱한 채 한 손으로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자 짙은 열기에 취한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
어두워진 눈동자에는 오직 내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백기
이제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