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장
주황빛 석양이 건물 사이로 내려앉고, 학교를 마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유리창을 넘어 주방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냄비 뚜껑을 열었다. 냄비 안에서는 국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피어오르는 김을 따라 고소한 고기 냄새가 퍼져 나왔다.
국물이 점점 걸쭉해질 무렵, 현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
우리 왔어.
유연
네~ 밥도 거의 다 됐어요. 손 씻고 오면 바로 먹을 수 있어요.
나는 불을 끄고 접시를 꺼내려고 몸을 돌렸다. 그때 다다닥 하는 빠른 발소리와 함께 발치에 복슬복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자 작은 책가방을 멘 보더콜리 한 마리가 신이 나서 내 슬리퍼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머리에 쓴 조그만 모자마저 비뚤어질 정도였다.
유연
가우스, 유치원 끝났어? 오늘 선생님 말씀은 잘 들었어?
며칠 전, 백기와 함께 농구를 하는 고 형의 아이가 드디어 수학 시험에서 합격점을 받았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게 강아지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어린 보더콜리 가우스는 백기에게 정식으로 맡겨졌다.
며칠 사이 나와 가우스는 금세 끈끈한 ‘혁명적 우정’을 쌓았다.
볼수록 마음이 약해진 나는 가우스의 부드러운 털을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백기
속지 마.
내가 강아지와 한창 다정하게 어울리고 있을 때, 백기가 찬 반찬과 과일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봉투를 조리대 위에 내려놓았다.
백기
선생님 말로는 요즘 거의 매일 다른 강아지들이랑 싸운대. 오늘은 장난감 공도 몇 개나 물어뜯었다더라.
백기
지금 얌전한 척하는 거야.
가우스
끼잉……
백기가 자신을 ‘고자질’하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가우스는 낑낑거리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가우스의 머리를 달래듯 쓰다듬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유연
우리 가우스가 일부러 말썽을 부린 건 아닐 거야. 다음부터는 안 그럴 거지?
유연
오늘 유치원에서 뭘 배웠어? 이따 밥 먹고 누나한테 한번 보여 줄래?
가우스의 경쾌한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나는 특별히 따로 남겨 둔, 간을 하지 않고 물에 삶은 소고기 몇 점을 집어 가우스 앞에 내밀었다.
가우스는 눈을 반짝이더니 재빨리 고기를 물고 한쪽으로 가서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연
좋아, 이제 우리도 밥 먹자.
나는 손을 깨끗이 씻고 접시를 꺼내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두 팔이 내 허리를 감싸 왔다.
등 뒤로 익숙한 체온이 밀착되었다. 백기는 고개를 숙여 느긋하게 내 어깨에 턱을 얹었다.
앞으로 조금 움직여 보았지만 그가 단단히 끌어안고 있어 반걸음도 떼지 못했다.
유연
아이 참, 이러다 소고기 다 식겠어요.
백기
식어도 맛있어.
백기는 그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발을 옆으로 옮겼다. 소고기를 다 먹고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오려던 가우스를 은근히 가로막으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작은 행동을 놓치지 않고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유연
누가 지금 심통이 난 것 같은데요?
백기
유연이 네가 강아지만 예뻐하잖아. 그러니까 난 알아서 더 바짝 붙어 있어야지.
유연
누가 그래요? 저는 둘 다 똑같이 예뻐하는데요.
나는 웃으며 백기의 손을 잡고 가스레인지 앞으로 데려갔다.
냄비에서 푹 익은 소고기 한 점을 집어 후후 불어 식힌 다음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백기는 눈을 내리깔고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숙여 고기를 받아먹었다.
유연
어때요?
백기
맛있어.
하지만 내 허리를 감싼 팔은 오히려 조금 더 단단해졌다. 이어 따뜻한 입술이 귓가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백기
그런데 난 똑같이 예뻐해 주는 건 싫어.
백기
나만 특별히 예뻐해 줘.
02장
밤이 깊어지자 거실을 채우던 음식 냄새는 달콤하고 산뜻한 과일 향기로 바뀌었다.
나와 백기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리 앞에 앉은 가우스는 마치 사열을 앞둔 병사처럼 고개를 꼿꼿이 들고 가슴을 쭉 펴고 있었다.
유연
가우스, 2 더하기 2는 얼마야?
가우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과일 접시에서 망고스틴 네 개를 물어다가 가운데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유연
정말 똑똑하다! 우리 가우스 최고야!
내가 아낌없이 칭찬을 쏟아 내자 가우스는 꼬리를 더욱 신나게 흔들더니, 백기를 향해 연달아 몇 번 짖었다.
한껏 의기양양해진 가우스를 보며 백기는 입꼬리를 올리고 피식 웃었다.
백기
이번엔 좀 어렵게 내 볼까? 4 더하기 7은?
가우스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접시에 남아 있던 망고스틴 여덟 개를 전부 우리 앞으로 밀어 놓았다.
가우스
멍! 멍! 멍!
유연
?!
과일이 모자란다는 걸 계산해서 짖는 소리 세 번으로 대신한 걸까? 아니면 그냥 아무렇게나 짖은 걸까?
나는 반신반의하며 가우스를 바라보았다.
유연
그러니까…… 세 개가 더 필요하다는 뜻이야?
가우스는 곧바로 귀를 파르르 떨더니 고개를 치켜들었다.
가우스
멍! 멍! 멍! 멍! 멍! 멍! 멍! 멍! 멍! 멍! 멍!
정확히 열한 번 짖는 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기를 바라보았다.
유연
세상에! 가우스는 수학 천재인가 봐요!
백기
전에 고 형도 가우스가 자기 아이보다 수학을 잘한다고 했어.
백기
그러면서 자기 대신 가우스한테 아이 수학 숙제를 봐 달라고 해야겠다고 하더라.
유연
푸하하하!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오던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백기는 전화를 받아 상대방과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나누었다.
그가 전화를 끊자, 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인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유연
임무가 생겼어요?
백기
응. 옆 도시로 좀 가야 해. 예전 사건 하나를 점검하고 지휘할 일이 생겼거든.
백기
위험한 일은 아니야. 금방 돌아올 수 있어.
유연
그럼 다행이에요.
조금은 마음이 놓였지만, 더 이상 장난을 치며 놀 기분은 아니었다.
유연
그럼 오늘은 일찍 쉬는 게 좋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백기가 내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다음 순간, 그는 나를 다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황급히 그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백기
서두를 거 없어. 내일 아침에 가우스를 데려다주고 집합 장소로 가면 돼.
자기 이름을 들었는지 가우스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백기는 가우스를 내려다보며 눈길을 주었다. 목소리도 조금 낮아졌다.
백기
앞으로 며칠 동안은 얌전히 있어. 말썽 부리지 말고. 알겠어?
가우스
멍!
사람 하나와 강아지 한 마리가 나란히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백기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유연
걱정하지 마요. 가우스랑 같이 선배 돌아오는 거 기다리고 있을게요~
다음 날 이른 아침.
복슬복슬한 무언가가 내 손등을 자꾸만 문질렀다. 하지만 피곤했던 나는 눈조차 뜨기 싫을 만큼 졸렸다.
유연
으응…… 장난치지 마……
귓가에서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잠결이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손등에 닿던 복슬복슬한 감촉이 사라졌고, 방 안에도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의식이 다시 꿈속으로 가라앉기 직전, 눈꺼풀 위로 따스한 감촉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은은한 바다 소금 향과 서늘한 물기가 함께 느껴졌다.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간이 편안하게 풀렸다.
백기
좀 더 자. 내가 돌아올게.
03장
가우스처럼 얌전하고 똑똑한 강아지라면 아침저녁으로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면서 틈틈이 놀아 주기만 해도 며칠은 금방 지나가겠지?
……그럴 리가.
유연
내 사원증! 가우스, 빨리 뱉어!
가우스의 입을 벌려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물어뜯긴 사원증을 꺼낸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백기가 떠난 지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집 안은 작은 폭풍이 한 차례 휩쓸고 간 것 같았다.
쓰레기통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휴지와 쓰레기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식탁보와 소파 덮개는 여기저기 물어뜯겨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유연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 오후에만 외부 취재 일정이 있다는 거네. 가우스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나서 천천히 치워야겠다.
나는 현관으로 가서 작은 책가방과 모자, 목줄을 챙긴 뒤 가우스에게 손짓했다.
유연
가자. 유치원에 가야지.
가우스는 느릿느릿 다가왔다. 그런데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고 있더니, 발을 디딜 때마다 절뚝거렸다.
유연
……가우스? 발이 왜 그래?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다친 걸까?
지체할 수 없었던 나는 곧바로 가우스를 반려동물 유모차에 태우고 가장 가까운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동물병원 대기실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곳곳에서 고양이와 강아지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접수를 마친 나는 긴 의자에 앉았다. 가우스는 기운 없이 내 품에 엎드려 있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연달아 진동했다.
꺼내 보니 백기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백기의 모습이 나타났다.
백기
……너 병원에 있어?
백기는 나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목소리에도 다급함과 걱정이 묻어났다.
백기
어디 아파?
유연
아뇨, 아뇨! 제가 아니라 가우스요. 다리를 다친 것 같아서요……
나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이야기할수록 불안감과 자책감이 커졌다.
유연
제가 조금만 더 신경 써서 잘 돌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백기
일단 진정해. 가우스 좀 보여 줘.
그 말을 듣고 나는 카메라를 옆으로 조금 돌려 가우스도 화면에 나오도록 했다.
백기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인지 가우스는 어느새 몸을 일으켜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화면 속 백기를 발견하자 곧바로 신이 나서 몇 번이나 짖었다.
백기는 침착하게 가우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서서히 눈을 가늘게 떴다.
백기
가우스, 발 다쳤어?
가우스의 짖는 소리가 뚝 그쳤다. 대신 불쌍한 듯 낑낑거리기 시작했지만, 백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백기
어느 발이 아파? 들어서 보여 줘.
가우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못 알아들은 척했다. 그러자 백기의 목소리에 경고하는 기색이 실렸다.
백기
말 들어.
가우스는 마지못해 오른쪽 앞발을 들어 올렸다. 귀도 축 늘어뜨린 채, 조금 전의 활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백기
됐어. 이제 저쪽 가 있어.
영상통화 너머에서 백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유연
왜요?
백기
이 녀석, 십중팔구 꾀병이야.
진료실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백기에게 영상통화로 수의사의 진단 결과를 전했다.
백기
잔머리는 잘 굴리는데, 감추는 솜씨가 영 부족하네.
유연
하하하! 하필 눈썰미 좋은 백 경관님한테 걸렸으니 어쩌겠어요~
웃음이 나왔지만, 방금 수의사에게 들은 말이 떠오르자 웃음기가 조금 가셨다.
유연
그런데 수의사 선생님 말로는 가우스에게 분리불안이 조금 있는 것 같대요.
유연
요 며칠 유치원에서 싸우고 집에서 말썽을 부린 것도 다 불안해서 나타난 행동일 수 있다고요.
유연
시간 날 때마다 가우스와 좀 더 많이 놀아 주라고 하셨어요.
백기
응. 내 쪽은 임무가 끝났어. 오후면 집에 도착할 수 있어.
백기
앞으로 며칠은 별로 바쁘지 않으니까 같이 산책도 자주 시켜 주자.
유연
좋아요! 그럼 오늘 저녁에는 다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마침 외부 취재가 끝나면 가우스를 유치원에서 데려올 수 있거든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에 쥐고 있던 목줄이 갑자기 묵직해졌다.
뒤돌아보니 가우스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유연
가우스? 왜 그래?
아무리 불러도 가우스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백기
이제 ‘범인’의 ‘동기’를 알 것 같아.
백기
직접 물어보자. 네가 좀 도와줄래?
유연
네……
나는 백기의 말대로 가우스 앞에 쪼그려 앉아 휴대전화 스피커를 켰다.
백기
가우스. 네가 꾀병을 부리고 말썽을 피운 건 유치원에 가기 싫어서야?
유연
왼쪽은 ‘맞아’, 오른쪽은 ‘아니야’.
나는 양손을 펼쳐 보이며 가우스에게 설명했다.
가우스는 앞발을 들어 ‘맞아’라고 정한 손을 선택했다.
유연
정말 가기 싫었던 거구나! 그런데 전에는 유치원에 그렇게 잘 다녔잖아. 왜 갑자기 가기 싫어진 걸까……
백기
다른 강아지가 괴롭혔어? 유치원에 싫어하는 게 있어?
백기는 연달아 몇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가우스는 모두 ‘아니야’를 선택했다.
그러자 백기도 잠시 말이 없어졌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가우스를 바라보며 지난 며칠 동안 함께 지냈던 일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백기가 유치원에서 가우스를 데려온 첫날부터 가우스는 줄곧 활발했다. 그래도 말을 잘 듣고 의젓한 강아지였다.
그런데 백기가 출장을 떠나고 내가 유치원에 데리러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의사는 가우스에게 분리불안이 조금 있다고 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였다.
나는 가우스의 앞발을 살며시 잡았다.
유연
가우스, 혹시 유치원에 가면 엄마 아빠랑 백기 형아가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한 거야?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우스는 느릿느릿 앞발을 움직여 ‘맞아’라고 정한 손 위에 올려놓았다.
유연
그럼 지금 유치원에 가기 싫은 것도 누나까지 사라질까 봐 무서워서야?
가우스는 다시 ‘맞아’를 선택했다. 그러고는 목구멍에서 가느다란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정말 그런 이유였다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가우스를 품에 안고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유연
걱정하지 마. 엄마 아빠랑 백기 형아는 잠깐 외출한 것뿐이야. 금방 돌아올 거야.
유연
누나가 약속할게. 오늘 유치원 끝나고 돌아오면 누나랑 백기 형아가 꼭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전화 너머에서도 백기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
누나 말이 맞아. 오늘 얌전히 유치원에 다녀오면 오후에 내가 간식 들고 일찍 데리러 갈게.
나는 다시 양손을 펼쳤다.
가우스는 귀를 쫑긋거리더니 내 손 위에 앞발을 올려놓고 멍! 하고 짖으며 대답했다.
유연
……엑스레이까지 찍고 검사도 다 받았는데, 결국 아무 이상도 없었대요.
유연
저도 선배가 했던 것처럼 한번 ‘심문’해 봤거든요. 그랬더니 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더라고요.
유연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제게 달려와 애교를 부리는데, 다리는 어찌나 멀쩡하던지! 괜히 걱정만 잔뜩 했잖아요……
한바탕 투덜거리다 보니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유연
그런데 선배는 어떻게 알았어요?
백기
‘범인’이 너무 신나 있더라고.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어.
백기
특히 어디를 다쳤는지 물었을 때, 찔리는 게 있는 듯한 몸짓을 보였거든.
04장
촬영 구역을 빠져나온 나는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가 휴대전화를 꺼내 백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연
저 이제 끝났어요! 가우스는 데리러 갔어요?
백기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시원한 기운을 전했다.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백기가 가정용 오토바이를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바람을 따라 그의 옷자락이 날렵한 곡선을 그리며 펄럭였다.
산들바람이 오동나무 우듬지를 스치자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사르륵 흔들렸다.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백기의 몸 위에 얼룩진 빛과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람에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졌지만, 호박색 눈동자는 빛과 그림자를 넘어 멀리 있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수없이 마주하고 빠져들었던 눈빛인데도, 내 심장은 또다시 조금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곧이어 웃음기 어린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또렷하게 들려왔다.
백기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네가 먼저 돌아볼 줄은 몰랐네.
유연
헤헤, 바람이 저한테 미리 귀띔해 줬거든요~
백기
어쩔 수 없지. 내가 네 곁에 빨리 가고 싶어 한다는 걸 바람도 알고 있으니까.
백기는 내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한 손으로 헬멧을 벗어 살짝 들어 보였다.
백기
우리 데리러 왔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쪽에서 복슬복슬한 머리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선글라스를 쓴 가우스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새로 생긴 장비를 하루라도 빨리 내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유연
어? 선글라스 정말 멋있다! 어디서 난 거야?
백기
공항에서 선물로 사 줬어.
백기가 가우스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자, 가우스는 곧바로 오토바이 짐칸에서 작은 상자를 입에 물고 내게 다가왔다.
상자를 받아 열어 보니 수정으로 장식된 딸기 모양 머리핀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일부러 가우스에게 손짓했다.
유연
우와, 가우스가 누나한테 선물도 줄 줄 알아? 이리 와. 누나가 뽀뽀해 줄게.
백기
……?
가우스가 내 품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백기가 덥석 가우스의 주둥이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백기
뽀뽀할 거면 나한테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유연
하지만 가우스가 이렇게 착한데, 상을 더 많이 줘야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두 손을 펼쳤다.
다음 순간, 힘센 팔 하나가 내 허리 뒤쪽을 감싸 왔다.
백기
그럼 내 상은 내가 직접 받아 갈게.
익숙한 체취와 함께 따뜻한 숨결이 가까워졌다. 내 귓불까지 뜨겁게 달아오르고 나서야 백기는 비로소 팔을 풀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마침 가우스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더 뜨거워졌다. 나는 서둘러 백기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유연
상도 다 받았으니까 이제 집에 가야죠!
백기
누가 집에 간대?
백기의 입꼬리가 느긋하게 올라갔다. 그는 몸을 일으켜 오토바이에서 다른 헬멧 하나를 꺼내 내게 씌워 주었다.
백기
오늘은 너희 데리고 실컷 놀러 다닐 거야.
시동이 걸리고 우리는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여름 오후의 무더위를 조금씩 식혀 주었다.
가우스는 오토바이 앞쪽에 앉아 있었다. 두 귀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고, 가끔 고개를 돌려 우리를 살펴보다가 다시 신이 나서 앞을 바라보곤 했다.
그날 오후 내내 우리는 가는 곳마다 구경하고 놀았다. 반려동물 용품점에 들렀다가 강아지 공원으로 향했고,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거리를 따라 바람을 쐬며 달렸다.
석양이 조금씩 지평선 너머로 내려앉을 무렵, 우리는 새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한 컵씩 사 들고 광장의 긴 의자에 앉았다.
가우스도 자기 몫의 작은 컵을 끌어안고 있었다. 오가는 자동차와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이따금 아이스크림을 한 입씩 핥으며 느긋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
유연
가우스는 오늘 유치원에서 어땠대요?
백기
선생님 말로는 제법 얌전했대.
백기
앞으로 며칠은 시간이 있으니까 조금 일찍 데리러 가서 맛있는 것도 사 줄 수 있어.
백기
그러면 가우스도 안심하고 유치원에 가기 싫어하지 않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다시 활기를 되찾은 가우스를 보고 있자니 괜히 웃음이 났다.
유연
강아지도 우리 어릴 때랑 똑같네요. 유치원에 가기 싫은 날이 있나 봐요~
유연
선배는 어땠어요? 어릴 때 유치원에 가기 싫었던 적 있어요?
백기는 긴 의자에 두 손을 짚고 앉아 나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백기
처음에 우리 엄마가 들으셨대. 어린애들은 유치원에 가는 걸 무서워해서 울고불고 안 가겠다고 떼쓰는 경우가 많다고.
백기
그래서 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엄마는 매일 제일 먼저 나를 데리러 오셨어. 그러고는 백화점에 데려가 장난감 비행기를 사 주셨지.
백기
외할머니도 매일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 주셨고. 그렇게 하면 내가 매일 즐거운 마음으로 유치원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던 거야.
유연
그래서 선배도 얌전히 유치원에 갔어요?
백기
응. 난 원래 무서워하지 않았거든.
백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눈에도 부드러운 웃음이 가득했다.
백기
나중에 엄마도 괜한 걱정이었다는 걸 아셨지만, 그래도 가끔은 일찍 데리러 와서 같이 놀러 다니셨어.
백기
덕분에 난 유치원에 가는 게 꽤 좋았어.
그의 다정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 마음도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마치 아득히 먼 시간을 사이에 두고 그 시절의 행복을 함께 나누는 것 같았다.
유연
어쩐지. 그래서 백 경관님이 지금도 사람을 이렇게 안심시키는 데 능숙한 거군요.
백기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팔을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눈앞에는 지난 수많은 밤낮의 풍경이 떠오르는 듯했다.
유연
선배가 임무를 나갈 때마다 저도 많이 보고 싶어요.
유연
하지만 선배는 영상통화도 해 주고, 몰래 깜짝 선물도 준비해 주고, 돌아오면 제일 먼저 저를 찾아와 주잖아요.
유연
그래서 조금씩…… 기다리는 일이 전만큼 무섭지 않게 된 것 같아요.
유연
선배는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 걸 아니까요.
백기는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백기
그럼 앞으로도 더 잘해야겠네. 이제부터는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전부 가지고 네 곁으로 돌아올게.
유연
유치원에 가기 싫어하는 어린아이를 달래 주는 것처럼요?
백기
그뿐만이 아니야.
산들바람이 백기의 앞머리를 살며시 스쳤다. 나를 바라보는 두 눈은 한결같이 맑고 진지했다.
백기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다 큰 어린이’도, 출근하기 싫어하는 ‘사장님’도, 나랑 헤어지기 싫어하는 여자아이도……
백기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넌 언제나 내가 돌아올 길을 알려 주는 등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