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백기 생일 외전

01. 불벼락과 웃는 호랑이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또다시 묵직한 주먹이 백기의 몸에 정통으로 꽂혔다.
백기는 몇 걸음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목구멍으로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비릿한 피 맛을 애써 무시한 채,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온몸이 화끈거리며 아팠다.
아직 제대로 처치하지 못한 목덜미의 칼자국, 총알이 스치고 지나가 불에 덴 듯 쓰라린 팔의 상처, 그리고 방금 대장에게 몇 대 얻어맞은 자리까지.
눈앞의 남자는 백기보다 반 뼘은 더 컸다. 오랜 비밀 작전 탓에 턱에는 까칠한 수염이 돋아 있었고, 그 모습은 한층 날카롭고 사나워 보였다.
백기는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29소대에 들어온 뒤 세 번째로 수행한 임무였다.
몇 시간 전, 용의자를 성공적으로 체포하면서 수개월간 이어진 잠복 작전은 무사히 끝났다.
하지만 백기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일을 망칠 뻔했다는 것을.
그 총알은 정말 조금만 더 갔으면 자신의 머리를 꿰뚫었을 것이다.
정말, 아주 조금만 더.
“여긴 네가 혼자 싸우는 곳이 아니야! 영웅 놀이 하고 싶으면 당장 꺼져!”
“보고드립니다. 저는 명령에 따라 담당 구역에서 임무 목표를 수색했습니다. 규정을 위반한 적은 없습니다.”
“그럼 누가 너 혼자 처들어가랬어?! 그게 네가 명령을 따르는 방식이냐?”
“용의자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때 바로 체포하지 않았다면 지난 반년 동안의 작전이 전부 실패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 자식 주변에 공격형 Evolver가 열 명도 넘게 붙어 있는 게 안 보였어?!”
“일차적으로 판단했을 때 제가 처리할 수 있는 범위였습니다. 임무를 실패시키지 않기 위해…….”
채 끝나지 못한 말은 또 한 번 날아든 주먹에 거칠게 끊겼다.
“처리할 수 있었다는 놈이 죽을 뻔해!!”
백기는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훔치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채 똑바로 서기도 전에 대장이 앞섶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백기의 몸이 번쩍 들렸다.
“똑똑히 들어. 네가 전에는 얼마나 잘났든 난 관심 없어. 지금 넌 내 소대원이야. 임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네 몸이나 챙겨! 하늘이 무너지면 내가 받쳐!”
“한 번만 더 이딴 짓 하면 경찰학교로 꺼져!”
말을 끝낸 남자는 거칠게 손을 놓았다.
백기는 그대로 다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사라졌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씩씩거리며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기의 차갑기만 하던 얼굴에 순간 미세한 동요가 스쳤다.
지금껏 백기에게는 자신이 곧 자신의 하늘이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살아왔다.
임무가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자신의 탓으로 작전이 실패했다면, 무슨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여태껏 누구도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백기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발 늦게 온몸의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백기는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그대로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바닥에 드러누웠다. 멍하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뭔가를 들고 자신의 머리를 툭툭 찌르는 것 같았다. 딱딱하면서도 간질거렸다.
백기는 코끝만 찡긋하고는 상대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몽롱한 감각 속에서 축축한 무언가가 갑자기 목덜미에 닿았다.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와 함께 날카로운 통증이 번쩍 치솟았다.
백기는 숨을 거칠게 들이켜며 온몸을 웅크렸다.
짜증스럽게 눈을 뜨자, 방유가 싱글싱글 웃으며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입에는 런천미트 한 조각을 문 채, 핀셋으로 알코올 솜을 집어 백기의 상처를 문지르고 있었다.
“너 진짜 아픈 건 무섭지도 않나 보네.”
“……방 부대장님. 이따가 제가 직접 의무실에 가겠습니다.”
“그래.”
방유는 입에 음식을 문 탓에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손에 들고 있던 도구를 구급상자에 돌려놓더니 손을 툭툭 털고, 백기를 부축해 바로 앉혔다.
그리고 능숙한 손길로 한 번 비틀었다.
“딱.”
순간 백기의 얼굴이 통증으로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이를 악문 채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방유가 몸 상태를 살피도록 가만히 있었다.
성질이 불같고 걸핏하면 폭발하는 대장과 달리, 이 ‘웃는 얼굴의 호랑이’ 같은 부대장은 어쩌면 또 다른 의미로 백기에게 화풀이와 고문을 선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별일 없네. 이따 내가 빌려온 구급상자는 의무실에 돌려놔.”
방유(方维)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 총알 한 발을 백기의 손가에 내려놓았다.
“기념으로 가지고 있어.”
02. 낭만주의식 시말서
백기가 의무실에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그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 이불을 가지런히 갠 뒤, 언제부터인가 침대맡에 놓여 있던 징계 처분서를 집어 들고 방을 나섰다.
근신실 안.
컴퓨터 화면의 차갑고 흰빛이 백기의 호박빛 눈동자에 비쳤다.
그는 계속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한 글자도 써내지 못했다.
귓가에는 이따금 칼날이 날아들던 날카로운 파공음이 되살아났다.
목덜미의 상처는 이제 아물고 있는 듯했지만, 총알이 스치며 화상을 입은 팔의 피부는 여전히 은근하게 욱신거렸다.
백기는 손을 들어 목에 걸린 그 총알을 쓸어내리며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슬쩍 틈을 벌렸다.
검은 머리의 소년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와 함께 갓 쪄낸 고기 냄새가 풍겨왔다.
백기는 단번에 알아챘다.
특파팀 정문을 나가 세 개의 교차로를 지나고, 다시 50미터쯤 걸어 오른쪽으로 꺾은 뒤 끝까지 가면 나오는 ‘멍 이모네 왕만두’ 냄새였다.
“백기 형, 배 안 고파?”
“안 고파.”
꼬르륵—
공기가 침묵했다.
납작하게 굶주린 배가 굳이 길게 꼬리를 늘이며, 고요한 근신실 안을 반 바퀴쯤 울리고 지나갔다.
“……고맙다, 시인.”
백기는 만족스럽게 만두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진한 고기 향과 함께 육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시인(诗人)’이라 불린 소년은 헤헤 웃으며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러고는 한 글자도 적히지 않은 문서를 힐끗 바라봤다.
“백기 형, 한 글자도 안 썼네.”
백기는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조금 민망한 듯 짧게 대답했다.
사실 같은 소대의 동료이기는 했지만 백기는 시인과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인은 조금 어색하게 식어버린 분위기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 나도 시말서는 못 써. 그래서 형이랑 같이 있으려고 온 거야.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응.”
백기는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입 베어 문 만두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시인을 바라봤다.
“난 밥 먹고 왔어. 이건 몰래 형 주려고 가져온 거야. 안에 매운 당면 들어간 것도 있어. 지난번에 훈련 끝나고 형이 한꺼번에 다섯 개 먹었던 거 기억나!”
“크흠. 그날은 너무 배가 고팠던 거야.”
백기가 조금 쑥스러운 듯 변명했다.
어쩐 일인지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형, 전에 시말서 써본 적 있어?”
“없어.”
“나도 시말서는 안 써봤는데 시 쓰는 건 좋아하거든. 있잖아, 시말서를 시로 써도 되나?”
“안 되겠지?”
“당연히 안 되지!”
갑자기 들려온 대답에 방 안의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갈 곳을 잃은 만두만 백기의 손에 덩그러니 들려 있었다.
방유가 문가에 서 있었다.
눈매는 어느새 활처럼 휘어 있었다.
두 젊은이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방유는 얼른 눈짓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백기가 들고 있는 만두로 시선을 옮겼다.
“오, 벌써 먹고 있었네?”
“그럼 많이 먹어. 부대장 몫까지 먹어야지.”
방유는 손에 든 비닐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빈 의자를 하나 끌어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왜 서 있어? 앉아. 배부르게 먹어야 시말서도 쓰지.”
제법 진지하게 타이르는 말투에는 누가 봐도 웃음기가 가득했다.
백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아 말없이 만두를 먹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또 갑자기 열렸다.
살피듯 날카로운 시선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세 사람은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대장님, 안녕하십니까!”
세 사람의 목소리가 일제히 울리면서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엄숙해졌다.
남자는 볼이 빵빵해진 채 고기만두를 들고 있는 백기를 바라봤다.
그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평소의 불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아주 맛있게도 먹는구나. 모르는 놈이 보면 네가 공이라도 세운 줄 알겠어!”
“당장 5천 자짜리 시말서 써서 제출해!”
남자는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고 그대로 돌아섰다.
그러다 무심코,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고기만두 하나를 드러냈다.
03. 7월의 끝자락
“배고프다.”
이어셋 너머로 방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는 잠에서 눈을 떴다.
왜 하필 지금, 막 소대에 들어왔던 시절의 꿈을 꾼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일이 바로 어제 있었던 것 같기도 했고, 또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해는 완전히 저물었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따뜻했다.
비밀 임무를 수행한 지도 벌써 아홉 달째였다.
백기는 자신이 이 거대한 산과 하나가 된 것만 같았다.
습하고 끈적한 공기에는 진작 익숙해졌고, 자를 시간조차 없었던 머리카락도 이제는 묶어야 할 만큼 길어졌다.
며칠 전 작은 칼을 들고 직접 머리를 잘라버리려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방유가 ‘역시 내가 한 수 위지’라는 듯한 얼굴로 머리끈 하나를 내밀어준 덕분에, 그의 머리카락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부대장님, 만두 드실래요?”
“아침에 먹었잖아.”
“그럼 소고기 국수?”
“안 먹어. 더워.”
“녹두탕은요? 더위 식히기 좋잖아요.”
“그건 그냥 식후 음료 아니냐?”
이어셋에서는 시인과 방유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오갔다.
백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또다시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의미 없는 대화를 끊었다.
“교대 시간입니다. 대장님, 좀 쉬시죠.”
“괜찮아. 쥐새끼가 슬슬 못 버티고 나올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바짝 지켜.”
대장의 침착한 목소리가 이어셋을 타고 흘러들었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소대 전체가 안심하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어셋 너머에서 규칙적인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기는 이어셋을 손가락으로 두 번 톡톡 두드렸다.
“부대장님, 뭐 드실 때는 마이크 좀 꺼주세요.”
“맞아요, 부대장님. 압축 비스킷 하나를 어쩜 그렇게 맛있게 드세요?”
이어셋 너머의 우물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방유는 기분 좋게 감탄하듯 말했다.
“백기 녀석, 너 요즘 갈수록 나한테 막 대한다? 예전에는 얌전히 ‘존경하는 방 부대장님’이라고 불러주더니. 이것 봐, 이제 시인까지 너 따라 버릇 나빠졌잖아.”
“대장님께 보고드립니다. 저는 아닙니다. 부대장님이 정보를 날조하고 계십니다.”
백기는 그렇게 말해놓고도 자신이 먼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홀린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방금 꿈을 하나 꿨어.”
“막 소대에 들어왔을 때 했던 임무였는데, 대장한테 얻어맞고 부대장한테도 진짜 질리도록 시달리고…… 고기만두 세 개도 나왔어.”
이어셋 너머가 조용해졌다.
순간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대장이었다.
투덜거리듯 내뱉는 목소리에서는 그 역시 그때의 일을 떠올린 듯한 기색이 묻어났다.
“뭔 개소리야.”
“하하, 대장님 부끄러우신가 본데?”
방유가 거리낌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결국 백기 그 시말서 몇 자나 썼더라?”
“내 기억엔 백기 형, 다 못 썼는데요.”
“그러고 보니 정말 다 못 썼던 것 같네.”
백기가 대답하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달빛 아래의 산등성이는 유난히 고요했다.
마치 바람조차 이곳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사실 며칠 전에는 나도 비슷한 꿈을 꿨어.”
시인이 갑자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요즘 자꾸 지난 2년 동안의 일이 생각나. 아마 이번이 우리 소대의 마지막 임무라서 그런가 봐.”
한동안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방유만 작게 한마디 응수했을 뿐이었다.
백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의 손이 저도 모르게 가슴 앞쪽 주머니로 향했다.
때맞춰 이어셋에서 다시 방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기야, 또 고개 숙이고 그 사진 보는 거냐? 하도 만져서 이제 손때가 반들반들하겠다.”
백기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올라갔다.
“지금 막 보려던 참이었어요.”
괜히 토라진 척 말하면서도 그는 제법 소중한 것을 다루듯 그 사진을 꺼냈다.
“전원 주목.”
경보처럼 대장의 목소리가 이어셋을 울렸다.
“문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해.”
백기는 사진을 이마에 가만히 갖다 댔다.
깊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뒤 재빨리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호박빛 눈동자에는 날카로운 빛이 가득했다.
04. 따뜻한 소원
긴박했던 교전 끝에 임무는 마침내 승리로 끝났다.
수갑을 채우는 순간에도 백기는 어딘가 얼떨떨했다.
꼬박 아홉 달.
그토록 길었던 줄다리기가 정말 이렇게 끝난 것이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였고, 곧 새벽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백기, 동쪽 산비탈로 와.”
이어셋에서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무리할 일이 남았나 싶어 백기는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시인과 방유는 탁 트인 풀밭에 느긋하게 누워 있었고, 평소라면 늘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대장도 드물게 평온한 모습으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무언가를 엮고 있었다.
부드러운 달빛이 고요하게 그들을 감쌌다.
마치 조금 전까지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던 일이 아주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대장은 멍하니 서 있는 백기를 올려다보더니 턱짓했다.
“앉아.”
네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이 고요를 깨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바람이 스치며 대장이 풀을 엮는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오랫동안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자 피로가 금세 밀려왔다.
백기는 대장이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아예 눈을 감고, 쉬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희미한 빛이 눈꺼풀 위로 스며드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자신의 앞에 놓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백기가 눈을 떴다.
눈앞에는 강아지풀로 엮은 네모난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뭔지 알아보기가 조금 어려웠다.
하지만 이게 뭐냐고 물었다가는 아마 한 대 맞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백기는 저도 모르게 시인을 바라봤다.
역시나 솔직한 시인은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대장님, 이거 아무리 봐도 케이크처럼은 안 보이는데요.”
돌아온 건 대장의 날아차기와,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방유의 웃음이었다.
케이크?
백기는 잠시 멍해졌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점점 밝아지는 새벽빛이 어렴풋이 남자의 날카로운 윤곽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꼬맹이, 진짜 사내가 되는 데 또 한 걸음 가까워진 걸 축하한다.”
대장의 말이 끝나자 시인과 방유가 동시에 외쳤다.
“생일 축하해!”
“이 새 한 마리 안 날아드는 데 무슨 케이크가 있겠냐. 일단 이걸로 때워.”
“새벽을 촛불이라고 생각하자. 의미도 좋잖아. 어쨌든 둘 다 어둠을 밝히는 거니까.”
“네가 시 읽은 보람이 있네.”
“이번엔 대장님한테 영감을 받은 거예요!”
눈앞의 세 사람은 시끌시끌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백기는 가만히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마음속이 더없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자식아, 소원이나 빌어.”
“제 고향에는 그런 말이 있어요. 소원을 세 개 빌면 앞의 두 개는 말해야 세 번째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백기 형, 한번 말해봐요.”
“뭘 굳이 물어봐. 이 녀석이면 십중팔구 자기 그 아가씨 빨리 만나게 해달라고 빌겠지.”
“아, 부대장님! 말해버리면 안 이루어진다니까요!”
“시끄러워.”
백기가 웃었다.
묵직한 안도감이 마음 깊은 곳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그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소원을 빌었던 게 언제였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새벽의 태양이 천천히 떠올랐다.
순식간에 햇빛이 온 대지를 가득 비추었다.
백기는 오랜만에 마음속으로 하나의 소원을 빌었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무사하기를.
05. 꼭 편지해 줘
도시로 돌아가기 위한 집합을 앞두고 백기는 혼자 야외로 나갔다.
아홉 달 동안 이곳에 주둔한 덕분에 이제 이 일대는 손바닥처럼 익숙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곳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싶었다.
몇 개의 산비탈을 넘자 멀리서 임무 기간 동안 함께했던 ‘파트너’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풀밭 위에 조용히 서서 햇빛을 받아 날카롭고 눈부신 빛을 내고 있었다.
백기는 그쪽으로 걸어가 기체를 가볍게 두드렸다.
“너도 고생 많았다.”
말을 마친 그는 날렵하게 기체 날개 위로 올라가 앉았다.
오후가 되었는데도 날씨는 여전히 제법 더웠다.
백기의 이마에는 잔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햇볕에 뜨겁게 달궈진 날개에서는 계속해서 열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그는 몸을 살짝 뒤로 기댄 채 느슨하게 한쪽 다리를 세웠다.
그러자 소리 없이 가벼운 바람 한 줄기가 감겨 올라왔다.
가슴에 걸린 인식표가 달그락거리며 울렸다.
백기는 담담히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은 땅과 무척 가까워 보여,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이 소대는 해산하고, 모두 각자의 길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앞으로 수행할 임무를 신청할 기회가 생긴다.
문득 백기의 머릿속에 그 도시와 그 아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뜻밖에도 마음은 아주 평온했다.
마치 오랫동안 참고 있던 숨이 어느새 조금씩 풀려, 이제야 편히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처럼.
기나긴 7년 동안 그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삶과 죽음이 맞닿은 순간을 수없이 지나왔다.
그가 지나온 산과 강은 바람의 모양과 궤적을 크고 작게 바꾸어 놓았다.
그들에게 고마워해야겠지.
아니.
반드시 고마워해야 했다.
자신의 삶에 나타나 지금의 자신이라는 모습을 만들어준 사람들이었으니까.
백기의 시야에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반듯하게 폈다.
어느새 몸에 밴 습관이었다.
성미는 불같지만 누구보다도 믿음직한 이 남자는, 불과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기에게 대장이라는 사람이 짊어져야 할 모든 책임과 각오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백기가 날개에서 뛰어내려 경례하려 하자 남자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의 눈빛은 깊고 무거웠다.
한참이 지나서야, 평소답지 않게 먼저 웃었다.
“백기, 지금까지 정말 잘했다. 아직도 혼자 무리하려는 버릇은 남아 있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도 단숨에 날개 위로 올라앉았다.
백기의 어깨를 툭 두드리고는 앞을 바라봤다.
“너도 나중에는 분명 대장이 될 거다.”
“그때가 되면 네가 짊어질 짐도 점점 더 무거워지겠지. 당장 다음 순간이라도 그 무게에 짓눌릴 것처럼 느껴질 만큼.”
남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
“네 녀석이 그 무게에 짓눌릴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언제나 너와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을 거다.”
“혼자 짊어져야 할 때가 오더라도, 너 혼자뿐이라고 생각하지 마.”
백기는 입을 열었다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작은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옆에 앉은 남자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장은 애초에 그의 대답을 기다린 것도 아닌 듯했다.
할 말을 마치자 그대로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다.
“앞으로는 형이 뒤를 봐줄 수 없는 길도 네가 스스로 걸어가야 한다.”
“힘내라, 꼬맹이.”
집합 시간이 되었을 무렵에는 어느새 날이 제법 저물어 있었다.
네 사람은 탁 트인 초원과 산림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얘들아, 마지막 임무까지 끝났다. 다들 고생 많았다.”
방유는 여전히 늘 그렇듯 웃는 얼굴이었다.
활처럼 휘어진 눈가에는 어쩐지 반짝이는 물기가 어려 있는 듯했다.
시인은 코를 세게 한 번 훌쩍이고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는 종이를 정성스럽게 펼쳤다.
총을 쥐었을 때는 한 번도 떨린 적 없던 손가락이 그 순간만큼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대장님께 보고드립니다! 저…… 모두를 위해 시를 한 편 썼습니다. 여기서 읽어도 되겠습니까!”
“읽어.”
“네!”
시인은 차렷 자세로 경례한 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너는 그저 너만의 여정을 향해 나아가렴.
하지만 꼭 편지해 줘.
길 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푸른 산에 부쳐 줘.
그러면 네가 어떤 고된 길을 넘어왔는지
내가 볼 수 있을 테니까.
풀과 나무가 흔들린다면,
그게 내가 보내는 메아리라는 걸 알게 될 거야.
꼭 편지해 줘.
길 위에서 만난 기쁨을 강과 바다에 부쳐 줘.
그러면 네 마음에 어떤 물결이 일었는지
내가 볼 수 있을 테니까.
파도가 일렁인다면,
그게 내가 보내는 메아리라는 걸 알게 될 거야.
길 위에서 겪은 몸부림을 대지에 부쳐 줘.
그러면 네가 걸어온 흔적을
내가 볼 수 있을 테니까.
모래와 돌이 흩날린다면,
그게 내가 보내는 메아리라는 걸 알게 될 거야.
들판에도 부쳐 줘.
푸른 하늘에도, 이름 없는 풀잎에도.
물 한 방울마다,
꽃 한 송이마다,
길을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에게까지.
그러면 너는
내가 보내는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잘 지내, 나의 친구.
꼭 편지해 줘.
혹시 언젠가
네가 내가 한 번이라도 닿았던 곳에 이르게 된다면,
꼭 편지해 줘.”
06. 미래의 약속
숙소에는 짐이 많지 않아 백기는 금세 정리를 마쳤다.
말끔하게 정돈된 방을 한 번 바라본 뒤 군용 배낭을 둘러메고 문을 닫았다.
공터에는 네 사람이 말없이 일렬로 서 있었다.
마지막 인원 점검이 시작됐다.
“특파 제29소대, 정원 4명. 현원 4명. 결원 없습니다.”
“2년 113일에 걸친 ‘물수리’ 임무는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제29소대는 이 시간부로 해산한다!”
대장의 힘 있는 목소리가 오랜 시간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백기는 꼿꼿하게 선 채 곁에 있는 세 사람을 곁눈질했다.
문득 지나온 시간이 묘하게 겹쳐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네 사람은 서로 다른 길 위에 올라 각자의 여정을 향해 떠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시인은 항공우주공업부로 발령받을 예정이었고, 방유는 평화유지대에 차출되었다.
대장은 더욱 기밀성이 높은 임무를 맡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백기는 자신의 신청을 허가받아 연모시로 향해, 현재 맡고 있는 임무를 계속 수행하게 되었다.
“이게 어쩌면 우리가 정식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아주 특별하고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없는 한 서로 아는 척하지 않는다.”
“이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히 전우다.”
“나는 언제까지고 마음속으로 너희 모두가 무사하기를 바랄 거다.”
“모두 행운을 빈다.”
“모두 무사하길.”
짧은 작별에는 가장 소박하면서도 진심 어린 축복이 담겨 있었다.
언젠가 세상의 끝에서,
혹은 꽃이 피어 있는 어느 곳에서,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같은 별하늘 아래에서, 같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같은 폭우를 맞으며 계속 함께 걸어갈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 단체 사진 하나 찍자. 기념으로 남겨두게.”
“부대장님, 대장님이 방금 신분에 주의하라고 하셨잖아요.”
“알아. 잠깐만 기다려.”
잠시 뒤 돌아온 방유의 양손에는 성냥갑 하나와 자잘한 물건 몇 개가 들려 있었다.
그는 곧장 백기에게 다가오더니 백기의 가슴께에 달린 두 번째 단추를 냅다 뜯어냈다.
그러고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맥주병 뚜껑, 음료수병 뚜껑, 동그란 돌멩이, 단추와 성냥개비를 이용해 네 명의 성냥개비 사람을 만들었다.
“자, 단체 사진 완성.”
“돌멩이가 대장이고, 나는 맥주병 뚜껑. 시인은 음료수병 뚜껑, 백기는 단추. 됐지?”
“왜 저는 음료수병 뚜껑이에요?”
“묻지 마.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한 거야.”
두 사람은 그렇게 또 시끌시끌하게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예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백기는 그 네 개의 작은 성냥개비 사람을 한참 바라보았다.
왠지 자신의 영혼 한구석에 또 하나의 따뜻한 무언가가 더해진 것만 같았다.
찰칵.
네 사람은 동시에 그 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날부터 서로 다른 먼 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백기는 목적지가 연모시로 적힌 비행기 표를 바라보다가,
기내로 발을 들였다.
*
2022 백기 생일 逢辰之约 생일맞이 데이트
1장
유연
여기예요! 오늘 제가 촬영 인터뷰할 분이 선배를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셨어요.
고즈넉한 분위기의 나무문 앞에서 백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백기가 임무 보고를 마칠 때쯤 나도 촬영을 거의 끝내고, 딱 맞춰 함께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백기는 내가 준비한 생일 깜짝 이벤트에 대해 좀처럼 묻지 않았지만, 이따금 올라가는 입꼬리와 반짝이는 눈빛은 마음속 기대를 슬쩍 드러내곤 했다.
그저 평범한 촬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나는 한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몇 번이고 생각해 본 끝에, 어쩌면 이것도 세상이 만들어낸 우연하면서도 따뜻한 안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백기의 생일을 앞두고 이분과 만나게 된 것까지도.
백기
왜 나를 만나고 싶다는 거야?
그의 물음에 답하듯, 초인종을 누른 뒤 안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노인이 숨을 헐떡이며 문을 열어주었다.
노인의 시선은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가 백기의 얼굴에 멈췄다.
노인은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눈가의 주름이 조금씩 펴지고, 입술이 몇 번이고 열렸다 닫혔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맑은 눈물이 먼저 몇 줄기 흘러내렸다.
백기
어, 어르신. 왜 그러세요?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백기는 잠시 굳었다가 서둘러 다가가 떨리는 노인의 손을 붙잡았다.
주 할아버지
……드디어 만났구먼, 백 대장.
노인은 몇 번이고 감격스러운 말을 되뇌었다.
눈물 어린 눈은 줄곧 백기를 바라보고 있었고, 웃으면서도 계속 눈물을 흘렸다.
백기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어설프게 노인의 어깨를 토닥이다가 도움을 청하듯 나를 바라봤다.
유연
소개할게요. 이분이 오늘 제 촬영 인터뷰 대상이신 S시 신형 도시 케이블카의 총괄 설계자, 주 할아버지예요.
유연
예전에 선배가 할아버지를 구해준 적이 있다고 하셨어요.
주 할아버지
그때 비행기에서 말이야. 위험한 순간에 자네가 순식간에 나타나더니 괴한의 단검을 단번에 빼앗았지!
주 할아버지
자네가 아니었으면 난 진작 목숨을 잃었을 거야.
주 할아버지는 백기의 손을 꽉 붙잡은 채 흐뭇하면서도 자랑스럽게 당시의 일을 다시 이야기했다.
백기에게는 그 장면이 어딘가 낯선 듯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는 노인을 앞에 두고 그저 서툴게 어깨를 어루만져줄 뿐이었다.
백기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주 할아버지
그때 자네 나이가 스물 초반밖에 안 됐을 텐데, 그게 어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란 말인가!
주 할아버지
자네도 누군가에겐 귀한 자식이야!
노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주 할아버지
그땐 자네 이름도 몰랐으니, 이 은혜만큼은 절대로 잊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수밖에 없었어.
주 할아버지
자네가 살려준 이 목숨에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야겠다. 그렇게 살아서 언젠가는 꼭 자네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지.
주 할아버지
그러다가 나중에야 뉴스에서 자네 소식을 보게 됐어. 그날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주 할아버지
다만 아쉽게도 그쪽은 관리가 워낙 엄격해서, 아무리 해도 자네를 만나게 해주질 않더군……
노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이야기인데도 이 순간 다시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바람이 백기의 눈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가볍게 스쳤다.
백기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그 길고도 다정한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
그렇게 어느새 황혼이 내려앉았다.
떠나기 전, 주 할아버지는 표 두 장을 내 손에 꼭 쥐여주었다.
주 할아버지
유연 씨, 이렇게 오랜 제 소원을 이루게 해줘서 고마워요.
주 할아버지
괜찮다면 두 사람이 함께 내가 설계한 케이블카를 타봤으면 좋겠군. 내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해줘요.
할아버지를 배웅하고 난 뒤, 나는 웃으며 백기를 바라봤다.
유연
벌써 이렇게 늦었네요. 돌아가는 표는 다시 사야겠어요.
백기
표는 중요하지 않아.
백기
나 정말 기뻐…… 네 덕분에 그분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백기는 내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저녁 바람 속에서 애틋한 손길로 내 손끝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백기
그리고 네가 여기 있으니까, 어디로 돌아가든 똑같아.
그러면서 백기는 방금 주 할아버지가 건네준 케이블카 시범 운행표를 가리켰다.
백기
그럼 지금 그 도시 케이블카를 한번 보러 갈까?
백기의 눈에는 당장이라도 가보고 싶은 기대가 가득했다.
나는 조금 망설이며 쉴 새 없이 알림이 뜨는 휴대전화 화면을 곁눈질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바로 대화창에 ‘우리 조금 늦게 돌아갈게요.’라는 말을 빠르게 입력했다.
유연
가요! 저도 밤에 타는 도시 케이블카는 어떤지 보고 싶어요.
선배가 먼저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바람만큼은 들어주고 싶었다.
2장
우리는 아무도 없는 승강장에 서 있었다.
시야 끝에서 케이블카가 천천히 다가왔다.
옅은 밤빛이 도시 위로 넓게 번지고,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한 네온사인이 밤을 따뜻하고 화려한 빛무리로 수놓았다.
유연
이 케이블카 기사님은 맨 앞에 앉아 계시니까 전망이 정말 좋겠어요!
백기
그럼 이따 타서 자리 조금만 내주실 수 있는지 물어보자.
유연
그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아요?
백기
좀 그렇긴 하지.
백기는 웃으며 나를 품에 끌어안고 턱을 내 머리 위에 얹었다.
모든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다정했다.
케이블카가 승강장으로 들어오자 운전석에 앉은 중년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구릿빛 피부에 눈빛은 침착했고, 다소 날카롭기까지 했다.
유연
기사님, 왠지 말 걸기 어려워 보이는데……
나는 턱을 살짝 들었다가 등 뒤의 백기가 굳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백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감싸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더니 케이블카가 다가오는 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승강장에 들어서는 순간, 기사의 시선이 아주 잠깐 우리와 맞닿은 듯했다.
하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스쳐 지나갔다.
유연
선배?
의아한 마음에 백기를 바라봤지만, 그가 입술을 한 번 꾹 다물었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가다듬는 모습만 보였다.
백기
응. 말 걸기는 좀 어려워 보이네.
케이블카에 올라탄 뒤, 백기는 내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객실로 들어갔다.
아무렇지 않은 듯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나를 열차의 맨 뒤쪽으로 데려갔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창밖에서 반짝였다.
케이블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마치 도시를 흐르는 빛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만 같았다.
유연
헤헤, 앞이 아니어도 뒤쪽 풍경도 똑같이 예쁘네요!
백기
응, 그러네.
백기는…… 어딘가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백기는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채 머리를 팔에 가볍게 기대고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조금은 기뻐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유연
백기, 괜찮아요?
백기
……
그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잠시 망설인 끝에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리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백기
유연아, 고마워…… 내가 일찍 떠나지 않게 해줘서. 덕분에 이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어.
유연
그걸 왜 저한테 고마워해요?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으며 그의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유연
그때 백기가 그 할아버지를 구하지 않았다면, 할아버지도 이 케이블카를 설계하지 못하셨을 거예요.
유연
그럼 당연히 시범 운행 표를 우리에게 주실 일도 없었고, 우리가 여기에 올 수도 없었겠죠.
유연
정 고맙다고 하고 싶다면, 열심히 살아왔고 정의로웠던 과거의 자신한테 고마워해요!
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부드러운 빛들이 그의 호박빛 눈동자 속으로 하나둘 건져 올려졌다.
그 빛은 아득히 먼 어느 시간과 공간을 향해 길게 번져가는 듯했다.
백기
그 사람에게는 고마워해야겠지.
백기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야.
그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포근한 밤빛 속에서 나는 그 호박빛 눈동자에 비친 나 자신을 보았다.
백기
네가 아니었다면 난 오늘 오후에 이 도시를 떠났을 거야.
백기
이 차를 타고 있을 일도 없었겠지. 그리고……
백기는 끝내 말을 잇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자꾸만 치밀어 올랐다.
백기는 이런 순간, 충분히 성숙한 특수경찰이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그 남자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도 그와 똑같이 해야 했다.
애써 마음을 억누르고, 그쪽으로 단 한 번의 시선도 보내지 않아야 했다.
삶은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띠와 같아서,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모든 일이 꼭 맞는 순간에 정확히 맞물려야만 비로소 단 하나의 기적으로 이어진다.
그해, 그들이 함께 그 문을 나선 뒤로 이 남자의 소식을 듣지 못한 지 몇 년이나 되었던가.
너무 오래되었다.
너무 오래되어서……
어쩌면 그가 이미 이 세상 어딘가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로.
지금 그가 이곳에 있는 건 아마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백기는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끊임없이 떨리는 손끝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했다.
그 남자 앞에 당당히 서서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또 한 번 성장했다고.
그를 다시 만나 얼마나 기쁜지.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말해주고 싶었다.
봐요.
그때부터 줄곧 마음속에도, 꿈속에도 품고 있던 그 아이가 지금 내 곁에 있어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에요.
수많은 낮과 밤, 수많은 해를 나와 함께 걸어왔고 단 한 번도 내 손을 놓지 않았어요.
내 모든 갈망과 그리움이 마침내 편안히 머물 수 있는 단 하나의 곳을 만들어줬어요.
백기는 이 모든 것을,
전부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3장
유연
뭐가 아니라는 거예요……?
백기가 수수께끼처럼 말을 흐리자 문득 짚이는 게 있었다.
백기가 늘 말을 꺼내려다 삼키곤 하는 일들은 대부분 그의 직업과 관련되어 있었다.
나는 손바닥을 살짝 꼬집으며 속으로 내 둔함을 타박했다.
유연
선배, 크흠, 그게…… 있잖아요. 이 안, 좀 춥지 않아요?
나는 웃으며 어물쩍 화제를 돌렸다.
백기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듯 눈가의 웃음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화제를 돌리려고 꺼낸 말이기는 했지만, 실제로 케이블카 안에는 점점 차가운 바람이 세게 불어와 나도 모르게 몸을 한 번 떨었다.

백기
너도 참……
백기는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 중얼거리더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외투를 펼쳐 몸을 숙이고 내게 둘러주었다.
은은하게 남아 있는 그의 체온과 세제 향이 빈틈없이 나를 감쌌다.
마치 또 하나의 포옹 같았다.
백기
좀 춥긴 하네.
백기
그래도 난 이제 남이 기회를 만들어줘야 하는 그런 바보는 아니야.
담담하고 태연한 말은 조금 뜬금없게 들렸지만, 백기는 너무나도 솔직하고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도시의 풍경이 차창 위로 흘러갔다.
알록달록하고 눈부신 빛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 그의 두 눈 속으로 모두 모여드는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선배는 줄곧 이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흘러간 시간 속에서 수많은 새로운 모습이 더해져 있었다.
오직 나로 인해 생겨난 모습들이었다.
나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나 자신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유연
그럼 기사님한테 빨리 말씀드려요. 냉방이 너무 세니까 온도를 조금 높여달라고요.
백기
그럴 필요는 없어.
그러면서 나에게 외투를 둘러주었던 두 팔을 다시 끌어당겨 나를 제 쪽으로 더 가까이 붙였다.
백기
기왕 누가 기회를 만들어줬으니, 아껴두지 말고 제대로 써야지.
백기
내 체온에는 자신 있거든.
백기는 외투째 나를 품 안에 꼭 감싸 안았다.
턱을 내 어깨 위에 얹고, 등을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백기
널 따뜻하게 해주기엔 충분해.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긴 세월 속에서 천천히 쌓여온, 사랑받고 있다는 든든함과 확신이었다.
가슴이 살짝 떨려와 나도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유연
기사님이 보면 우리 보고 웃겠어요.
백기
그러라고 해.
백기
좀 더 봐도 상관없고.
하늘빛과 등불이 우리 주위에 떠 있었다.
우리는 몰래 구름 속에 숨어든 듯했고, 오직 달만이 우리의 모든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케이블카도 종점에 닿는 게 아쉬운 것처럼 서서히 속도를 늦추는 듯했다.
한참이 지난 뒤, 귓가에 내려앉은 백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지하고도 간절했다.
백기
유연아, 선물 고마워.
무엇이든 언젠가는 끝에 닿는다.
아무리 천천히 달려도 케이블카는 결국 역에 도착했다.
백기는 내 손을 잡고 함께 내렸다.
발걸음은 조금 느렸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기사
잠깐.
조금 거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나는 멈칫하고 뒤를 돌아봤다.
종점에 도착했기 때문인지 기사도 차에서 내려와 있었다.
짧은 부름에 백기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평온한 눈빛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기사
어땠나?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 남자가 왜 이런 걸 묻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 케이블카를 타본 소감을 묻는 거겠지?
유연
정말 좋았어요! 기사님도 아주 안정적으로 운전하셨고, 야경도 예뻤어요!
남자의 침착한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무언가를 찬찬히 살펴보는 듯하더니, 어딘가 흐뭇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윽고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천천히 백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백기는 어깨를 조금 더 반듯하게 폈다.
맞잡은 우리의 손가락에도 순간 힘이 들어갔다.
그는 조용하고 확신에 찬 미소를 희미하게 지었다.
백기
전부 좋습니다.
너무나 간단한 세 글자였지만, 그 안에는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감정과 오랜 안도감이 짙게 배어 있는 듯했다.
기사
그럼 됐다.
남자는 웃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정한 시선이 그 뒷모습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거두어졌다.
백기
우리도 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도 모르게 곁눈질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사람에게서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났다.
고속철도 표를 사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백기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 그의 귓가로 다가갔다.
유연
저, 왠지 아까 그 기사님이랑 백기랑 분위기가 좀 닮은 것 같아요.
백기
……
휴대전화 화면을 두드리던 손끝이 잠시 멈췄다.
이내 백기는 웃으며 다시 구매 정보를 입력하다가 고개를 돌려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익숙하고 편안한 말투였다.
백기
난 그 사람만큼 사납진 않아.
나는 멍하니 백기를 바라봤다.
그 남자를 처음 발견했을 때 백기의 얼굴에 떠올랐던 쓸쓸하면서도 기쁜 표정이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지만—
우리 뒤에는 고요한 밤빛만이 남아 있었다.
가로등이 우리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리고 내 곁의 백기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백기
집에 가자.
나는 그의 단단한 눈매를 가만히 바라보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백기의 손을 잡아끌며 달리기 시작했다.
유연
그전에 먼저 들를 데가 하나 더 있어요!
4장
유연
왜 그래요? 설마 특파팀도 못 알아보는 거예요?
시간을 확인한 나는 멍하니 서 있는 백기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는 참지 못하고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백기
특파팀에는 왜 온 거야?
유연
당연히 비밀 임무를 수행하러 왔죠~
한밤중 정문을 지키고 있던 특파팀 대원이 익숙하게 나와 신호를 주고받았다.
나는 백기의 손을 잡아 계획해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소대장으로 있던 시절 사용했던 사무실 앞에 멈춰 섰다.
유연
자, 백 대장님. 문 열어봐요.
백기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손을 뻗었다.
모두
십—! 구—!
시끌벅적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나도 슬쩍 사람들 틈으로 빠져나와 미리 준비해둔 케이크 카트 앞으로 달려갔다.
모두
이—!
모두
일—!
모두
백 대장님, 생일 축하합니다!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모두가 한목소리로 축하를 외쳤다.
작은 사무실 안에는 다시 요란한 장식들이 흩날렸고, 당조는 비위를 맞추듯 백기의 머리에 삐뚤빼뚤한 생일 모자를 씌워주었다.
나는 케이크를 백기 앞으로 밀었다.
카트 위에서는 화상 통화가 연결된 휴대전화까지 시끄럽게 울려댔다.
한예준
백기 형!! 저 보여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백기 형, 생일 축하해요!
작은 화면 속 한예준은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로 양손에 긴 풍선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한예준
특파팀은 규칙이 왜 이렇게 많아요! 이런 특별한 날에도 사람을 못 들어가게 하고!
백기
……
백기는 정말 할 말을 잃은 듯 그저 눈만 몇 번이고 깜빡였다.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마저 얌전히 늘어져 있었다.
나는 백기가 줄곧 자신은 이런 떠들썩한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마 백기는 모를 것이다.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그라는 사람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의 곁으로 모여든다는 걸.
유연
원래는 너무 늦어져서 다들 먼저 보내려고 했어요.
유연
그런데 다들 꼭 선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카운트다운을 해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대원들에게 둘러싸인 백기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자 문득 아주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백기의 생일에는 사실 내 사심이 많이 담겨 있었다.
이 특별한 날만큼은 내가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의 바람을 나 혼자 이루어주고 싶었고,
지난 시간을 함께 돌아보고 앞으로의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도 오직 나였으면 했다.
하지만 다섯 번째로 맞는 이번 생일만큼은 내 사심만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나만큼이나 백기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사람의 사랑이 언제나 그의 곁을 둘러싸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마워하고,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을 고마워한다는 사실을.
유연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선배가 이 세상에 온 날을 축하하고 싶어 해요.
백기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봤다.
그러고는 드물게 쑥스러운 듯 웃었다.
백기
……고마워, 다들.
당조
정말요, 백 대장님? 그럼 저 앞으로 운동장 좀 덜 돌게 해달라고 소원 빌어도 돼요?
대원
백 대장님, 사진 찍어도 됩니까? 지금 표정 진짜 웃긴데요.
당연히 돌아온 대답은 익숙한 주먹질이었다.
그동안 고진은 묵묵히 촛불을 켜고는 이 틈을 타 장난치는 사람들을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고진
됐어, 그만 떠들고 가서 불이나 꺼.
유연
백기, 이제 촛불 끄고 소원 빌어요!
작은 사무실 안을 채운 촛불이 늘 단단하기만 하던 백기의 얼굴선을 부드럽게 물들였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백기의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
그는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두 손을 모으고 경건하게 눈을 감았다.
촛불이 그의 눈썹과 눈가를 환하게 물들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잠시 후 호박빛 눈동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시선은 곧장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내게 닿았다.
백기는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그 섬세한 눈빛은 또 다른 형태의 소리 없는 입맞춤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촛불을 끄자 방 안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사람들은 생크림을 묻혀가며 서로 장난을 치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결국 엉망이 된 방 안 여기저기에 체면도 잊은 채 쓰러져 잠들었다.
마치 영영 철들지 않을 커다란 소년들 같았다.
멀리 희미한 새벽빛이 어느새 지평선 끝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나와 백기는 특파팀 건물 옥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유연
생일 축하해요, 선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이 그의 눈 속에서 일렁였다.
그러다 마침내 웃음 섞인 한숨 하나로 가라앉으며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백기
넌 어떻게 이렇게…… 믿기지 않을 만큼 특별할 수가 있어.
유연
믿기지 않을 만큼 특별한 사람은 언제나 백기였어요.
유연
선배였기 때문에 우리가 선배 곁으로 온 거예요.
선배의 정의 때문에.
선배가 지켜온 신념 때문에.
그리고 선배에게 남은 상처들 때문에.
선배가 걸어온 모든 길과,
선배가 건넨 모든 말들 때문에.
백기
예전에 누군가가 그러더라.
백기
시간은 공평해서 언젠가 반드시 선물을 준다고.
백기
그땐 믿지 않았어. 그냥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지.
백기
그런데 지금은 믿어.
밝아오는 새벽 속에서 백기의 목소리가 가볍게 불어오는 아침 바람에 실렸다.
후련하고도 자유로웠다.
유연
당연하죠. 헛되이 흘러가는 시간은 하나도 없어요.
유연
그 모든 시간이 지금의 선배를 만든 거예요.
유연
우리가 그 길들을 직접 걸어왔기 때문에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지 더 잘 알 수 있는 거고요.
시간은 노력하는 사람에게 인색하지 않다.
지나온 모든 노력은 시간 속에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남몰래 조금씩 다듬어진다.
그러다가 미래의 어느 꼭 맞는 순간 모습을 드러내,
다시 그 사람의 손으로 돌아와 뜻밖의 선물이 되어준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오는 순간이면 단단하게 말해준다.
네가 내디딘 그 모든 굳건한 발걸음이,
이 선물들을 여기까지 끌고 온 거라고.
유연
이렇게 멋진 사람이 되어 제 곁에 와줘서 고마워요.
유연
내가 믿는 이상이 되어줘서.
새벽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힘차게 타오르면서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한 자루의 촛불 같았다.
따뜻하면서도 눈부신 빛이 성대하게 그의 눈동자 속으로 내려앉아 뜨겁게 타올랐다.
백기
그럼 분명 온 세상이 나를 도와준 거겠네.
백기
내가 네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