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행상
갓 구운 호병이오! 이리 와서 구경도 하고 맛도 보고 가시오!
길가에서 구워지는 호병의 고소한 향기가 풍겨왔다. 주점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말발굽 소리와 상인들의 외침이 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나는 찻집 밖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은 멀지 않은 역참 입구에 세워진 수레 행렬에 머물렀다.
수레 곁에서는 호위무사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고, 수레채에 달린 영천의 표식은 햇빛 아래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열흘 뒤면 이부상서 최간장의 생일이었다. 최근 장안으로 향하는 길에는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수레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의 행렬은 영천자사 유병이 보낸 것이었다.
나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 이미 식을 대로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수레 안에는 뇌물로 바칠 금은보화와 귀한 물건들이 잔뜩 실려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청옥으로 만든 인장 하나와 장부 한 권.
그것들만 손에 넣으면 저들이 결탁해 은폐한 영천의 억울한 사건들을 천하에 알릴 수 있었다.
나는 앞쪽으로 시선을 옮겨 행렬의 선두에 선 호위무사를 바라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말 곁에 서 있었다. 허리에는 긴 칼을 차고 있었고, 곧게 뻗은 등은 마치 칼날처럼 꼿꼿했다.
그는 영천자사 휘하의 호위무사로, 이름은 백기라고 했다.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이 행렬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은 바로 그였다.
그 순간, 백기가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날카로운 시선을 곧장 이쪽으로 돌렸다.
……눈치가 정말 빠르네.
나는 놀란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리고 우연히 눈이 마주친 것처럼 눈웃음을 지으며 태연하게 매실가루 한 숟갈을 찻잔에 넣었다.
잠시 후, 누군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백기
안쪽은 자리가 다 찼던데, 합석해도 되겠소?
나는 그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백기는 옷자락을 가볍게 걷어 올리고 자리에 앉더니, 내 손 옆에 놓인 접시를 잠시 바라보았다.
백기
차에 매실가루를 넣는 게 이곳 풍습이오?
유연
아니에요. 여름이라 날이 너무 더워서 주인장에게 매실가루를 조금 부탁했어요. 새콤달콤해서 입안도 개운해지거든요.
유연
공자님도 한번 드셔보시겠어요?
내가 작은 접시를 그의 앞으로 밀어주자 백기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접시에 담긴 가루를 조금 집어 자신의 찻잔에 뿌렸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산들바람에 잘게 부서져 은은한 빛이 되어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내려앉았다.
어째서인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예전에 이렇게 햇살이 가득한 오후에 저 눈동자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바로 그때, 호박색 눈동자가 살짝 움직이더니 내 시선과 마주쳤다.
유연
입맛에 안 맞으세요?
백기
아니, 괜찮소. 꽤 맛있군.
백기
그냥 예전에 이렇게 마시는 걸 좋아하던 사람이 생각나서.
유연
친구분이세요?
백기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이오.
그 뒤로 백기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차를 다 마신 뒤 옆에 놓아둔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레 행렬로 돌아갔다.
나는 길게 늘어선 수레 행렬이 성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찻값을 남겨두고 소리 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
여름의 대나무 숲은 무더위를 가려주고 있었다.
햇살은 대나무 그림자에 잘게 갈라져 수레바퀴 자국과 말발굽이 일으킨 흙먼지 사이로 흩어져 내렸다.
나는 행렬과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숲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들 사이에서 여러 사람의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백기는 말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우고, 단숨에 허리춤의 장도를 뽑아 들었다.
나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양쪽이 순식간에 뒤엉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칼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놀란 말들이 날카롭게 울부짖었고, 사방으로 흩날리는 대나무 잎이 흙먼지와 뒤섞였다.
백기는 자세를 낮춰 어지럽게 교차하는 칼날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의 손안에서 장도가 날렵하게 돌아가더니 도적 몇 명이 들고 있던 긴 창을 단번에 허리 부분부터 베어냈다.
나는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이상하네……
저 도적들은 마차 쪽으로는 거의 접근하지 않고 있었다.
물건을 빼앗으러 온 게 아니었나?
미처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마차를 지키던 호위무사들이 적들에게 밀려 수레 곁을 떠났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려 마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마차 안은 어두컴컴했다.
겁먹은 말들이 날뛰는 바람에 차체가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애써 몸의 균형을 잡으며 구석구석을 살폈고, 마침내 한쪽 구석에서 청옥 인장과 장부를 찾아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물건을 재빨리 품속에 넣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 때문에 앞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2장
거의 동시에, 어지럽게 부딪치는 칼날 소리를 뚫고 낮은 외침이 거센 바람을 타고 귓가에 꽂혔다.
백기
엎드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엎드렸다.
챙——!
귓가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센 바람이 정수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머리카락 몇 가닥을 사납게 흩날렸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화살 하나가 내 옆의 수레바퀴 자국에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화살 깃은 아직도 빠르게 떨리고 있었다.
목덜미에 서늘한 기운이 번졌다.
나는 거칠게 두어 번 숨을 내쉬고 뒤를 돌아보았다——
백기는 장도를 가로로 든 채 말고삐를 당겨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말발굽이 일으킨 흙먼지와 부서진 대나무 잎이 내 옷자락으로 날아들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대나무 잎과 햇빛 어린 먼지 너머로, 그가 무언가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유연
……'어서 가'?
내가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백기는 말고삐를 세차게 당겼다.
준마가 울부짖으며 앞발을 높이 들어 올렸고, 백기는 그 기세를 이용해 정면에서 날아오는 칼날을 피했다.
순간 칼빛이 번뜩였다.
장도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일으킨 거센 바람이 땅에 떨어진 대나무 잎을 휘몰아쳤고, 달려들던 사람 몇 명을 한꺼번에 밀어냈다.
나는 다리의 통증을 참으며 몸을 일으킨 뒤 마차를 엄폐물 삼아 옆으로 물러났다.
산길에는 삽시간에 칼빛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화살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정면에서 몰아치는 바람마저 얼굴을 아프게 할 만큼 매서웠다.
나는 품속의 청옥 인장과 장부를 단단히 움켜쥐고 주변의 혼전을 빠르게 살폈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길을 찾아야 했다.
그때 갑자기 칼빛 하나가 번뜩였다.
나는 몸을 비틀어 피하는 동시에 소매 속에 감춰둔 단검을 뽑아 정면에서 날아드는 칼을 막아냈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손목이 저릿하게 울렸다.
몸의 균형을 되찾기도 전에 발밑의 자갈이 와르르 무너졌다.
내 몸이 뒤쪽 비탈 아래로 기울어졌다!
큰일이야!!
다급하게 몸을 최대한 웅크렸지만, 어깨와 등이 쉴 새 없이 자갈과 바위벽에 부딪혔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순간, 갑자기 손목이 단단히 붙잡혔다.
누군가 내 손을 움켜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고,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오랜만에 어린 시절 살았던 대나무 숲이 꿈에 나타났다.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스쳤고, 공기에는 나뭇잎의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했다.
나는 알록달록한 비단 띠 두 개를 들고 몸을 날려 또 다른 나뭇가지 위로 올라섰다.
유연
빨리 와!
멀지 않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소년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소년
위쪽 가지는 약해. 더 올라가지 마.
유연
뭐가 무서워? 스승님이 그랬잖아. 무공만 충분히 익히면 아무리 가느다란 나뭇가지도 무섭지 않다고.
유연
게다가 복을 빌려면 당연히 가장 높은 곳에 걸어야 더 잘 이루어지지.
그렇게 말하며 나는 조금 더 높이 뛰어오르려 했다.
그런데 발끝이 나뭇가지에 닿자마자 아래에서 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졌다.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누군가의 품에 끌려 들어갔다.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귓가를 스치던 바람 소리 속에서, 나는 무섭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저 그 호박색 눈동자가 유난히 밝게 빛났다는 것만 기억났다.
***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맑은 호박색 눈동자가 보였다.
순간 아직도 꿈속에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 차가워 보이는 그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기
깨어났어?
유연
……?!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낡고 허름한 빈집 안에 누워 있었다.
나무문 한쪽이 문틀에 비스듬히 매달려 있었고, 밖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바람에 휩쓸린 빗줄기가 집 안까지 들이쳤다.
유연
당신……
막 입을 열려던 순간, 그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두컴컴한 빛 속에서 그의 손가락이 가볍게 움직였다.
……분명 그 청옥 인장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다급하게 손을 뻗어 인장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백기는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손목을 들어 올려 내 손을 피했다.
나는 곧바로 손을 돌려 그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고, 다른 손으로는 소매 속의 단검을 꺼내려 했다.
백기는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더니 손가락 마디로 내가 단검을 뽑으려는 동작을 정확히 눌러 막았다.
몇 차례 공방이 오가는 사이, 나는 양팔이 등 뒤로 꺾인 채 나무 기둥에 밀려 붙었다.
순간 오른쪽 어깨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날카로운 통증에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나를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이 멈칫하더니 힘을 조금 풀었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차갑고 위압적인 기운이 어려 있었다.
백기
재물을 훔치면 가벼워도 장형이고, 무거우면 유배형이야. 네 솜씨를 보니 처음도 아닌 것 같은데.
백기
관아에 넘기면 백성을 위해 해악을 없애는 셈이겠군.
유연
……백성을 위해 해악을 없앤다고요? 당신이요? 유병의 앞잡이 주제에?
나는 이를 악물고 오른쪽 어깨의 통증을 참았다.
목소리마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유연
유병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알아요?
영천성 밖에서 강제로 빼앗긴 논밭과 가로챈 구휼미가 떠올랐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 한 장을 제출하려고 관아 앞에서 정신을 잃을 때까지 무릎을 꿇었던 사람도 있었다.
마음속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그 분노가 가슴을 태우는 듯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유연
그자는 말 한마디로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사람 목숨을 풀잎처럼 하찮게 여기면서도 계속 벼슬을 높여왔어요!
유연
당신은 그런 자가 모은 부정한 재물을 지키며 장안까지 가고 있으면서, 감히 내게 백성을 위해 해악을 없앤다고 말하는 거예요?
순간 집 안에는 폭우가 지붕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만 남았다.
백기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촛불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흔들렸다.
마치 끝없이 어두운 밤에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백기
넌 그 장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고 있지?
유연
……당신이 알 바 아니에요.
백기
그럼 네가 그 물건들을 훔친 건, 세상에 공개해서 유병을 몰아내려는 거야?
유연
……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그와 아무 말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침묵 때문인지, 차분했던 그의 목소리에 조금씩 조급한 기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백기
그러면 놈들은 장부가 위조된 거라고 할 거야. 옥인도 네가 훔쳐서 누명을 씌우려 한 거라고 하겠지.
백기
결국 모든 죄를 네게 뒤집어씌울 거야.
유연
그자가 높은 권세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은 전부 자기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하나요?
유연
이 세상에는 정말 정의라는 게 없는 거예요?!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눈가가 뜨겁고 시큰해졌다.
한동안 우리 중 누구도 먼저 물러서지 않았다.
세상에 오랫동안 쌓여온 탁한 물결처럼 밤의 어둠이 천지를 무겁게 뒤덮고 있었다.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 어둠은 걷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한참 뒤, 백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차분한 목소리에는 무언가를 애써 억누르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백기
그럴 리가 없지.
유연
……뭐라고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백기
억울한 진실은 당연히 천하에 밝혀져야 해. 하지만 이 세상에는 유병 같은 자가 수도 없이 많아.
백기
진짜 근원은 장안에 있어.
나는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실려 가는 수레 가득한 금은과 비단은 모두 장안의 이부상서 최간장에게 바쳐지는 것이었다.
백기
최간장의 저택에는 밀실이 하나 있어. 그 안에는 그가 받은 재물과 은밀하게 주고받은 서신, 각종 장부가 숨겨져 있지.
나는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더 큰 의문과 의심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유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풀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에게서 거리를 벌린 뒤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바라보았다.
백기
이번에 내가 장안으로 가는 목적은 최간장의 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는 거야.
백기
네가 유병을 몰아내려는 거라면 우리 둘이 협력할 수 있어.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유연
……이해가 안 돼요. 당신은 유병의 부하 아니었어요?
백기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사정이 있어서 '잠시' 그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것뿐이야.
백기
협력한다면 일이 끝난 뒤 널 보내주겠어. 하지만 거절한다면 내일 아침 관아로 압송할 거야.
유연
……
나는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 했다.
하지만 호박색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침착함과 확신만이 어려 있었다.
마치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백기
날 믿지 못하겠다면 청옥 인장부터 네게 맡겨도 돼.
유연
내가 그걸 가지고 도망칠까 봐 무섭지도 않아요?
백기
그럼 다시 잡아 오면 되지. 그때는 마침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 있겠네.
나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몸을 조금 움직이자 오른쪽 어깨의 통증이 다시 밀려왔다.
유연
쓰읍——
백기는 그제야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품속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백기
절벽에서 떨어질 때 오른쪽 어깨를 베였어. 다시 붕대를 감아줄게.
고개를 숙여 살펴보니 오른쪽 어깨에 선홍색 피가 번져 있었다.
옷 아래에는 붕대가 여러 겹 감겨 있었는데, 그 위로도 붉은빛이 희미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누가 붕대를 감아줬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순간 온몸의 피가 얼굴로 몰려드는 것 같았다.
유연
……다, 당신! 몰래 내 옷을 벗긴 거예요?!
백기는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몸까지 순간 굳어지더니 서둘러 해명했다.
백기
안 벗겼어! 상처 근처의 옷감만 잘라냈어.
백기
네가 계속 의식을 잃고 있었잖아. 상처에서 피가 더 흐르면 위험해질 것 같아서 그랬어.
촛불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의 귓바퀴가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얼굴만큼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다.
나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문득 그의 손가락 마디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
소매 끝도 찢어져 있었고, 손목 옆으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피부 위에 말라붙어 있었다.
의식을 잃기 전의 혼란스러웠던 장면들이 갑자기 다시 떠올랐다.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질 때 누군가 나를 감싸 보호해 준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이 백기였을까?
나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눈썹과 눈매에는 붉은 기운이 살짝 어려 있었고, 부끄러움을 참는 듯 입술도 조금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호박색 눈동자까지……
어째서인지 방금 전의 꿈이 떠올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유연
우리…… 예전에 만난 적 있나요?
백기는 잠시 멈칫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지만, 결국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붕대를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백기
흠…… 뒤돌아봐. 약 발라줄게.
얼굴의 열기가 귓가까지 번진 것 같았다.
나는 옷자락을 꽉 움켜쥔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백기도 재촉하지 않고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등 뒤의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은근한 통증이 전해졌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백기는 능숙하게 낡은 붕대를 풀어냈다.
하지만 상처에 약을 바르는 손길만큼은 몹시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마치 나를 아프게 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어째서인지 마음속 어딘가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것이 바람에 살짝 스치는 듯했다.
나는 몇 번이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유연
당신과 협력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먼저 당신이 날 속이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해야겠어요.
백기
좋아. 장안에 도착하면 네가 최간장의 저택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할게.
백기
그때 직접 확인하면 돼.
3장
사흘 전, 나는 백기를 따라 장안에 들어왔다.
마침 변경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황제는 대사면령을 내렸고, 칠석을 맞아 특별히 야간 통행금지까지 해제하여 백성들과 함께 승리를 축하하도록 했다.
이제 막 밤이 내려앉았는데도 거리에는 이미 화려한 천막과 주점의 깃발이 늘어서 있었다.
장안성 곳곳에서 밀려오는 떠들썩한 소리가 밤을 가득 채웠고, 어둠마저 환한 등불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술 쟁반을 반듯하게 받친 채 다른 시녀들을 따라 서둘러 앞마당을 가로질렀다.
연회장 안에서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듣기로는 안락방에서 가장 뛰어난 악단과 무희들을 불렀다고 했다.
회랑 아래에는 각지에서 보내온 생일 선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비단과 옥기, 향료……
그중에는 영천에서 보내온 물건들도 섞여 있었다.
외지에서 선물을 가져온 손님들은 모두 바깥 연회장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백기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저택 안에서 발견한 것들을 떠올리자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별채의 연회장은 앞쪽 대청보다 조금 조용했다.
각 주에서 온 관리인과 호위무사 몇 명이 자리를 나누어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제법 근사한 술과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백기는 창가 자리에 앉아 손에 든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그에게 다가갔다.
술을 따라주는 척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연
우리가 돌려놓은 가짜 장부와 청옥 인장,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보내온 나무 상자 몇 개가 따로 보관되어 있어요.
유연
당신이 말했던 밀실도 찾았어요.
유연
창고의 선반 뒤에 있는데, 아주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요. 게다가 열쇠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더라고요.
술이 졸졸 소리를 내며 잔에 흘러들었다.
은은하고 깊은 술 향기가 퍼져 나왔다. 향만 맡아도 좋은 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백기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백자 술잔의 매끄러운 가장자리를 어루만졌다.
그는 술을 단숨에 들이켠 뒤 내 쪽으로 조금 몸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백기
듣기로는 최간장의 서재에 자단목으로 만든 붓걸이가 하나 있다고 해. 평소 무척 아껴서 다른 사람은 절대 손대지 못하게 한다더군…… 아마 거기에 있을 거야.
나는 그동안 저택을 돌아다니며 살펴본 곳들을 빠르게 떠올리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
어쩐지. 서재 근처에 왜 그렇게 순찰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했어요……
유연
기억하기로는 서재 다락에 천창이 하나 있었어요. 그쪽으로 들어가면 경비병들 눈에 띄지 않을 텐데, 기회를 봐서 살펴볼까요?
백기
지금은 저택에 사람이 너무 많아. 밤이 깊어질 때까지 기다려.
나는 그가 앞으로 어떤 계획을 세워두었는지 알 수 없어서 마음이 계속 불안했다.
주변에서는 술에 취한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거리낌 없이 터져 나왔다.
술 냄새와 분 냄새, 가식적인 아첨이 뒤섞여 가슴이 답답해졌다.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던 참에 곁에 있던 백기가 문득 술잔을 내려놓았다.
백기
술이 좀 취하는군…… 가자. 밖에서 바람 좀 쐬어야겠어.
나는 백기가 몸을 기댈 수 있도록 적당히 부축하며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문을 나서자마자 백기는 내 손을 놓았고, 얼굴에 어려 있던 취기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옆의 난간에 기대어 칼을 품에 안고는 머리가 조금 아픈 듯 미간을 가볍게 문질렀다.
달빛이 그의 머리카락 끝에 내려앉았다.
평소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면서 한결 부드럽고 꾸밈없는 모습으로 보였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유병 곁에서 일했으니 이런 자리에는 벌써 익숙해졌을 줄 알았는데요.
백기
난 호위무사라 대부분 순찰을 맡았어. 피할 수 없는 자리도 방금처럼 빠져나오면 그만이고…… 하지만 앞으로는 그럴 필요도 없겠지.
유연
네?
백기
오늘 밤, 우리가 그자를 무너뜨릴 거야.
낮고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사실 지금까지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경계심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토록 굳건한 눈동자를 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누군가 조금만 더 그를 믿어보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그때 연회장에서 사람들이 몇 명 더 나왔다.
여기도 조용히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백기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유연
가요. 요 며칠 동안 저택을 돌아다니면서 익혀뒀거든요.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을 알아요.
별채의 연회장에서 멀어지자 악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유연
아까 오늘 밤 그자를 무너뜨릴 거라고 했잖아요…… 아직 계획을 알려주지 않았는데요.
백기
조금 있으면 연회가 끝날 거야. 밖에 있는 내 동료들이 배치를 마치면 신호를 보내올 거고.
백기
그때 내가 서재 근처의 순찰병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할 테니, 넌 밀실 열쇠를 찾아. 물건을 손에 넣으면 바로 빠져나오고.
백기
북문 맞은편 골목에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야.
유연
……동료도 있었어요?
말을 내뱉고 나서야 스스로도 쓸데없는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아무도 모르게 이 저택에 들여보낼 수 있었던 걸 보면, 당연히 다른 조력자들이 있을 테니까.
우리는 소란스러운 곳을 벗어나 외진 별채 뜰에 도착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오색 비단 띠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백기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백기
이건…… 평중나무인가?
유연
맞아요. 요 며칠 가끔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을 때 이곳에 왔어요.
유연
다른 시녀들한테 들었는데, 백 년 전 황제께서 공을 치하하기 위해 직접 심으신 나무래요.
유연
그래서 명절이 되면 저택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빌곤 한대요.
백기
너도 여기서 소원을 빌어봤어?
유연
아니요. 이 저택 주인이 워낙 재수 없는 사람이라서요……
백기가 웃음을 지었다.
백기
북쪽 시장의 인안방에도 백 년 묵은 오동나무가 한 그루 있어. 거기서 소원을 빌면 잘 이루어진다더군.
유연
그래요? 그럼 나중에 꼭 가봐야겠네요.
백기는 고개를 들어 조금 더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옅은 그리움이 스쳤다.
백기
응. 그 나무는 가지도 굵고 튼튼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가지도 아주 단단하지……
말을 이어가던 그가 문득 멈칫하더니 시선을 살짝 돌렸다.
유연
……왜 그래요?
백기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소원을 적은 비단 띠를 나무 꼭대기에 걸면 더 잘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느껴지던 익숙한 감각이 더욱 선명해졌다.
마치 무언가를 곧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연
당신도 소원을 가장 높은 나무 꼭대기에 거는 걸 좋아해요?
백기
……
백기는 잠시 침묵했다.
마치 마음의 준비를 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나를 바라보았다.
백기
아니. 예전에 알던 사람이 그렇게 하는 걸 좋아했어. 그때는 경공도 서툴러서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지.
그는 말을 마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예전에 나도 누군가와 함께 영천의 묘회에 간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우리의 소원을 가장 높은 곳에 걸 수 있도록 나와 함께 나무에 올라갔다.
하지만 도중에 우리 둘 다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눈앞의 호박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숨이 조금씩 가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래된 기억 속에서 무언가가 금방이라도 밀려 나올 것 같았다.
유연
백기, 혹시 당신……
바로 그 순간, 멀지 않은 하늘에서 불꽃 하나가 터졌다.
백기는 그쪽을 흘끗 바라보더니 얼굴에 어려 있던 그리운 기색을 거두었다.
백기
이제 시간이 됐어. 움직여야겠군. 무슨 일이든 조심해.
그런 그를 보자 마음속의 수많은 의문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유연
당신도 조심해요.
백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남아 있던 차가운 기운이 조용히 사라졌다.
백기
약속한 일은 반드시 끝내고 곧 돌아올게. 저잣거리에서 기다려.
백기
유연.
그가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그 목소리는 마치 한 줄기 바람이 기억 위에 쌓인 먼지를 단숨에 걷어내는 것 같았다.
숲속의 나뭇가지와 잎들이 흔들렸다.
얼룩덜룩한 햇살 사이를 지나 어린 시절의 소년이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 모습은 천천히 눈앞의 남자와 겹쳐졌다.
4장
밤이 이미 깊었는데도 저잣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처마 아래로 등불이 끝없이 이어져 긴 거리를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처녀들은 오색실을 손에 들고 있었고, 아이들은 작은 등불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어디를 둘러봐도 칠석날 밤의 즐거움이 가득했다.
나는 가장 높은 누각의 지붕 위에 앉아 최간장의 저택에서 이어지는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연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왜 아직 안 오는 거지.
조금 전 길에서 누군가 내 손에 쥐여준 금귤을 연신 위로 던졌다 받으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백기와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앞마당에서 어지러운 고함과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위병들이 잇달아 앞마당으로 달려가는 틈을 타, 나는 서재의 자단목 붓걸이에서 열쇠를 찾아냈다.
그리고 백기가 어두운 골목에 배치해 둔 조력자에게 그것을 넘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벼운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몰려와 최간장의 저택을 봉쇄했다.
분명 근처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한밤중에 상서의 저택을 곧바로 봉쇄할 수 있다니……
설마 금오위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백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직 그의 입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한 그 일도.
걱정과 수많은 의문이 가슴을 가득 메워 마음이 어지러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최간장의 저택으로 이어지는 길을 유심히 살폈다.
마침내 익숙한 모습이 골목 끝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백기는 누군가를 찾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짓고 손끝에 살짝 힘을 주어 들고 있던 작은 귤을 던졌다.
백기는 칼을 들어 그것을 막아내더니 날카로운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나를 발견하자 눈에 서려 있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웃으며 가볍게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왔다.
백기
장안 거리에서 '암기'를 던지다니. 법에 따라 '체포'해야겠는데.
짓궂은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느릿하게 이어졌다.
나는 그에게 눈을 깜빡여 보였다——
유연
지난번에는 제가 방심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쉽게 잡히지 않을걸요?
나는 곧바로 반대편 지붕을 향해 밧줄을 던졌다.
그리고 매달린 꽃등 사이를 가로질러 몸을 날렸다.
형형색색의 등불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처마 아래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과 웃음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날아와, 마음까지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모든 소란을 뚫고 귓가에 닿았다.
백기
유연.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사람이 처마 끝에서 몸을 날려 내가 잡은 밧줄을 단단히 붙잡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밤의 끝자락에서 바람이 휘몰아쳐 왔다.
곁의 등불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기울었다.
우리 머리 위로 불꽃놀이의 빛줄기가 끊임없이 스쳐 지나갔고, 그 빛은 나를 바라보는 백기의 눈동자에도 내려앉았다.
백기
따라잡았다.
밤바람에 밀려 우리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때 옷 속에 넣어두었던 청옥 인장이 미끄러져 나오자,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붙잡았다.
유연
……뭘 그렇게 진지하게 쫓아와요!
백기
당연히 진지해야지. 의적이란 원래 신출귀몰해서 한눈팔면 금세 사라져 버리잖아.
유연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백기가 웃었다.
백기
일단 '체포'한 다음, 오래된 오동나무로 데려가야지. 함께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 소원을 빌 거야.
그의 눈동자에는 온통 다정함이 어려 있었다.
그 눈빛이 하나의 대답이 되어 내 마음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유연
……역시 진작부터 저를 알아봤군요.
백기
처음 눈여겨본 건 네가 차를 권했을 때였어.
유연
매실가루 때문에요?
백기
그것도 이유 중 하나야. 그러다 네가 계속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기척을 숨기며 걷는 모습이 어릴 때랑 똑같더라고……
유연
어디가 똑같아요? 그때보다 실력이 훨씬 늘었는데…… 당신이 너무 경계심이 강한 거예요.
백기
경계한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신경이 쓰였던 거야.
알록달록한 등불 아래에서 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심장도 조금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백기
그 여자아이가 어쩌면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지만 끝내 찾지 못했던 사람일지도 몰랐으니까.
백기
그렇다면 절대 놓칠 수 없잖아.
백기는 단숨에 나를 끌어안고 옆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평평한 자리를 찾아 함께 앉았다.
나는 조금 의아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연
계속 저를 찾고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저와 스승님이 살던 오두막에 오지 않았던 건 당신이잖아요……
기억 속에 노을빛으로 물든 숲이 천천히 떠올랐다.
백기는 언제나 그 방향에서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 모습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백기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백기
……그때 영천에 기근이 들었던 거 기억해?
기근이라는 말을 듣자 익숙하면서도 무거운 기억들이 떠올랐다.
유연
당연히 기억하죠. 저도 스승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구휼을 도왔는걸요.
유연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왜 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쓰러져 있는지 몰랐어요. 스승님이 굶어 죽은 사람들이라고 알려주셨죠.
유연
그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스승님은 영천 땅이 비옥하고 산에도 열매가 많이 열린다고 하셨는데,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굶어 죽은 걸까 하고요.
유연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됐어요. 조정에서 내려보낸 구휼미를 유병이 대량으로 가로챘기 때문이었다는 걸요.
백기
그뿐만이 아니야. 유병은 굶어 죽거나 기근을 피해 떠난 백성들을 호적에서 지워버리고, 곡식을 나눠준 명부까지 조작했어.
백기
가로챈 곡식은 전부 이미 지급한 것으로 기록했지. 그러고는 오가는 상단을 통해 남은 곡식을 영천 밖으로 빼돌려 다른 지역에 비싼 값으로 팔아넘겼어.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아플 지경이었다.
유연
그럼 당신은 그때부터 유병을 조사하고 있었던 거예요?
백기
맞아. 처음 찾아낸 건 행방이 묘연해진 구휼미 한 무더기뿐이었어. 하지만 깊이 파고들수록 연루된 사람이 점점 많아졌지.
백기
그래서 지난 몇 년 동안 유병 밑에서 일하는 척하면서 그와 접촉한 사람들을 하나씩 추적했어——
백기
그러다 알게 됐지. 유병은 그저 한 고리에 불과했다는 걸. 서로 감싸주며 백성들에게서 재물을 착취하는 관리들이 훨씬 더 많았어.
밤바람이 길게 이어진 등불 사이를 지나며 그의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유연
그런 사람 곁에서 계속 일을 꾸며왔다니…… 위험하지 않았어요?
백기
위험하진 않았어. 조금 피곤했을 뿐이지.
백기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빛에는 그저 차분하고 순수한 굳은 의지만이 담겨 있었다.
백기
그래도 끝까지 버티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이 있고, 그 덕분에 고통받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어.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내 가슴에는 조금씩 아릿한 통증이 번졌다.
칠 년이라는 세월은 분명 그토록 길었는데.
그는 그저 '가치가 있었다'는 한마디로 홀로 어둠 속을 걸어온 수많은 밤낮을 모두 지나쳐 버렸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저 더없이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유연
정말 다행이에요. 이제 모든 게 끝났으니까, 더는 그런 곳에 머물지 않아도 되잖아요.
백기
응. 최간장의 밀실에서 나온 물건들로 많은 사람의 죄가 드러날 거야. 그들은 모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겠지……
백기
유연, 우리가 해냈어.
소년은 장안의 떠들썩한 밤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눈동자는 맑고 날카롭게 빛났다.
나는 눈앞의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오래전 숲속에 꼿꼿이 서 있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정작 그는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먼 곳을 바라보았다.
등불로 환하게 밝혀진 장안성의 절반 이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 최간장의 저택은 보이지도 않았다.
유연
꼭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유연
당신을 다시 만난 것도 꿈만 같고, 당신과 함께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해낸 것도 꿈만 같아요.
백기
그럼 꿈이 아니라면 어땠을 것 같아?
유연
음…… 원래 세웠던 계획대로였겠죠? 청옥 인장과 장부를 손에 넣고, 장부도 몇 권 베껴두고요.
유연
장부를 토대로 부정한 재물을 운송한 증인을 찾아내고, 그때 뇌물이 오간 물품 계약서와 역참 문서를 모아서 어사대에 고발하려고 했어요.
유연
베껴둔 다른 장부는 기회를 봐서 최간장과 사이가 좋지 않은 유 상서의 저택에 몰래 넣어둘 생각이었고요.
나는 원래 계획을 하나씩 설명했다.
그러다 문득 곁에 있던 백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의 눈빛에는 미소와 함께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유연
……왜 그래요?
백기
계획을 정말 빈틈없이 세웠구나 싶어서. 대단하고, 용감하기도 하고…… 다만 너무 위험했어.
유연
하지만 방금 당신도 그랬잖아요. 어떤 위험은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요.
유연
게다가 제가 용기를 냈고 당신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거잖아요.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백기는 마치 본능적으로 화답하듯 손가락을 살짝 구부려 내 손바닥을 감싸 쥐었다.
긴 거리에 늘어선 등불이 깊은 밤까지 이어졌고,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멀리서 피어오르는 불꽃이 장안성 절반을 밝게 비췄다가 다시 어둠 속에 잠기게 했다.
유연
전에 들었는데, 칠석 등불 축제에서는 꽃등을 만 개도 넘게 밝힌대요.
유연
사람들이 무사히 다시 만나고,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얻기를 바라는 뜻이라던데…… 그중에는 분명 당신을 위해 밝혀진 등불도 하나쯤 있을 거예요!
나는 긴 거리를 따라 물결처럼 이어진 등불을 가리켰다.
유연
우리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지만, 줄곧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왔잖아요.
유연
그러니까 혼자서 어둠에 익숙해지려고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우리가 지키고 싶은 이곳들을 더 많이 바라봐요.
백기는 나를 바라보았다.
놀란 듯했던 표정이 차츰 부드러운 미소로 바뀌었다.
수많은 등불의 빛이 호박색 눈동자에 비쳐, 그 안에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던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혀주었다.
하지만 그 시선 속에는 오직 나만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날카로운 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백기의 등 뒤에서 빛줄기 하나가 솟아올랐고,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진 불꽃이 그의 눈썹과 눈매를 환하게 비추었다.
가슴을 울리며 피어나는 불꽃 속에서 내 심장이 엉망으로 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 순간, 마음속에 뒤섞여 있던 수많은 생각과 그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들이 하나의 소원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소원은 내 마음속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유연
백기.
백기
유연.
우리는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백기
난 평소에 소원을 잘 빌지 않는데, 지금은 소원이 하나 생겼어.
유연
저도요.
백기는 내 손을 잡고 지붕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밤바람이 소매 안으로 가득 밀려들었고, 발아래의 떠들썩한 풍경이 빠르게 뒤로 멀어졌다.
마음까지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등불 아래에서 반듯하고 잘생긴 얼굴이 환하게 펴져 있었고, 입가에는 평소 좀처럼 볼 수 없던 경쾌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높이 솟은 오동나무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무 아래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사람들이 손을 뻗을 수 있는 낮은 가지에는 이미 오색 비단 띠가 빼곡하게 매달려 있었다.
나는 밧줄을 꺼내 반대편의 더 높은 처마를 살폈다.
백기
이번에도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유연
당연하죠. 하늘에 가까울수록 신령님이 소원을 더 잘 들어주실 테니까요.
나는 웃으며 밧줄을 던졌다.
쇠갈고리가 높은 처마에 단단히 걸렸다.
나는 지붕을 힘껏 박차고 백기와 함께 오동나무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바람 소리가 순식간에 귓가를 가득 메웠다.
우리는 곧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에 내려앉았다.
나는 머리를 묶고 있던 댕기를 풀었다.
유연
비단 띠를 안 가져왔으니까 이걸로 대신해요. 백기, 당신은 무슨 소원을 빌고 싶어요?
백기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평안하기를. 변방에 전쟁이 없고, 백성들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기를.
유연
어쩜 소원이 그렇게 크면서도 소박해요! 당신 자신을 위한 소원은 없어요?
백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백기
그렇다면 앞으로도 내가 지켜낸 곳들을 언제까지나 바라볼 수 있기를.
백기
그리고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기를.
그의 목소리는 정면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같았다.
그 바람은 거스를 틈도 없이 내 마음을 온통 감싸 안았다.
앞으로는…… 나도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었다.
내가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댕기를 걸자, 백기는 나를 감싸 안은 팔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었다.
백기
아까 소원을 빌겠다고 했잖아. 무슨 소원이야?
유연
비밀이에요.
나는 백기를 한 번 바라보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백기가 언제나 무사하고 행복하기를.
그리고 우리가 해마다 함께 등불을 구경하고 소원을 빌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