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두 번째 단추
-하양이가 당신을 향해 날개를 파닥이자 당신은 손을 펼쳤고 당신의 손바닥에 흰 버튼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고등학교 시절엔 말도 안 되지만 낭만이 가득한 전설이 꽤 많았다. 예를 들면, 강의동 3층 모퉁이 일곱 번째 계단에서 고백하면 성공할 수 있다든가, 학교 뒤 운동장의 여섯 번째 나무에 두 사람의 이름을 새 기면 오해가 풀린다든가, 졸업식에서 남학생이 심장 가장 가까이에 있 는 교복 두 번째 단추를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주면 두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이야기 같은 거 말이다. 남학생들은 대체로 이런 전설을 믿지 않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은근히 기대하곤 했다. 물론 백기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한 번은 점심시간에 우연히 여학생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두 번째 단추, 너무 로맨틱하지 않아? 받으면 분명 행복할 거야!" 소녀의 동경 가득한 얼굴이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백기의 눈에 들어왔다. 졸업식이란 말이지. 그는 고개를 들고 묵묵히 생각했다. 빨리 왔으면 좋겠네. 하지만 그가 말없이 떼어낸 단추는 결국 그 소녀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함에 가려진 애틋한 마음과 함께 조심스레 작은 상자 속에 보관되었을 뿐이다.

2. 호박석
-실컷 모이를 먹은 하양이가 어디에선가 호박석을 물고 왔다. 햇빛에 반짝이는 찬란한 빛은 마치 언젠가 본 눈동자 같았다......
이 호박석은 햇살 아래의 맑고 푸른 파도로 가득 차 있었고 서늘함 속에 부드러움을 담고 있었다. 소녀는 문득 그 호박석이 아주 익숙한 눈동자와 무척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하기로 그건 어느 늦가을, 고학년 학급의 복도를 지나가던 중 무심코 한 교실로 시선올 돌렸을 때의 일이었다. 싸구려 커튼이 산들바람에 펄럭였고 창가의 소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아직 제대로 각이 잡혀있지 않았고 표정에는 범접하기 힘든 자유로움과 냉담함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두 눈동자만큼은 더없이 또렷했고 빛이 넘쳐 흘렀다. 빛이 굴절되는 맑고 깨끗한 눈동자는 마치 여행자가 종착지도 잊게 만드는 심해만 같았다. 그 반짝이는 눈은 눈앞의 호박석보다도 훨씬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3. 백기의 피어싱
-하양이가 날개를 파닥이며 입에 물고 있던 피어싱을 당신의 손바닥에 내려놓았다. 점점이 빛나는 피어싱에서 백기의 얼굴이 보일 것만 같았다......
거울 속 소년의 표정은 한없이 차가웠고 입가에는 멍이 들어있었다. 비 맞은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이마에 붙었고 호박석 같은 눈동자는 짙은 재로 덮여 있는 것 같았다. 피어싱이 귀를 뚫고 들어갔을 때는별다른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주먹을 휘두르는 감각이 더 통쾌했는지, 백기는 더 이상 귀에 달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피어싱 주변에 묻은 핏자국올 대충 손으로 문질렀다. 핏자국은 손등의 검붉은색과 뒤섞여 무엇이 먼저였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창밖에 쏟아지는 폭우는 점점 거세지며 쓸데없이 용감하게 제사를 올리듯 한 번, 또 한 번 창문에 부딪혀왔다. 그는 가만히 담 모퉁이에 기대어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비가 더 오래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4. 백기의 팔찌
-하양이가 창가 근처를 빙빙 돌더니 잠시 후 팔찌 하나를 창턱에 떨어뜨렸다. 녹색 식물 위에 걸린 팔찌 위에 희미하게 '백'이라고 쓰여 있는 게 보였다......
백기는 언젠가 임무에 나가기 전 자신의 팔찌를 그녀에게 남기고 간 적이 있었다. 그녀는 팔찌를 꼭 쥐고 웃으면서 그에게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그는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매번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걱정 마. 금방 돌아올게."
임무를 마친 뒤 그는 휴대폰에 조용히 남겨진 부재중 전화 한 통과 문자 하나를 보았다. 새벽녘의 도시는 조금 적막하고 쓸쓸했다. 그는 답장을 쓰다가 다시 지워버렸다. 갑자기 예전처럼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는 바람의 지휘에 따라 무언가에 흘린 듯 그녀의 창문 앞에 도착했다. 달빛이 어두운 탓에 그녀의 눈가에서 빛나는 눈물방울이 유독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는 꿈을 꾸는 중인지 깊이 잠들지 못하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나 손에는 그의 팔찌를 꽉 쥔 채였다. 백기는 외로이 남겨져 있던 전화와 문자를 떠올리며 그녀의 앞에 엎드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살며시 닦아주었다. "미안해…나 돌아왔어.
5. 블랙이의 열쇠
-좋아하는 먹이를 먹은 하양이는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잠시 후, 하양이가 창턱에 내려앉아 오토바이 열쇠 하나를 내려놓는 모습이 보였다......
인적 없는 깊은 밤, 별의 장막이 드리워진 머나먼 곳, 요란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 계속해서 빨라지던 심장 박동이 등 뒤의 온기에 쿵쿵 울린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지워낸 유일한 소리가 되어 심장에서 전신으로 퍼져 나가 끝도 없이 맴돈다.
6. 오래된 종이비행기
-하양이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어디선가 종이비행기를 하나 물고 왔다. 누렇게 색 바랜 종이에서 뭔가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넌 웃는 모습이 참 예뻐.
7. CD
-하양이가 기분이 좋은지 불룩한 배를 두드렸다. 풍성한 날개에 흐르는 윤기보다, 하양이가 물어온 백기의 CD가 더 밝게 빛났다......
부드러운 햇살 아래, 커튼 위로 바람이 살포시 불어왔다. 백기는 책상 옆에 앉아 기타를 들고 종이 위에 생각나는 대로 끄적거렸고, 미간에는 수시로 주름이 졌다. 맑은 기타소리가 드문드문 방안에 울려 퍼졌다. 음정을 더듬거리는 소리와 사각거리는 펜 소리는 서로 어우러져 차분하고도 부드러운 음표를 만들어냈다. 그는 여러 번 고치느라 살짝 구겨진 가사 종이를 보며 가볍게 흥얼거렸다. 서투른 실력이었지만 아주 진지했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이 빛을 완전히 잃을 때까지 그는 줄곧 컴퓨터 앞에 앉아 이어폰을 낀 채 이미 수없이 반복한 선율을 연주하며 여러 번 다시 녹음했다. 하지만 섞여 들어간 잡음과 소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백기는 초조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옆에 준비해둔 CD를 바라보다가, 그나마 제일 나은 버전을 골랐다 다만, 그 CD는 결국 구석에 처박혀 책 사이에 끼워진 채 아무도 모르는 기억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몇 년 후, 그 오래되고 단순한 선율이 그녀의 집에 다시 울려 퍼지게 될 줄은 그 역시 몰랐을 것이다.

8. 슬램덩크 포스터
-하양이는 만족스러운 듯 날개를 치며 오래된 포스터를 한 장 물고 왔다. 포스터에는 슬램덩크 캐릭터들의 모습과 함께 백기의 필체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거야'라고 쓰여 있었다......
한때 소년들은 저마다 "감독님, 저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고 외쳤고, 소녀들은 '서태웅'과 '윤대협'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를 두고 끝도 없는 논쟁을 벌였다. 백기는 문득 자신도 농구와 꿈에 관한 이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열정이 끓어오르는 그 애니메이션을 본 후, 그는농구장으로 달려가 몇백 번이나 슛을 연습했다. 슬램덩크 포스터가 벽에 걸렸고, 그는 강백호의 옆에 '난 너를 물리칠 거야!"라고 적었다. ......그도 '너'가 누구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 그와 가는 길이 다른 세상 만물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침묵할 수 밖에 없던 지난날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머리가 깨져 피를 보고서야 농구로는 자신이 지키고 싶은 걸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물리쳐야 할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인 것만 같았다.

9. 오래된 반창고
-하양이는 점점 더 높이 날아올랐다. 날개가 햇살을 가르며 아름다운 궤적을 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양이가 어디선가 반창고를 하나 물어 왔다. 오래되어 보였지만 곱게 잘 보관되었던 것 같다......
백기는 구석에 앉아 있었지만, 상처투성이인 그 얼굴 때문에 도서관에서 책을 보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방금 도서관 입구에서 소녀와 마주쳤던 장면을 떠올렸다. 상대의 눈에 떠오른 당혹스러움이 그의 가슴에 또렷하게 박혔다. ...내가 또 놀라게 한 걸까. 잠시 후, 한예준이 뛰어 들어왔다. "백기 형, 형!!!" 한예준은 잔뜩 흥분한 채 손에 든 연분홍색 반창고를 흔들었다. "어… 어서 붙여요!!!" 백기는 그를 본체만체했다. "형수님이 준거라고요!!!" 백기는 멈칫하더니 한예준이 건넨 그 작은 반창고를 멍하니 쳐다봤다. 입가의 통증은 여전히 거슬렸고 손가락의 감각은 여전히 둔했지만, 그는 그 작은 반창고를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처럼 받쳐 들었다. 그 분홍색은 곧 그의 마음속에 딱 붙어 그가 진창 같은 어둠에 빠질 때마다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었다.
10. 도서대출카드
-하양이는 당신에게 기분 좋은 듯한 소리를 내며 하얀색 카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폴짝거리며 물러났다. 그 카드는...... 도서대출카드였다.
도서대출카드에는 두 개의 이름이 얌전하게 위아래로 적혀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듯, 무언의 약속처럼.
유연
백기
11. 금속 은행잎
-하양이는 당신의 어깨 위로 날아올라 정수리의 깃털을 당신의 뺨에 비비며 입에 물고 있던 투명한 작은 주머니를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안에는 조금 흠집이 난 금속 은행잎 세 장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특수한 신분을 알게 된 후 백기는 가장 중요한 보호 임무를 자청했다.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다 눈앞에 떨어지는 은행잎을 보며, 처음 그가 추락했올 때 그녀가 잡아주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부터 그들은 보이지 않는 사슬로 굳게 연결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은행잎 팔찌를 만들어 주겠다고 마음먹은 후 그는 힘든 세공 과정을 거쳐야 했다. 작은 금속 은행잎은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먼저 만든 세 개의 잎은 금이 가거나 잎이 부러져 실패했고, 네 번째 도전했을 때에야 마침내 성공하여 은행잎을 완벽하게 팔찌에 달 수 있었다. 석양은 이미 하품하며 달빛에 기대어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다. 달그림자가 비친 팔찌엔 몽롱하게 부드러운 빛이 감돌았다. 만족한 그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가 분명 좋아하겠지.


12. 낡은 교내 신문
-하양이는 신이 난 듯 뱅글뱅글 돌았다. 이번에 가져온 건 낡은 교내 신문의 일부분이었다. 기사 글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당신이 고등학생 때 모범생 상장을 받던 순간의 사진이었다......
교내 신문 같은 건 사실 열심히 보는 사람이 별로 없다. 위에 빼곡히 적힌 학교의 발전이나 단체 표창 등에 관한 내용은 점심 먹을 때 책상에 깔려 식탁보로 쓰이고, 기름 얼룩을 잔뜩 묻힌 채 쓰레기통으로 직 행하기 마련이었다. 백기 역시 교내 신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느 날, 옥상에서 빵을 먹던 한예준이 한쪽에 깔려 있던 교내 신문 한 페이지를 집어 들더니 중얼거렸다. "지덕체를 갖춘 모범생이라… 형, 저는 생각도 올바르고 신체 능력도 뛰어난데 공부만 좀 못하잖아요. 그럼 덕체를 갖춘 모범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백기는 대답 없이 그저 무심하게 힐끗 쳐다보다 신문에 실린 시상식 사진을 보았다. 소녀는 시상대에 서서 쑥스러운 듯 상장을 받으며 기쁘게 웃고 있었다. '지덕체를 갖춘 모범생'이라고. 그는 그 몇 글자를 마음속에 꾹꾹 누르며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형, 형! 싸우러 가는 거죠!!! 나도 데려가요!"
"수업 간다."
"…네?"